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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은 성가시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는 정혁의 뒤를 바짝 쫓아 널따란 공간으로 들어섰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채색의 싸늘하고 차가운 분위기만으로도 누가 이 사무실의 주인인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다.
참 라이언 당신답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시선 끝에 어색하고 낯선 사물이 걸려들었다. 그녀의 이목을 끈 건 휑해 보이기까지 하는 책상 위, 덩그러니 놓인 화병이었다. 하얀 튤립이 탐스럽게도 꽂힌 화병이 삭막한 이 공간에 퍽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바빠, 바로 나가 봐야 해.]
상념을 끊어 내듯 그가 말을 딱 잘랐다.
[누군 안 바빠서 이 멀리까지 온 줄 알아?]
[멀리서 온 성의 참작해서 딱 5분 내 줄게. 부탁인데 용건만 간단히 하자. 물론 그냥 나가 주면 더 고맙겠고.]
의자에 털썩 앉은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성의 없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 때문에 뉴욕에서부터 스무 시간 가까이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날아온 사람한테 이게 지금 할 소리야?]
[뭘 원해? 웰컴 파티라도 열어 줘?]
[나 지금 심각해. 여기까지 당신 하나 설득하겠다고 쫓아온 거라고.]
[그게 용건이면 허탕이네. 돌아가.]
[아니. 난 무조건 당신이랑 같이 돌아가야겠어.]
[나도 안 간다는 의사 분명히 밝혔어. 먼 길 온 김에 관광이나 하면서 좀 쉬다가 가든지. 서울에 볼만한 거 많더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아? 취소된 이사회, 일주일 뒤로 다시 날짜 잡혔어. 징계 결의까지 안 되더라도 그딴 안건이 재차 올라왔단 사실 자체로 이미 전쟁 선포된 거야. 지금 당장 돌아가서 상황 수습해도 늦어. 앤더슨 그 음흉한 늙은이가 무슨 꿍꿍이인 건지 분위기 아주 엿같다니까? 오죽 심각하면 내가 여기까지 쫓아왔을까 하는 생각 안 해 봤어?]
심각한 미셸의 표정과 달리,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다시금 책상 위의 모니터 화면을 켜고 응시하는 정혁의 얼굴엔 조금의 관심도 담겨 있질 않았다. 도무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미셸의 답답한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안 가고 여기서 버틴다고 이 상황 해결할 다른 방법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왜 없어. 당신은 나보다 그 개자식들 능력을 더 신뢰하나 보지?]
[대체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협상 파투 난 지 오래고, 이제 잃을 것도 없는 쪽에서 이렇게 죽자고 달려드는데 당신이라고 뭐 다른 뾰족한 방법 있어? 아니, 설령 있다 해도 직접 가서 해결하는 게 가장 쉽고 빠르고 확실한 방법 아니냐구. 지금 안 가면 기껏 밑밥 깔아 놓은 일들 다 허무하게 망쳐질 거고, 그럼 후계고 뭐고 끝이야. 그건 알지?]
[잘됐네. 끝낼 때 됐어. 이 짓도 지겹다, 이제.]
[라이언!]
[5분, 끝.]
미셸은 시계를 흘긋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하는 그가 야속하기만 했다. 자신이 쫓아온다고 해서 순순히 제 말을 듣고 제 손에 이끌려 돌아갈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만, 지금의 그는 분명 자신이 아는 라이언 서의 모습과는 어딘가 달라도 한참이나 달랐다.
[나가는 문은 뒤쪽. 바빠서 배웅은 못 하겠고, 잘 가.]
툭, 턱 끝으로 저 너머를 가리키면서도 제겐 눈 한 번 맞추지 않는 그였다. 원망스러웠다. 늘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제게 벽을 치고 선을 긋는 라이언에게 이젠 더 떨어질 정도 없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또 여지없이 화가 나고 상처받는 걸 보면.
미셸이 제 눈앞의 남자에게 마음을 품기 시작했던 건 꽤 오래전이었다. 여자란 이유로 저를 무시하며 경쟁의 상대로도 끼워 주질 않던 세계에서,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인맥 하나 없인 성공하기 힘들다 말하는 정글에서,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라이언 서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가 자신이 파트너로 일하고 있던 홍콩 지사에 발령받아 왔을 때 혹자들은 말했다. 곧 피바람이 불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시아 본부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돈만 잡아먹고 있던 공룡이 바로 홍콩 지사였다. 새 지사장 지휘하에 기존의 루틴과 업무 방식이 모조리 뒤엎어질 건 자명했다. 그러니 그에 앞서 기존 직원들의 물갈이 인사가 있을 거란 예측 또한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라이언은 오히려 파트장이었던 그녀를 부지사장으로 승진시키는 파격 인사를 감행했다. 모두가 반대한 일이었으나 그는 거리낌 없이 그 모든 반대를 무릅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판단에 고려된 요소는 오로지 업무 인수인계서와 그간의 성과 보고서, 그리고 각종 차트와 숫자들뿐이라 했다. 지금 회사와 저에게 필요한 건 그저 일 잘하는 파트너일 뿐이라고.
그에겐 함께 일할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누구의 자식인지, 어디 출신인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돈만 잘 벌어 오면 그뿐, 그게 누구든 상관없단 식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처음으로 자신을 여자가 아닌, 가난한 시골 창부의 딸이 아닌, 그저 부하 직원으로서, 동료로서, 파트너로서 여겨 준 사람이 바로 그라는 사실이.
라이언 서는 철저한 시장 경제주의 신봉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이 얼마나 따스하고 다정한 말인지 알려 준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갚기 위해서도, 미안함을 떨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던 만큼만 보여 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그저 충실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일하며 돌아보니 어느새 홍콩 지사는 골드스톤의 제2의 거점으로 성장해 있었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훌륭한 성과들을 이뤄냈다.
모든 게 다 그 덕분이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이 정글에서 지금껏 알량한 목숨 줄 붙이고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상사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남자로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라이언 서, 그 덕분에 바짝 마른 풀처럼 죽어 가던 제 인생이 생기를 얻어 되살아났다.
라이언은 제게 구원자였다.
그러니 그녀로선 지금 어떻게든 그의 편에서, 그를 도와야만 했다.
[진짜 안 어울린다, 그 꽃.]
책상 위, 덩그러니 꽂힌 튤립 화병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그제야 모니터 속에 붙박여 있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진심으로 당신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미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뉴욕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차현서란 여자 때문이라는 걸. 처음엔 그저 그동안 있어 왔던, 그렇고 그랬던 수많은 염문설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이곳에 와서 보니 모든 게 또렷해진다. 지금 제 눈앞의 남자는 확실히 자신이 알던, 생존 본능에 충실한 들짐승 라이언 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시그널이 확실한 위급 상황에 이런 바보 같고 무모한 짓을 할 리 없는 사람이니.
[논리적 설득에 실패하고 나니 감정적 비난 쪽으로 노선 선회라도 한 건가?]
[아까 그 여자 맞지? 회의실에서 봤던.]
한눈에 알아봤다. 자신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무례하게 들어서는 와중에도 라이언의 시선은 온통 한 여자에게만 가 닿아 있었다. 기가 막혔다. 본인은 과연 아는 걸까. 그 작고 단아한 여자를 바라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를. 얄미운 그 앞에 거울이라도 비춰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가관이다. 당신 정말 내가 알던 라이언 맞아?]
[아닌 거 알았으면 이쯤 해. 말 보태지 않아도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니까.]
[그러게 왜 머리 터져 나갈 짓을 해? 답은 간단해. 지금 당장 나랑 같이 가서 상황 해결하면 그뿐이야. 당신 돌아왔다는 한마디면 쫄아서라도 꼬리 내릴 이사들이 태반이라고. 왜 쉬운 일을 어렵게 하려는 건데? 이게 당신이 말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야? 이러고 고집 리는 게 지금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라이언 서가 그깟 계집애한테 미쳐서 이러고 있는 게 말이 되냐고!]
결국 마음에 꾹 눌러 담았던 말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태연히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에선 더 믿을 수 없는 답이 돌아왔다.
[말 안 되지. 말 안 되니까 네가 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튀어 온 걸 테고.]
[알면서 왜!]
[당신은 다 알면서 왜 왔는데.]
[하, 라이언, 진짜!]
[좋아. 네가 이렇게 닦달하지 않아도 곧 한국 떠날 거야. 어차피 떠나야하기도 하고. 근데 지금은 아니야. 할 일 있어. 가도 그거 끝내고 가.]
도대체 뭐가 지금은 아니라는 걸까. 도대체 무슨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건가.
[왜? 지금 당장 못 떠날 이유가 뭔데? 둘이 뭐 애절한 연애라도 해? 잠시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안 될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느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결코 묻고 싶지 않았던 반문을 던졌다. 애당초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확인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나 본의 아니게 유치해진 감정이 불쑥 엇나가 버린 거였다.
그러나 기막히게도, 제 말을 인정하듯 깊이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깜빡일 뿐이었다.
[그렇다 치면. 당신이 말하는 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한 설명이 좀 되겠어?]
[하! 어이없어.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다. 이거 봐, 라이언 본부장님.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지금껏 죽기 살기로 쌓아 온 걸 다 포기하겠다고요? 농담도 적당히 해.]
[누가 그래, 내가 다 포기한다고.]
[그럼 아니야? 지금 여기서 이러고 버티겠다는 거, 내 귀엔 다 포기하겠단 소리로밖엔 안 들려. 네가 포기하려는 것들이 다 얼마짜린지는 아는 거지? 그게 그 볼품없는 여자보다 가치가 없는 것들이니?]
[굳이 가치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런 셈이지. 내가 안 가져 본 것 없이 다 가져 봤는데 그 여자만큼 내 눈 돌아가게 하는 것도 없었거든. 알다시피 내가 안목이며 심미안 하나는 뛰어나잖아?]
결국 할 말을 잃은 미셸의 입술이 헤 벌어졌다. 당황한 그녀의 잇새에선 믿을 수 없다는 듯 감탄사만 연방 이어졌을 따름이었다.
정혁은 지그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설득할 생각 말고 정 급하면 당신이 날 손절해. 혹시라도 내 일 잘못되면 당신한테까지 똥물 튀는 것쯤 나도 잘 알아. 배신해도 특별히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줄게. 네 살길부터 찾아.]
[당신 정말…!]
흥분한 미셸이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입술을 짓이겼다. 제 마음 따위 눈곱만큼도 몰라주는 그가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아니. 아니었다. 외려 다 알면서도 제 앞에서 다른 여자를 입에 올리고, 그 여자 때문에 진창으로 들어가겠단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의 잔인함에 치가 떨려서였다.
[잘 들어, 라이언. 나는 당신 어떻게든 도울 거고, 가장 손쉬운 방법부터 염두에 둘 거야. 그러니까 당신한테 일말의 이성적 판단력이 남아 있다면, 이딴 안 어울리는 연애질 집어치우고 제발 현실로 돌아오길 바라.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부탁 아니고 경고야, 이건.]
저를 향해 여전히 무감한 시선을 보내는 그를 보며 미셸은 통보하듯 내뱉고 뒤돌아섰다. 거침없이 그의 사무실을 걸어 나오는데 저를 붙잡아 세우긴커녕 등 뒤의 문이 쿵, 하고 싸늘하게 닫혀 버렸다.
[하….]
기막힌 듯 고개를 젓는 그녀의 표정에 난감함이 가득 어렸다.
어떻게 해야 수렁에 빠져서도 고집불통으로 버텨 보겠단 저 남자를 건져다 놓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답은 하나뿐인 듯싶었다. 천하의 라이언 서를 눈 돌아가게 만든 장본인. 답은 그 여자, 차현서였다.
또각또각. 미셸의 하이힐 소리가 바빠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