♬ (86)
집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현서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달카닥.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거칠게 차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익숙한 인영의 남자. 서정혁이었다.
그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이며 거리를 좁혀 왔다.
“본부장… 님?”
보낸 메시지에 답도 없던 사람이 여기서 지금껏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싶어 조금은 반갑기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연락도 없이….”
마주 선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어딘가 모르게 썩 밝지 않은 표정의 그가 불길해서였다. 한편으론 설마, 하면서도 제게 화라도 난 건가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불안과 안도, 도무지 양립할 수 없을 양가의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고저 없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절로 제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그저 저를 떠보겠단 건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괜스레 제 발이 저렸다. 치기 가득했던 마음이 흔적도 없이 쪼그라들었다.
“본부장님은요? 식사, 하셨어요?”
표정이 없을 땐 서늘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남자의 얼굴이 이마 위에서 싸늘히 아른댔다.
“혹시 오래 기다리셨어요?”
그는 계속해 아무런 답도 없이 냉랭하게 새카만 눈동자만 천천히 깜빡일 뿐이었다.
“추운데 올라가요, 일단.”
하릴없이 도망치듯 먼저 돌아서 앞장을 섰다. 제 뒤통수로 향해 있을 남자의 시선에 온몸이 따끔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다시 내리고, 현관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메시지라도 보내지 그러셨어요. 전 본부장님 와 계신 줄도 모르고….”
“알았잖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불현듯 제 손목을 잡아 돌린 남자의 품에 현서는 맥없이 딸려 들어갔다. 덕분에 신고 있던 구두도 채 벗지 못하고 그와 마주 섰다. 커다란 손이 제 목에 감겨 있던 목도리를 가볍게 풀어내고 코트와 가방을 벗겨 휙, 신발장 위로 던져 올렸다. 덕분에 얇은 원피스 위로 느껴지는 남자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속 들쑤셔 보겠다고 그런 메시지까지 보낸 주제에 내가 여기까지 쫓아올 건 몰랐어?”
역시나, 그는 여지없이 제 속을 죄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냥 좀 모르는 척 좀 해 줄 것이지, 저를 구태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뻔히 들여다보는 그가 영 미워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가늘게 떠 그를 흘겼다.
“다 알면서…. 뭐 하러 오셨어요, 수고스럽게.”
“다 알아도 속은 뒤집어져.”
깜빡깜빡. 어두운 공간에 켜진 주홍빛 센서 등이 몇 번이나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상념이 그득했다. 조금 낯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분명, 회의실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눈이 아니었는데.
“질투를 하긴 하셨구요?”
“질투할 짓 했어?”
“아뇨. 말했잖아요, 선배랑 전 그냥….”
“그래, 아무 사이 아니라며.”
“네. 맞아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근데. 차현서랑 아무 사이도 아닌 놈 때문에 내가 왜 감정 소모를 해야 해.”
오롯이 저만을 향해 있는 남자의 동공을 마주하며 마음이 몽글몽글 무너져 내렸다. 눈을 맞추고 마주 선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이 잘나디잘난 남자를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말해. 대체 뭘 또 확인하고 싶어서 날 떠봤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선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묻고 있었다. 여전히 냉랭한 얼굴이었지만 제 등과 허리를 쓰다듬어 내리는 손길만은 다정했다.
그에게 모든 마음을 다 내어 주기로 한 이상, 이 유치한 질투의 감정과 하찮은 의심의 마음까지도 죄 다 내어 보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숨긴다고 쉽게 숨길 수 있는 속도 아닐 테니.
잠시 머뭇거리듯 입술을 달싹이다 작게 목소리를 냈다.
“아까 회의실에 들어왔던 분. 미셸 장, 맞죠?”
그가 느긋이 고개를 까딱였다.
“왜, 온 거예요?”
“이윤 너도 다 알잖아. 어떻게든 날 뉴욕에 끌고 가겠단 헛꿈으로 왔겠지.”
“정말… 그 이유뿐이에요?”
“뭐, 다른 이유가 더 있었으면 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뭐.”
추궁하듯 제게로 집요히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차마 곧바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일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깊은 관계였고, 한때는 결혼설까지도 돌았던 것에 대해 직접 확인을 하고 싶은 거였다.
“홍콩에 있었을 때부터 사귄다 어쩐다, 두 분 소문 많으셨던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제가 궁금한 건, 정말로 두 분이, 그 얘기들처럼….”
“잤냐고.”
“…….”
“결론적으로 묻고 싶은 게 그거지, 너.”
부정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만 감쳐물고 있는 저를 보며 그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직장 동료랑 사적으로 얽히는 취미 없어.”
“…저랑은…. 얽히셨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사고지.”
“…사고, 요?”
자격지심인지, 피해 의식인지 몰라도 돌연 그가 내뱉은 그 단어 한마디가 까슬하게 귀에 걸렸다.
사고. 보통은 원하지 않는데 우연히 날벼락처럼 맞닥뜨린 일을 일컬어 사고라 칭한다. 자신과의 관계를 사고라 표현하는 남자를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걸까. 원한 적도 없는데 마주하게 된 사고 같은, 제게 있었던 수많은 ‘부당한 불행’ 중 하나처럼 여기기라도 한단 소린가.
부정적 사고의 흐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래도 확연 정상적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미셸이랑은 직장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단 한 번도 남자 여자로 엮여 본 적도 없는 사이고.”
“…….”
“됐지, 확인.”
원하던 답을 들었는데 도리어 가슴은 침잠하듯 심연으로 푹,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표정을 모두 지운 그의 얼굴이 서럽고 서운해서 자꾸만 목 끝이 따끔댔다.
“앞으론 사실 확인을 하고 싶으면 확인만 해. 어설프게 까불지 말고.”
“까불… 어요?”
현서는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다갈색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리며 기막힌 한숨을 하, 내뱉었다.
마음이 격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미셸이 별안간 회의실에 등장할 때부터, 준한과 그의 어머니가 예고도 없이 저녁 식사를 권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을지 모른다. 저완 어울리지도 않는 남자와 당치도 않을 로맨스를 꿈꿨던 그 순간부터.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어요?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직 본부장님을 잘 모르고, 또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중이니까 충분히 그런 소문 듣고 오해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이게 본부장님한텐 까부는 거예요?”
“고작 그딴 소문 하나 때문에 사람 속을 이따위로 뒤집어 놓곤 까부는 게 아니야?”
“본부장님한테만 유독 그런 난잡한 소문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단 생각은 안 해 보셨구요?”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소문 하나하나 내가 다 일일이 해명하고 확인시켜 주고, 그래야만 넌 날 믿겠단 소리로 들리는데. 맞아?”
“네! 그러셔야죠. 제가 본부장님을 뭘 믿고….”
“그럼 난 널 뭘 믿고 매달려야 할까.”
말허리를 자른 그의 매끈한 미간이 설핏 일그러지고 있었다.
“너 지금 실체도 없는 소문에 휘둘려서 나 떠보고 들쑤시는 거잖아. 그것도 실체 확실한 김준한 이용해서. 너한테 대책도 없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내 마음, 내 약점, 살살 건드리고 후벼 파면서. 아주 악랄하게.”
“어차피 준한 선배랑은 아무 사이 아닌 거 다 안다면서요.”
“알지. 근데 그건 네 사정이고. 내가 분명히 물었던 것 같은데, 김준한 그놈도 당신한테 아무 마음 없는 거 확실하냐고. 물어는 봤어? 뭐래, 그 오랜 시간 차현서 주변만 내내 맴돌면서 한 번도 그런 마음 품은 적 없대? 손을 잡고 싶다든가, 키스를 하고 싶다든가, 아니면 포옹이나 섹스, 그런 걸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확신해?”
“하, 본부장님!”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는 그의 언사에 목소리를 높이며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돌연 냉랭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무섭게 실금이 갔다. 현서는 그 이유가 제가 무심결에 내뱉은 본부장이란 호칭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제 허리를 휘감고 있던 그의 손이 냉정하게 떨어져 나갔다. 한 발짝 뒷걸음질을 친 그가 치미는 화를 억누르듯 이를 바득 물자 관자놀이가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축하해, 차현서. 오늘 내 기분 엿같이 만드는 게 당신 목적이었던 거면 성공했어.”
센서 등이 다시 꺼지고 새카만 어둠만큼이나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만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걸까. 별안간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졌다.
“쉬어. 그만하자, 오늘은.”
조금 더 저를 몰아붙여 화를 낼 줄로만 알았던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며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인정했다. 아니,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그의 마음을 볼모 삼아 뭘 확인하고 싶었고, 뭘 시험하려 했는지. 그게 그에게 얼마나 못 할 짓이었는지,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었다.
달카닥, 돌아가는 문소리에 현서는 다급히 그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가지 마요.”
돌아본 남자의 눈동자가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이러고 그냥 가면 어떡해요, 아직도 나한테 화났으면서.”
“안 났어.”
“거짓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제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잡은 옷자락을 더 꽉 움켜쥐었다. 표정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어진 서정혁의 얼굴에 덜컥 겁이 나서였다.
“내가 잘못했어요. 고의로 서정혁 씨 마음 떠보려고 했던 내 잘못, 인정해요.”
천천히, 느릿하게 몸을 돌린 그가 다시 제 앞에 바짝 다가와 섰다. 한참이나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만 하는 그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올곧게 직시했다. 여전히 뒤틀려 있는, 무언가 잔뜩 부글거리는 시커먼 눈동자가 마음 아팠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먼저 양손을 뻗어 그의 몸에 안겨 들었다. 익숙한 체향에, 아이처럼 매달리며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후회할 텐데.”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가 한참 만에야 입술을 열었다. 낮은 그의 목소리에 맞닿은 몸 구석구석이 저릿했다.
“더 있다간 확실한 개자식이 될 예정이라.”
“상관없어요. 그냥 가지만 마요.”
정혁은 자존심도 없이 매달리듯 안긴 그녀를 떼어 내 그 작은 얼굴을 손끝으로 훅 끌어 올렸다. 혼란과 분노 그리고 성욕과 불손한 충동에 사로잡힌 머릿속이 지글지글 들끓었다.
“착하게 굴어야 할 거야.”
그는 이 와중에도 눈치 없이 예쁘기만 한 여자의 얼굴을 못마땅히 내려다봤다.
“기껏 도망치는 시한폭탄 붙잡아 안은 거 당신이니까, 각오해.”
그러곤 그대로 깊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젖은 입술이 억세게 마찰하며 아프도록 들러붙었다. 흡사 육식 동물이 먹잇감을 물어뜯는 듯한 난폭한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