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높다란 지게차 위에 올라앉은 차선엽의 얼굴이 겁에 질린 듯이 차게 식어 있었다. 기어와 운전대를 꽉 움켜쥔 양손이 저도 모르게 잘게 파들댔다.
이제 와 떠올려 보면 현서와 함께 우연히 서정혁을 마주쳤던 그날도 무언가 불안하고 불길했다. 저를 향해 쏟아붓던 그 집요한 눈빛의 의미 또한 분명한 적의였음을, 이제 와 뒤늦게 곱씹어 깨닫는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던 서정혁의 정체가 제 오랜 악몽 속 사내아이라는 걸 알아챈 순간. 그리고 그의 입에서 절대 되새기고 싶지 않던 그날의 이야기가 다시 흘러나온 순간. 수치도 잊은 채 새파랗게 젊은 남자의 발 앞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그날, 당신도 내 부탁 안 들어줬었잖아?”
그러나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제 머리 위에서 내뱉던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부탁을 하고 어떤 애원을 한다 해도 그에겐 결코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그럼에도 간절히 애원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 제 지난 20여 년의 세월이 허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범죄를 저지르고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 그 알량한 명분과 구차한 구실들. 그걸 계속해 지켜 내야만 했다.
“나는 몰라도 우리 현서만큼은 살리고 싶어서, 귀한 그 애 인생만큼은 지옥 불구덩이에 처박아 넣고 싶지 않아서 지금껏 진창에서 악착같이 깨금발 들고 날뛰었소. 그러니 제발, 그냥 이 늙은이 하나 마음껏 찢어 죽이는 걸로 복수하면….”
“언제부터 그런 불공평한 행위를 복수라고 불렀습니까? 당신은 내 동생, 우리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우리 가족 네 사람 인생을 진창에 다 처박아 놓고서는 나보곤 그러지 말라니, 이거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으신데요.”
“그럼 정말로 아무 죄 없는 내 딸애한테까지 이 악연을 앙갚음해야 속이 시원하겠단 겁니까?”
그 순간 차선엽에겐 서정혁이 악마나 다름없었다. 필사적으로 지켜 왔던 제 모든 걸 다 부숴 파괴하겠단 의미였을 테니.
차라리 눈앞에서 죽겠다며 바닥에 이마를 거세게 찧고 테이블 위의 유리컵을 깨 손목에 푹 그으려 했을 때였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커다란 덩치의 외국인 비서가 들어와 몸을 포박하듯 제 행동을 막았다.
침묵하며 그 모든 상황을 태연히 관망하고 있던 서정혁이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지척까지 다가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자격도 없는 새끼가 어디서 감히.”
칼날 같은 힐난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볼 생각이었으면 진작 내가 죽여 묻었겠죠, 아저씨.”
새카만 분노가 담긴 서정혁의 눈동자엔 잔혹한 살의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왜 자꾸 모르는 척을 하실까. 당신이 그날 그 일을 저지른 순간 당신 딸 인생도 이미 지옥 불구덩이에 같이 처박혔어. 알잖아.”
“아니! 절대로 안 그래, 우리 현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르고 행방불명된 아버지에, 손에 쥔 건 50억 빚뿐이고, 도와줄 사람은커녕 돈 냄새 맡고 나타나 등쳐 먹기나 하는 개만도 못한 작은 아버지까지. 성인도 안 된 어린 나이였던 당신 딸이 그 지옥에서 살아 나오겠다고 얼마나 악착같이 발버둥 쳤는지, 정말 몰라?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당신 딸 인생에 똥물을 튀길 대로 다 튀겨 놓은 장본인인 주제에, 정말로 몰라서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원하는 게 뭐길래 이렇게까지….”
“당신이야말로 원하는 게 뭔데. 다 딸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변명하고 자위할 구실이 필요해?”
서정혁은 콧방귀를 뀌었다.
“위선 작작 떨어. 당신은 딸 인생이 온전하길 원하는 게 아니라 당신 범죄의 유일한 구실이고 핑곗거리인 딸이 당신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서 어떻게든 그걸 피해 보고 싶은 것뿐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차현서한테만큼은 불쌍한 아버지, 희생한 아버지, 좋은 아버지. 그 빌어먹을 놈의, 아버지여야만 했겠지.”
비수처럼 꽂혀 드는 서정혁의 말에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저를 바닥 끝, 지옥까지 끌어내리러 온 악마가 아닐까 하고.
“그래야 당신의 그 좆같은 인생이 그나마 정당화될 테니까. 아니야?”
“뭘 바랍니까! 나한테 뭘, 대체 어쩌란 거요!”
제 속을 고스란히 읽어 낸 악마에게 수치도 잊은 채 악에 받쳐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사라지시죠, 아무 죄 없는 따님 인생에서.”
불현듯, 그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요구가 들이닥쳤다.
“내가 당신한테 원하는 건 그거 하나야. 죽은 사람으로, 죽은 듯이 사는 거, 당신 그거 잘하잖아. 당신 딸 차현서한테 그대로 하시라고.”
“대체, 무슨…!”
처음부터 서정혁이 모든 걸 철저히 계획해 자신과 현서에게 접근한 건 퍽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죽은 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게 놈의 목적이라 생각했다. 저를 무너뜨리고 더불어 현서의 인생까지 뒤흔들어 놓을 의도인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요구는 도저히 제 딸의 인생을 망쳐 제게 복수를 할 작정인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었다.
“그럼 차현서, 그 여자 인생은 지금까지처럼 그대로,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갈 겁니다. 당신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 아버지란 작자의 극악무도한 실체, 그 여잔 전혀 모른 채로 계속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내가.”
무슨 생각인지, 어떤 꿍꿍이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놈의 복수엔 목적도, 의도도 불분명했다.
정말로, 뭘 하고 싶은 건가. 뭘 하겠단 건가. 혼란과 불안이 집채처럼 덮쳐 왔다.
“머리 굴리지 마. 당신한테 다른 선택지 없어.”
무지에서 기인한 불안과 두려움은 생각보다 커다랬다. 실체 없는 공포는 차선엽의 내면을 조금씩 조금씩, 좀먹듯 잠식해 갔다.
“하나 묻죠. 그날 그 일에 대해 후회, 반성…. 그 비슷한 거라도 한 적은 있습니까?”
서정혁이 제게 던졌던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그 질문에 그렇다고, 늘 그래 왔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운 악몽을 꿔 왔다고 답을 했다면 놈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지만 차선엽은 확신했다. 제가 그런 답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답을 들었다 해서 놈이 결코 동정이나 자비를 베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악마였다. 그건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차선엽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로 그곳을 돌아 나왔었다.
지이이잉.
주머니 속, 짧게 진동한 핸드폰을 다급히 꺼내 쥐었다. 일순 불안에 절어 있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기다렸던, 그러나 피하고 싶었던 연락이었다.
「서정혁 본부장님 지시로 연락드립니다.」
때마침 저 멀리에서 오래 작동을 멈추고 있는 차선엽의 지게차를 이상하게 여긴 작업반장이 터벅터벅, 인상을 구긴 채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 바빠 죽겠는데…!”
그러나 이미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린 차선엽에게 그의 목소리 따위가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차선엽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곤 곧바로 지게차에서 훌쩍 내려왔다. 되레 당황한 작업반장이 어버버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아니, 뭐 하는 겁니까?! 차선엽 씨! 내 말 안 들려요?”
마음이 바빠졌다. 메시지를 본 순간, 서정혁, 그 악마의 말대로 지금 제게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완벽히 인지한 거였다.
“어디, 지금 일하다 말고 어딜 가는 거…! 이봐! 차선엽 씨!”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으나 차선엽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그렇게, 다급히 어딘가를 향해 사라져 갔다.
그게 그를 아는 누군가가 기억하는 차선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아마 이 정도면 찬성 쪽 주주들 입장에서도 저희 골드스톤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단 충분한 명분이 될 겁니다. 박신우 교수도 더는 자기 고집만 부리기 난감해질 거고요.”
전략 팀장이 꽤나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짧은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꽤 오래 가만히 자료만 훑던 정혁의 입에서 나온 지시는 퍽 뜻밖의 것이었다.
“아뇨. 값 더 띄웁니다.”
“블러핑을 하란 말씀입니까?”
정혁은 앞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구미가 당길 조건인데 굳이 그럴 이유가….”
“차 팀장님한테 여쭤보시죠.”
“네?”
고개를 꺾어 한 모금, 물을 꿀꺽 삼킨 그가 돌연 가장 끝자리에 앉은 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졸지에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됐다.
“김 팀장님 그날 취해서 아무것도 못 듣고 그냥 가셨잖습니까.”
태성 금 회장과 저녁 식사를 했던 그날을 말하는 거였다. 전략 팀장은 멋쩍은 듯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럼 오전까지 옵션 수정한 제안서 재작성해 오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차 팀장님.”
“네.”
계속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잇는 그의 시선이 여지없이 뜨거웠다. 아니, 지금은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시선이 분명한데도….
“오전에 결재 올렸던 법무 팀 공식 의견서 말고 태성 건 진행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법률적 리스크들, 하나씩 따로 검토해서 보고 부탁드립니다.”
그의 지시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합법적 방법만 고수하고 있진 않겠단 의미였다. 과정보다 결과와 성과를 중시하는 서정혁다운 처사였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답하며 태블릿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려 고정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서정혁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행히도 안 죽고 살아 있었네. 나라도 당신 장례 치러 줄까 싶어 왔더니만, 고작 내 연락 씹고 하는 짓이 회의라니. 나 지금 좀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라이언.]
검고 긴 생머리의 여자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정혁을 향해 사나운 인사를 건넸다. 여자의 등장에 곤혹스러운 듯 이마를 짚은 정혁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톡, 내려놓으며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앉았다.
“이쯤 해야겠습니다.”
정혁의 한마디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서도 그들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저도 모르게 줄곧 낯선 여자를 살피고 있었다.
사내 전산망을 통해 검색했던 사진 속 여자. 제 기억이 맞다면 눈앞의 여자의 정체는 분명 미셸이었다.
그녀가 왜 한국엘, 왜 이곳에 들이닥친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혼란해진 머릿속이 정신없이 뒤엉켜 갔다.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떠밀리듯 발걸음을 옮기는 현서의 얼굴에 초조와 불안이 그득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