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현서는 똑똑, 짧게 노크를 하고 살짝 열어젖힌 문틈 새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널따란 원목의 책상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정혁이 흘긋,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선을 맞춰 왔다.
“바쁘세요?”
“5분.”
그가 까딱 고갯짓을 했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그제야 현서는 조심스레 서재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쩌다 보니 함께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이 붙어 오늘은 일도 다 끝내지 못하고 퇴근을 했다. 목적지는 자연스레 그의 펜트하우스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온종일 굶주렸던 사람처럼 곧장 몸을 겹쳐 왔고, 현관에서 한 번, 침대에서 한 번, 총 두 번의 사정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를 놓아줬다.
새벽 두 시. 겨우 남은 힘을 쥐어짜 샤워를 하곤 노곤노곤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저도 모르게 잠시 눈을 붙였다 뜬다는 게 그만 지금 시각이었다. 자신이 자는 동안에도 정혁은 지금껏 못 다 끝낸 업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소파에 앉아 그의 일이 끝나길 기다릴 참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타닥타닥.
규칙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기다란 손가락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 고전 명화 속 피사체처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의 얼굴이 제 눈앞에 비현실적으로 아른댔다.
참 이상한 남자였다. 언제고 악마처럼 빙글대며 능청을 떨고 빈정거리다가도 금세 얼굴을 바꿔 상대를 제압한다. 대부분의 시간, 대부분의 타인에겐 소름 돋을 만큼 서늘하고 사납게 굴면서도 저를 안을 땐 더할 나위 없이 뜨겁기만 하다.
두 얼굴이라고까지 말하기엔 비약이겠으나 일관된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배스로브를 대충 걸쳐 벌어진 라펠 사이론 상박의 근육들이 탄탄하게 굴곡져 보이는데, 얼굴은 또 금욕적으로까지 보일 만큼 무표정했다.
이상해.
역시나 이상했다. 이상하고도 좋았다.
그가 선사하는 이 이상한 온도 차가 좋았다. 섹시했다. 남들이 다 아는 라이언 서와 저만 아는 서정혁 사이의 간극이 또 야릇하게 느껴져서….
꼬리에 꼬리를 문 상념에 불현듯 두 뺨이 홧홧해지고 있었다. 이미 한번 달궈졌던 몸엔 다소 쉽게 열이 오르곤 했다. 이게 다 저 이상한 남자, 서정혁 탓인 것만 같아 괜스레 원망이 일었다.
“닳겠다. 그만 보고.”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훔쳐보고 있다 들킨 기분에 흠칫, 눈알을 굴리자 그가 피곤한 듯 목덜미를 주무르며 노트북을 톡, 닫았다.
“와 봐, 이리.”
낮게 잠긴 남자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흘러나왔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며 감상하듯 눈을 맞춰 왔다.
“할 일 다 끝났어요?”
“숙제 검사해?”
고개를 모로 기울인 그가 재촉하듯 턱짓을 했다.
천천히 일어나 그가 앉은 책상 앞으로 다가서자, 그가 기다란 팔을 쭉 뻗어 손목을 덥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허벅지 위로 몸이 올려 앉혀졌다. 직각으로 뻗은 어깨와 너른 가슴을 짚어 의지한 채 애써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한 손으로 제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바짝 움켜쥐곤 몸 전체를 완전히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제 의지완 상관없이 남자의 품에 캥거루처럼 폭 안겨 버린 자세가 됐다.
“더 자지, 왜 일어났어.”
“그냥…. 눈이 떠졌어요.”
“왜. 당신도 나 없으면 잠 못 자겠어?”
“본부장님은, 저 없으면 잠 못 주무세요?”
“어. 그러니까 내 불면증 치료에 협조를 좀 해.”
“하, 순 거짓말만….”
옆에 있으면 밤새도록 괴롭히느라 신나서 한숨도 안 자는 주제에.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흘기자 그가 낮은 숨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 다 끝내셨으면 그만 가서 자요. 피곤하잖아요. 오늘은 특별히 수면제 자격으로 옆에 있어 드릴게요.”
“웬일로 예쁜 소릴 해. 또 집에 가서 잔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어차피 안 보내 줄 거 아니까.”
“잘도 알면서 매번 떠봤어?”
“혹시나 해서요. 확인 차원.”
“어디서 이런 여우가 튀어나왔어.”
“기억 안 나세요? 직접 여우 굴로 들어오셨었는데?”
“내가 무모했네.”
그가 픽 웃고는 발갛게 익은 현서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곤 작고 보들보들한 그녀의 귓불을 만지작대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웠다. 희게 드러난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손이었다. 스르륵, 결 좋은 머리칼이 찰랑이며 작은 귀 뒤로 정갈하게 꽂혀 넘어갔다.
“그래도 그 무모함 덕분에 성공은 했다. 여우 사냥.”
그는 그녀의 여린 살갗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울긋불긋한 열꽃이 퍽 마음에 든단 듯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설핏 말아 올렸다.
“사냥에 출혈이 꽤 컸다는 게 치명적이긴 하지.”
어쩌면 농담처럼 던진 말일 수도 있겠으나 마음에 품고 있던 돌덩이 하나가 서걱, 구르는 소리를 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을 겹쳤다. 너무 깊어 좀처럼 그 속을 알 수 없을 남자의 눈동자를 숨을 죽이고 들여다봤다.
알 수가 없다. 직접 알려 달라는 솔직한 말까지 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여전히 서정혁이라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것 같아 가슴이 콱 막혔다.
“뭔데.”
“…….”
“할 말 해.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말고.”
또 손쉽게 제 속을 읽어 낸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할 말이 많았다. 묻고 싶은 질문은 수도 없었다.
“분위기가 좀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아마 조만간 본사로 돌아가시지 않을까 싶던데요.”
그가 말해 주지 않은 그의 상황이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아니, 그냥 더 솔직해지자면 서운했다. 좋아한다면서, 입으로는 늘 옆에 있으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미래와 그 향방을 결정하는 데 있어선 제 의견 따위, 아무 상관도 없는 걸까 싶었다. 그래도 연인 사이인데, ‘상의’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그저 제 처지에 대한 상황 설명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본부장님은 저한테 뭐 할 말 없으세요?”
“순서 지켜야지. 먼저 물었잖아.”
“…우연히, 들었어요.”
“뭐를?”
“레오랑 통화하시는 거요.”
“그러니까 뭘?”
“본사 얘기. 래리가 어쩌고, 앤더슨이 어쩌고 하는 얘기들이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그의 잇새에서 느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들었다면서, 뭐가 더 궁금할까?”
“본사 분위기, 본부장님한테 안 좋게 돌아가고 있는 거 맞죠?”
“현재 상황은 그렇지.”
“그럼 여기서 이렇게 한가롭게 있으면 안 되는 것도 맞죠.”
“네 눈엔 내가 한가로워 보여?”
“뉴욕으로 가 보셔야 하는 거예요?”
눈썹을 찡긋거리는 남자의 표정이 꽤나 복잡다단해 보였다. 덕분에 짐작만 했었던 상황이 단번에 파악됐다.
“정확히 뭐가 알고 싶어? 에두르지 말고 말해.”
“지금 본부장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 다요. 본부장님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싶어요, 다. 모르는 거 없이.”
“내가 당신한테 말 안 한 건 당신이 몰라도 될 얘기란 소리고, 몰라도 되는 건 그냥 그렇게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어.”
“그래도 말해 주세요. 알고 싶어요.”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다소 가라앉은 눈으로 지그시 저를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금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맞아. 상황이 더 안 좋아지면 뉴욕으로 직접 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알다시피 내가 워낙 인생을 좆같이 살아온 덕에 사방 천지에 나 죽기만 바라는 인간들뿐이라,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달려드는 놈들이 태반이거든.”
“혹시… 저 때문이에요, 지금 당장 뉴욕 안 가시는 거?”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체념하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이유 맞지.”
“본부장님.”
“맞는데, 당신 때문만은 아니야. 여기서 벌여 놓은 일이 얼만데 이대로 성과도 없이 끝을 내? 본전은 뽑아야지.”
커다란 손이 저를 달래듯 머리칼과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그래도, 당장 눈앞의 성과보다 본부장님 안위가 더 중요한 거잖아요. 자리를 먼저 지켜야 할 일도 있는 거고….”
“똑똑하네. 그런 훌륭한 말은 누가 가르쳤어. 선생이 누구야?”
“농담 아니에요. 저 걱정돼요, 정말로.”
“왜. 나 잘려서 백수 될까 봐 무서워?”
“그냥 백수가 아니잖아요. 이 회사 이렇게까지 키워 놓은 거 다 본부장님인데….”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사실을 그놈들이 모를까?”
“…….”
“내 걱정해 주는 건 예뻐 죽겠다만 여기까지만 하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래도….”
“지나친 걱정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차 팀장님.”
제 목덜미를 한 손에 받쳐 감싼 그의 얼굴이 코앞에서 아른댔다. 쪽, 코끝에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뜨거운 숨소리에 할 말을 잃은 채 결국 눈동자만 동그랗게 깜빡일 뿐이었다.
“넌 내가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것 같아?”
맞닿은 입술 끝에서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진동했다.
“이 정도 개수작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겪어 봤어. 지겹게 버티고 살아남는 거, 내 목숨 줄 하나 끈질기게 붙잡고 연명하는 덴 도가 텄단 뜻이야. 당신 걱정까지 안 보태도 쉽게 안 죽어요, 내가.”
따뜻한 손길에 불안하던 마음이 흐느적, 맥없이 녹아내렸다. 아무 일 없을 거란 막연한 낙관보단 결코 안 죽겠단 독한 결의에 비로소 작은 안도감이 피어오르는 거였다. 다른 건 몰라도 라이언 서의 끈질긴 생명력 하나는 잘 알았다.
“…알았어요.”
“뭘 알았어요.”
“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요.”
만족스레 입매를 올리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방심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가 불쑥 고개를 모로 기울여 귓바퀴에 젖은 입술을 붙여 왔다. 이미 몇 번이고 매만져 머리칼을 정갈하게 죄 귀 뒤로 넘겨 놓은 이유가 있었다.
“흐….”
그는 훅 벌게진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젖은 혀를 귓구멍에 푹 파묻어 박았다. 그 습습한 감각에 오소소, 소름이 절로 돋아났다. 커다란 손바닥이 단단한 허벅지 위에 맞닿아 있는 제 엉덩이를 콱 움켜쥐어 뒤로 옴짝달싹할 자리조차 없었다. 그저 민감해진 성감에 화끈거리는 뺨을 연방 도리질 치며 몸을 바짝 움츠리는 게 방어의 전부였다.
“아주 안 하진 말고. 적당히는 해.”
“흐읏.”
“네가 내 걱정한다니까 꼴린다, 너무.”
어느새 목선을 따라 쭉 미끄러져 내려온 혓바닥이 흰 어깨를 흡 빨았다. 그러곤 입고 있던 헐렁한 슬립의 끈을 어깨 아래로 잡아 내리더니, 꼭 피라도 빠는 것처럼 여린 살갗에 이를 푹 박아 씹었다.
“아! 읏…. 아파요.”
“좀 참아, 너도.”
“흐으, 뭘…! 흐응.”
“난 이렇게 차현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 다 씹어 먹고 싶은 거 겨우 참는 중인데.”
괴변 같은 타박을 들으며 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번엔 쇄골 아래로 떨어진 그의 혓바닥이 질퍽한 소리를 내며 더 아래로, 아래로, 위치를 옮겨 가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기어코 뾰족하게 꼭지를 세운 젖가슴 전체를 한입에 머금었다. 앞서 연이은 정사로 벌겋게 부어오른 유두가 그의 혀끝에서 통통하게 퉁겨졌다. 저릿한 전율이 일었다. 하릴없이 고개가 뒤로 꺾여 넘어갔다. 결국, 단단한 남자의 어깨에 제 손가락 끄트머리를 박아 넣은 채 매달리듯 안기자, 맨살에 맞닿은 잔근육들이 생생하게 꿈틀대며 야릇한 감각을 데운다. 유혹은 노골적이었다.
“하, 침대로, 가서… 흐….”
“안 하겠단 말은 안 하네.”
저를 놀리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설핏 어려 있었다. 이미 가랑이 사이를 넓게 벌리고 들어온 기다란 손가락은 톡톡, 예민하게 부어오른 입구의 점막을 확인하듯 건드리며 껄떡댔다. 얕은 흥분감에 깊게 고여 있던 애액이 왈칵 밀려 나왔다.
남자는 이미 몇 번이고 길이 난 구멍 새에 손끝을 담가 적신 후 맛을 보듯 손가락을 쭉 빨았다.
“흐, 하지, 마요, 더러워!”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그는 도리어 여봐란듯이 혓바닥을 내밀어 남은 체액을 남김없이 빨아 먹는다.
“나 먹으라고 흘린 거잖아. 아니야?”
남자는 능청스레 웃으며 다시 기다란 손가락을 입 속에 넣고 빨아 돌린다.
기가 막혀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엔 그렇게 깔끔을 떠는 사람이 섹스할 땐 어쩜 이렇게 원초적이고 상스러워지는지 모를 일이라….
지이잉.
불현듯 책상 위에 올려 둔 그의 핸드폰이 진동 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시선을 돌리는 그를 따라 무심코 돌아본 액정엔 ‘Michelle’이라는 영문자가 선명했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발신자를 확인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깊고 검은 눈동자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덩달아 가슴이 철렁해졌다.
눈썹을 치켜올린 그는 결국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몸을 일으키길 원하듯 현서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하릴없이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고 섰다. 불안한 심장이 담박질을 시작했다.
“침대로 가 있어. 통화 끝내고 마저 예뻐해 줄게.”
알겠단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마음대로 대화를 끝낸 그가 귓가에 핸드폰을 댄 채 서재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어떻게 됐어.]
저에겐 자세히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낯선 이와 나누며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알알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