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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이 한바탕하고 나간 뒤 곧바로 문밖에 서 있던 레오가 걸어 들어왔다. 그러곤 변명하듯, 관자놀이를 꾹꾹 짓누르는 정혁을 향해 변명하듯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미셸이 진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난 알았어. 이렇게 빨리 쫓아올 것까진 몰랐지만.]
[미셸이 쫓아온 거 보니 뉴욕 상황이 어떤지 생생히 알겠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차현서 씨랑 같이 가시는 건 어떠세요. 어차피 차선엽도 본부장님 제안에 수긍했고, 따르기로 했잖아요. 그 못 믿을 인간 기다리느니, 그냥 같이 여길 떠나시는 게 더 낫지 않으세요?]
[못 들었어? 아버지 때문에 빚 50억 다 떠안고도 원망 한 번 안 했다잖아. 그런 여자가 노쇠한 아버지 혼자 두고 그 멀리까지 순순히 가겠어?]
[그럼 우선 혼자라도 가셔서 급한 불이라도 먼저 끄고 오시든지요. 여긴 어떻게든 제가….]
[차선엽을 믿어? 차문엽은 또 어떻고. 지금 가면 제로섬 게임 각오해야 할 텐데 보나 마나 한쪽이 끌려 나갈 때까지 버티는 장기전으로 가게 될 거고. 그사이에 차현서한테 아무 일도 없으리란 보장 없잖아.]
결국엔 차현서에 대한 안절부절, 전전긍긍한 마음 때문에 홀로 자리를 비우지도,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갈 마음도 먹질 못한단 얘기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어쩌다가 저 피도 눈물도 없었던 서정혁에게 이렇게나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 버렸나. 레오는 답답함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선엽 위치는?]
[인천 부둣가 근처 모텔방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본인이 원한 대로 위조 여권이랑 밀항 루트까지 마련해 줬는데, 며칠만 시간을 더 달래서 계속 지켜보는 중입니다. 뭐. 딸이 달려 있기도 하고, 본인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감시받고 있단 거 아는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고요. 그냥 혼자 좀 마음을 정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남자의 관자놀이가 짜증스레 불끈거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 협박에 죽은 채 살기로 결심을 한 차선엽은 딸과의 연락을 영원히 끊은 채 홀연히 해외로 떠나겠다 말했다. 그가 원한 조건은 그저 제 딸이 잘살고 있나, 가끔씩 생사 확인을 하는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인 차문엽은 재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아무래도 자신이 차선엽에게 던져진 미끼였단 걸 알고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것이리라.
결국, 사람을 풀고 사설 불법 인력까지 동원해 그를 찾아다녔지만 어쩐 일인지 며칠째 행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레오의 추측처럼 다시 한국을 떠난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이런 상황과 더불어 정혁의 마음도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져만 갔다. 마음 같아선 차현서의 눈과 귀를 막은 채, 제 방에 가둬만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옆의 여자와 매일 눈을 맞추고, 품에 안고 떠들 수 있는 이 행복이 마치 시한부 같아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미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일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그 여자 생각 하나뿐이어서, 지독히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생각들만 잔뜩이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지금껏 죽기 살기로 쌓아 온 걸 다 포기하겠다고요? 네가 포기하려는 것들이 다 얼마짜린지는 아는 거지? 그게 그 볼품없는 여자보다 가치가 없는 것들이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잡념을 떨쳐 내려 이를 꽉 물었다.
지이잉.
때마침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무심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긴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정혁의 미간이 깊게 팼다.
「준한 선배랑 선배 어머님이 찾아오셔서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요. 준한 선배랑 관계없이 어머님이랑은 원래 가끔 이렇게 저녁 먹곤 했었어요. 오늘은 선배도 낀 것뿐이구요. 혹시나 지난번처럼 오해하실까 봐서요. 밥만 먹고, 얼른 집에 들어갈 거예요. 집에 가면 전화할게요.」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구구절절 긴 변명을 쓴 것 같은데 그게 도리어 속을 긁었다. 별안간 유치한 마음이 스멀대고 치밀었다. 그저 아무 사이도 아닌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는, 고작 별것도 아닌 일에 초조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분인 거였다.
레오가 나가고 홀로 남은 정혁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대어 앉으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혼자서만 감내하면 그만일 줄 알았던 괴로움이 예상보다 꽤 크고 진했다. 아무래도 저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늘 그랬듯 모든 문제는 차현서로 귀결됐다. 행여나 그 여자에게 부당한 불행이 또 한 번 들이닥치진 않을까 마음이 달고 겁이 나는 거였다.
지금 이 불안의 근원은 결국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므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욕심이라 해도 좋았다. 어떻게든 차현서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가장 두렵고 겁나는 그 상실을 겪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뭘 잃고 어떻게 망쳐진대도 상관없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다.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정혁이 상체를 훅 일으키며 인터폰 버튼을 꾹 눌러 말했다.
[저녁 일정 다 취소해. 바로 퇴근할 거야.]
***
“음식이 별로 입에 안 맞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현서를 향해, 준한의 어머니인 오미란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맛있어요.”
“근데 왜 그렇게 넋을 놓고 밥알만 세고 있어. 지금 먹는 거 입에 영 안 맞으면 다른 거 시켜 줄까?”
오미란은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고, 결국 옆에서 지켜만 보던 준한이 마지못해 제 어머니를 말리고 나섰다.
“현서 원래 밥 천천히 먹는 거 알면서 왜 그러세요. 괜찮아. 천천히 먹어.”
“참나…. 그냥 물어본 거야. 왜 잘 못 먹는지 나도 걱정이 돼서. 하여튼 누가 보면 저만 현서 생각하는 줄 알겠네.”
“얘 조금이라도 급하게 먹으면 잘 체해요.”
“알아, 알아. 나도 안다, 이놈아. 어휴, 하여간 이놈은 정말이지….”
오미란은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썩 싫진 않은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 가까운 곳에 임자를 놔두고 왜 멀리서만 찾으려 했던가 싶었다. 여자라곤 어느 누굴 데려다 앉혀 놔도 일말의 관심도 없어 하는 제 아들 곁에 있는 유일한 여자가 바로 현서라는 걸 불현듯 깨달은 거였다.
물론 처음엔 귀한 막내아들에게 조금 더 좋은 조건의 상대를 맺어 주고 싶은 속물적 욕심도 없진 않았으나 그래도 제 자식이 좋아하는 여자인데 그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 배 아파 낳았지만 너 이렇게 말할 때마다 정떨어져, 정말. 아,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다만 현서 너도 알잖니. 준한이 얘 너라면 껌뻑껌뻑 넘어가는 거. 하다 하다 적성에도 안 맞는 일 하겠다고 펌까지 너 따라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니. 이제 와 말이지만 나랑 준한이 아버지랑 그땐 솔직히 현서 너 원망도 많이 했었다?”
“어머니.”
“말 끝까지 좀 하자, 이놈아. 지금은 결과적으로 현서 덕에 네가 좀 자기 몫 챙길 줄도 알고 깔끔도 덜 떨고, 사람 냄새도 적당히 나고. 그렇게 좋아졌단 얘기야. 그래서 현서한테 내가 늘 고맙단 소릴 하고 싶은 거고.”
“네, 알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현서는 그동안도 종종 듣던 이야기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말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님한테도, 선배한테도. 저한테 두 분은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고요.”
늘 아웅다웅 하면서도 서로를 끔찍이 생각하는 모자 사이가 보기 좋았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제 엄마의 얼굴이 그리워졌을 만큼.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내가 더 고맙구.”
오미란이 빙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이해해. 우리 엄마 요즘 뒤늦은 갱년기라 사실 나도 좀 버겁다.”
준한이 긴 한숨 섞인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현서는 습관적으로 식탁 밑의 핸드폰을 흘긋대며 확인하고 있었다. 실상 사무실을 나서면서부터 지금껏 신경은 온통 이 자리 밖의 한 남자에게만 쏠려 있었다.
서정혁은 여태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에겐 굳이 자신이 어디서 뭘 하는지 그렇게까지 자세히 밝히지 않아도 됐다. 먼저 묻기 전까진 그저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하면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그에게 준한, 그리고 그의 모친인 오미란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단 얘기를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진짜 준한과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었던 마음 하나와 그의 마음속에 아주 작은 동요라도 살짝이나마 일으키고 싶은 또 다른 심술 하나.
솔직해지자면 후자의 이유가 더 컸다. 이 유치한 감정의 발단은 오늘 오후 미셸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이다. 자신이 그녀에 대해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 텐데도 그렇게 단둘이 사라져선 무슨 얘길 했는지, 왜 그녀가 여기까지 쫓아온 건지, 한마디 변명도, 이야기도 해 주질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아무래도 잘난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불안감 따위, 그가 제대로 이해할 리 없었다.
그래서였다. 심상한 마음에 못난 심술이 났다. 이렇게 소심한 몽니라도 부려 철옹성 같은 남자의 마음에 일말의 동요라도 일으켜 보고 싶을 만큼. 쉬이 한 번을 안 져 주려는 남자가 미워서.
나쁜 놈….
현서는 괜스레 애꿎은 핸드폰 액정을 보며 치미는 원망을 겨우 주워 삼켰다.
“요즘 일은 어때? 할 만해?”
오미란의 질문에 복잡한 상념이 불쑥 끊어졌다.
“네. 펌에 있을 때보다 바쁘긴 하지만 재밌습니다. 배울 것도 많고요.”
“다행이네. 준한이한테 너 거기 간단 소리 듣고선 내심 걱정 많이 했었는데, 적응 잘하는 것 같네. 좋아 보인다.”
그녀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미란은 교양 있고 아름다웠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편이었다. 준한이 어떻게 이렇게 바르고 올곧게 클 수 있었는지, 그녀와 그녀의 남편만 봐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한때는 그런 준한을 많이도 질투했었다. 곱게만 나고 자란 도련님이 뭘 알겠냐며 내심 그를 무시하고 꺼려도 했다. 기실 자신이 꿈꿀 수도 없을 좋은 부모와 완벽한 환경에서 자란 그가 눈물 나게 부러워서였다. 돌이켜 보면 제 못난 자격지심 탓이었지만.
“우리 준한인 요즘 아주 죽으려고 해. 게다가 너까지 옆에 없으니까 더 힘든가 봐.”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냔 듯 준한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대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서울청 광수대에서 강력 미제 사건 전담하는 팀 꾸렸잖아. 거기서 이 사건 저 사건 들쑤시는데, 지목된 피의자가 국정당 이윤형 의원이야. 우리 의뢰인.”
“형사 사건? 뭔데?”
“유괴, 감금치사 교사 혐의.”
‘유괴’란 말에 현서의 동공이 동그래졌다.
“이윤형 의원이 왜….”
“얼마 전 선우선 장관 딸 유괴 사건이랑도 연관이 있기도 하고.”
“그 사건 범인은 이미 잡힌 거 아니었어?”
대대적인 규제 개혁 의지를 보이며 여론의 중심에 있었던 전 국토부 장관의 딸이 유괴됐던 사건이라 한동안 온 세상이 다 떠들썩했던 사건이었다. 덕분에 수사의 진척도 빨랐던 것으로 기억을 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왜.
“아, 머리 아프다. 일 얘긴 그만하자. 그리고 이거 아직 언론에도 안 샌 내용이라 나 계속 밥 벌어 먹고살려면 비밀 유지 의무 준수해야 하거든.”
준한은 말을 자르고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연스레 또 남자를 떠올려 버린 현서는 손끝으로 테이블 아래, 핸드폰 액정만 덧없이 만지작댔다.
“근데 현서 넌, 요즘도 만나는 사람 없어?”
오미란이 슬쩍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현서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