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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집중해 결재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정혁의 눈썹이 깊이 들썩였다. 별안간 고요하던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쾅, 하고 문을 젖혀 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익숙한 얼굴, 반갑지 않은 상대가 다급히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 저기요! 저기, 이러시면…!”
급히 뒤따라 들어온 비서가 어쩔 줄 모르며 그를 막으려 했으나 이미 작정을 하고 온 듯 들어온 남자의 표정이 악에 받쳐 있었다. 호출을 받고 온 보안 팀 직원이 한발 늦게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덩치들이 남자의 양팔을 포박해 제압하고 끌어내려는 순간, 정혁이 그만 됐다는 듯 턱짓을 했다. 이내 뜻을 알아들은 레오가 먼저 그들에게 사인을 보내자 들어왔던 모두가 하나둘 뒷걸음질을 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다시금 몸이 자유로워진 남자가 정혁의 책상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와 섰다.
“당신! 도대체 뭐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성을 지르는 남자는 다름 아닌 차선엽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동안 나를 감시했습니까!”
아주 잠시, 성난 남자의 표정을 관찰하듯 살피던 정혁은 들고 있던 결재판을 소리 나게 탁, 접어 덮고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 말씀하시죠. 얘기 길어질 것 같은데.”
그는 응접용 소파로 턱짓을 하며 남자를 스쳐 지났다. 그러곤 태연한 표정으로 상석에 푹, 몸을 기대어 앉자 차선엽도 하릴없이 다가와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정혁이 먼저 침묵을 깼다. 의아함과 경계심 그리고 의심 가득한 차선엽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그 표정만으로도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구태여 그 빙충맞은 차문엽을 계속 차선엽에게 뒤 붙여 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더는 차현서에게까지 허튼수작을 못 부리도록 임시방편으로 그 발목을 붙잡아 두려는 이유 하나와 차선엽이 스스로 제 앞에 찾아오게 만들려는 또 다른 이유 하나.
예상대로, 너무 늦지 않게 제 발로 찾아온 걸 보니 차문엽이 제 역할을 잘 해내 준 듯싶었다. 차선엽에게 제 존재를 들키거나, 혹은 한없이 가벼운 입을 참지 못해 스스로 그를 들쑤시거나. 원하는 결과만 얻는다면 방법 따위야 그 어느 쪽이어도 상관은 없는 일이었으므로, 기껏 공들여 일을 설계한 보람이 있었다.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차선엽이 불안에 떨리는 내심을 애써 숨긴 채 물었다.
“설마, 내 딸애한테도 스카우트 제의니 뭐니 하면서 일부러 접근한 거요? 도대체 왜요! 왜 그랬습니까?”
마주 앉아 저를 응시하는 서정혁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자신이 찾아올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양 침착한 표정이 아주 불길해서.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내 동생까지 부추겨서 내 뒤를 캔 건지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 보란 말입니다!”
정혁이 답이 없자 차선엽은 치미는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를 높여 재차 물었다.
요사이 계속해 제 주변을 얼쩡대는 동생 차문엽의 행동들이 퍽 이상하긴 했다. 나타나서도 평소처럼 돈 뜯어낼 생각을 하긴커녕 괜스레 과거의 일을 캐묻고 자극하며 의미심장한 소리나 해 대는 놈이 어지간히 낯설고도 수상하게 느껴졌던 거였다.
결국, 뭐든 추궁해 봐야겠단 생각에 말이 통할 리 없는 동생의 멱살부터 덥석 쥐고 흔들었다. 그러다 놈의 주머니에서 툭 떨어져 나온 녹음기를 발견한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본능은 끊임없이 경보음을 울렸다.
“라이언 서. 골드스톤 본부장인가, 하는 그놈이유. 이유는 나도 몰라, 왜 형을 감시하라고 시킨 건지, 무슨 받아 낼 빚이 있다고만 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차문엽은 의외로 술술 자초지종을 불었다.
“뭐? 누구?”
“아, 그 왜, 현서 다닌다는 회사 이거! 대가리!”
차선엽은 우연히 마주쳤던 정혁의 얼굴을 떠올려 내며 제 두 귀를 의심했다.
라이언 서. 서정혁. 딸 현서의 직장 상사. 그 사람이 도대체 왜?
“스카우트 제의받아서 좋은 조건으로 이직했어요. 걱정 마세요. 이상한 대가로 받은 돈 아니고, 불법적인 돈도 아니니까. 자리만 옮긴 것뿐이에요. 지금까지랑 다를 거, 하나도 없어요.”
그제야 어렴풋이 현서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났다. 아차, 싶었다. 왜 한 번도 의심하려 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해 그 큰 금액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단 딸의 말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제 어리석음 탓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딸, 현서가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참을 수 없이 불안하게 했다.
무채색의 사무실엔 온통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공기만 꽉 차 맴돌았다.
“제 관심이 많이 불쾌하셨나 보군요.”
꽤 오래 침묵하던 정혁의 입술이 느긋이 움직였다.
“왜 그쪽이 나한테 이러는 건지….”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말허리를 자르고 천천히, 고저 없이 이어지는 어조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정혁은 홀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벌써 20년도 전 일이긴 한데, 천식을 앓던 여자아이가 유괴되어 사망한 사건이 있었었습니다.”
잊고 있던, 아니, 죽을힘을 다해 잊으려 노력했었던 이야기에 차선엽의 눈동자가 격랑을 맞은 듯 흔들거렸다.
“이름은 서주희. 당시 나이 여섯 살의, 아주 어린아이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죽은 아이의 이름을 들었을 땐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차선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어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멍하니 정혁을 응시했다.
“꽤 떠들썩했었죠. 아이 아버지가 꽤 유명했던 검사였던지라 당시엔 보복 범죄니 뭐니 이슈가 컸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작 범인은 잡지 못해서 여태껏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고요. 뭐, 시효. 그딴 개 같은 건 다 끝난 지 오래지만.”
“…다, 당신….”
정혁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차선엽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새카만 눈동자에 격렬한 열화가 차곡차곡 차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도대체…. 당신이….”
차선엽은 그저 놀라고 당황할 뿐, 여전히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기가 막혔다. 자신은 지난 수십 년간 한 번도 이 악마 같은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정작 그는 제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단 사실이.
“좀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지금, 무슨…!”
“저 정말 기억 못 하시겠어요, 아저씨?”
서늘한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그의 동공에 붙박였다. 정혁은 기어이 늙은 남자에게서 스물네 해 전 그날의 악몽을 끌어내려는 듯 제 입꼬리를 서늘하게 말아 올렸다.
“하, 너…!”
그제야, 그제서야 벼락이라도 맞은 듯 끔찍한 기억이 차선엽의 뇌리를 낱낱이 스쳐 지났다. 오래전 같은 눈을 한 어린 소년을 마주했던 그날의 기억. 그날의 소년은 원망과 절망, 분노가 그득한 눈동자로 저를 보며 말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애원을 했다.
“아저씨, 제발요. 그거 없으면, 제 동생… 정말로, 큰일 나요. 네?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한 번만….”
기억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섬뜩하리만큼 차갑게 굳은 정혁의 얼굴 위로 선명히 떠오른 그날, 그 소년의 얼굴이 겹쳐졌다. 차선엽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을 했다. 오랜 시간 묻으려 애써 왔던 그날의 불행이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날지도 모른단 불안감. 그 어둡고 축축한 감정은 그의 모든 이성적 사고를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오로지 단 한 가지의 생각만이 그를 지배할 뿐이었다.
현서! 우리 현서…!
차선엽은 반사적으로 털썩, 소파에서 튕겨져 나와 바닥에 쿵 무릎을 찧어 꿇었다.
“하, 하나만! 부탁합시다.”
비열하게 조아려진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정혁의 미간이 푹 우그러졌다.
더 듣지 않아도 미안하단 말보다 먼저 나온 부탁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차선엽은 여전히 그날의 일에 대해 하나도 뉘우치고 있지 않은 거다. 죽은 아이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단 뜻이었다.
있는 감정이라곤 여전히 추잡하고 천박한 부정(父情)뿐.
“내 딸 현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애는 아무 죄도 없고, 이 일이랑 아무,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그 애는 제발,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내 이렇게 싹싹 빌게, 시키는 대로, 뭐든, 당신이 원하는 거, 뭐든… 지, 다… 내가, 뭐든 다 할 테니까, 제, 제발…!”
겁에 질려 입술을, 아니 턱을 덜덜 떨며 바닥에 코를 박고 손을 싹싹 비벼 대는 차선엽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시허옇게 질려 있었다.
“제발, 부탁! 부탁합니다, 내 이렇게…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참담한 뻔뻔함에 암 레스트에 올려놓았던 정혁의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욱신대며 반응하기 시작하는 제 손을 꽉 움켜쥐며 이를 바득 물었다. 치솟는 고통을 가까스로 억누르느라 깨끗하던 흰자위가 시뻘게졌다.
“부, 부, 탁, 부탁합니다. 제발, 제발…제발…요….”
차선엽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사색이 되어 고개를 몇 번이고 바닥에 처박아 찧으며 주문처럼 같은 말만 반복해 댔다.
제발, 부탁, 죄 없는 딸애, 우리 현서, 우리 현서,
우리 현서….
초라하고, 처절하고, 역겨웠다. 24년 만에 마주한, 자신의 범죄로 희생된 유가족 앞에서 고작 할 말이 이것뿐이라니.
부지불식간 복수심과 악랄한 정의감, 잔인한 본성 같은 것들이 들끓어 올랐다. 당장 제 앞의 남자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어 놓고 싶단 충동이 치밀었다. 저 추악한 입에서 나오는 애원과 절규의 단어들을 모조리 곱절의 저주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불룩하게 솟아오른 관자놀이가 연방 움찔거렸다.
“내가 왜, 당신 부탁을 들어줘야 합니까?”
싸늘히 묻자 차선엽이 처박았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곤 바닥에 댄 무릎을 질질 끌고 기어 발치까지 다가와선 정혁의 바짓가랑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나! 나한테 복수를 해야지,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다 내가 한 짓이니 제발 나한테, 나한테 다 풀고…!”
“잊으셨어요?”
바짝 마른 입술을 덜덜 떨며 저를 올려다보는 차선엽의 눈가에 가증스러운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 뻔뻔한 면상에 소름이 끼쳐 저도 모르게 미간을 푹 구기며 짓이기듯 낮게 읊조렸다.
“그날.”
“…….
“당신도 내 부탁 안 들어줬었잖아?”
사위에 감도는 서슬 퍼런 한기에 차선엽은 헛숨을 컥, 들이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