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또.”
문득 어쩐지 혼자만 주책없이 고백을 쏟아 낸 것 같은 기분에 그만하겠다 슬며시 도리질을 쳤다.
“싫어요, 이제 그만 할래요. 왜 계속 나만 말해요, 불공평하게.”
“간지러워.”
“나는요. 나는 뭐 안 간지러워서 말한 줄 아세요?”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몇 마디 말이야, 진심이야.”
“당연히 진심이죠. 진심인데, 눈에 안 보이는 걸 말로라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인 거고요. 나도 말했잖아요, 몇 번이나.”
가만,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호흡이 이마 위에서 규칙적으로 흩어졌다. 어둠처럼 짙은 적막이 감돌았고, 곧이어 뜨끈한 무언가가 고막으로 파고들어 와 가슴을 죄 뒤흔들어 놨다.
“사랑해.”
여전히 하나로 연결된 남자의 몸이 제 안에서 낮게 진동했다. 일순 오르가슴보다 더 진한 무언가가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서 피어올라 아로새겨졌다. 차분하고도 담담한 어조였다. 분명한 진심으로 느껴질 만큼.
“속이 썩어 들어가게 사랑해, 차현서 씨.”
다소 과격한 사랑 고백에 핑, 고였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흘렀다.
“혹시라도 갑자기 나 사라지면 속 썩어 죽었겠거니 여겨. 요즘 당신 때문에 정말 죽을 맛이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덧붙여진 말의 경계가 모호해 가슴이 더 뜨거워졌다. 가물가물, 흐려진 눈동자를 억지로 깜빡이며 손을 뻗었다. 못지않게 뜨거워진 남자의 체온이 작은 손바닥 안에 선연하게 차올랐다.
“뭐래…. 제 속은요. 제 속도 썩을 만큼 썩었거든요, 누구 때문에?”
“그래. 어련하시겠어.”
작은 뺨에 흐르는 눈물을 스윽, 닦아 내어 주며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당신 나랑 섹스할 때마다 울 거지.”
“본부장님이 자꾸 울컥하는 말만 하시니까….”
“왜 또 금세 본부장이래, 이름 잘만 부르다가.”
“언제는 호칭에 꼴린다고 하셨잖아요.”
“아, 이 와중에 내가 또 꼴렸으면 좋겠나 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욕심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그냥,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 꼴려. 그러니까 이제 이름 불러. 개나 소나 남들 다 불러 재끼는 ‘본부장’ 말고.”
“…….
“내 이름 불러.”
명령인데 다정했다. 위압적인데 따뜻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
따끔거리는 목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열었다. 입술을 열어 불러도 불러도 그리울 그 이름을 차분히 소리 내어 발음했다.
“…서정혁 씨.”
“훨씬 듣기 좋네.”
“서정혁 씨.”
울먹거리며 계속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제 안에서 다시 뜨거워지는 그의 체온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부르고 또 부르고 싶어지는 거였다. 부를 때마다 눈물이 밀물처럼 밀려 나왔다.
“서정혁….”
“맞먹어, 그래.”
픽, 헛웃음이 터진 입꼬리에 흐른 눈물이 고여 맺혔다.
그는 땀에, 그리고 채 닦지 못했던 물기에 젖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러곤 이마와 눈두덩 위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다. 그러자 별안간, 눅진하게 풀어진 마음이 쉴 새 없이 진심을 쏟아 내기에 급급해졌다.
“나, 더 알고 싶어요.”
별안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다시 시선을 맞춘 그가 느른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서정혁 씨에 대해서.”
“뭐가 더 알고 싶은데.”
한마디로 단순히 정의해 답할 순 없었다. 그에 대해 알 만큼 아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이 묘한 감정을.
“그냥, 다요. 전부 다.”
막연한 대답에 그가 피식, 헛웃음을 짓는다.
“그러니까 알려 주세요. 서정혁 씨에 대한 건 뭐든지.”
목덜미와 허리 아래에 두 손을 밀어 넣은 그가 번쩍, 다시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깊숙이 결합되어 있던 성기의 틈으로 주륵, 미끄덩한 체액이 쏟아져 떨어졌다. 질척해진 살갗이 미적지근하게 맞닿았다.
“원하는 만큼 다 알아 가, 뭐든지. 다 내줄 테니까.”
순식간에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은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바짝, 제 앞으로 붙여 당기며 음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허리까지 말려 올라간 스커트를 슬쩍, 아래로 내려 다시 입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치마 속, 성기가 여전히 깊이 결합된 상태라는 걸 전혀 알 수 없도록. 야릇한 음란함과 아찔한 감각에 입술을 짓깨물고 그의 어깨를 짚었다.
“양껏 가져가. 이제 네 거야, 다.”
다시금 단단히 부피를 키운 그의 중심이 푹, 정점까지 밀려들었다. 동시에 목덜미를 끌어당긴 그가 부푼 입술을 깊이 머금어 빨았다.
***
“변호사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리며 등 뒤에 선 솔이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멍하니.”
현서는 열없이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 이 좁은 공간에서 그와 은밀히 몸을 섞었던 일이 선명히 떠올라서였다.
“얼굴은 왜 또 이래요?”
“아, 좀 더워서.”
벌겋게 달아오른 두 뺨에 손부채질을 해 대며 어설픈 변명을 하자 솔이가 고개를 갸웃댔다. 추위 많이 타는 분이 이 날씨에 덥다니, 어디 몸이 안 좋은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이어지고야 말았다.
“재무 팀에서 연락 왔었어요. 요청하신 자료 메일로 전송했다고, 확인해 보시라구요.”
“응. 고마워.”
솔이가 내미는 커피 잔을 받아 들며 소파에 슬쩍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새벽 내내 그와 뒹굴었던 소파였다. 척척하게 젖은 가죽에 행여나 자국이 스미진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흔적이 남지는 않았다.
서정혁, 그 남자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더 어이없고 무모한 짓을 하게 될지.
“변호사님.”
한 모금, 차가운 커피를 들이켜 마시는데 솔이가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깔며 저를 부른다.
“…아니다…. 아니에요.”
잠시 망설이던 솔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솔이의 시선이 제 목덜미의 목걸이에 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꺼내려는 말이 서정혁과 관련된 이야기인 듯싶었다. 그래서 더 궁금증이 일었다.
“뭔데? 말해. 어차피 말할 거 괜히 더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던 솔이 결국 체념하듯 입을 열었다.
“아까 비서실 갔다가 비서들끼리 하는 소리 우연히 들은 건데요.”
“뭘 들었는데?”
“본사에서 본부장님 상황이 영 안 좋은가 보던데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본부장님이 한국에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요. 래리인가 뭔가, 앤더슨이랑 이름만 올려놨던 공동 대표가 대놓고 본부장님을 찍어 내리려고 안달을 하나 봐요. 앤더슨도 이때다 싶어 방관하는 것 같고요.”
요즈음 레오와 계속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유가 이거였나. 이제 꽤 가까운 사이가 됐다 생각했는데, 정작 그의 사정에 대해 가장 모르고 있었던 건 제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알려 달라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여전히 그에게 있어 저는 속사정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여자는 아닌 건가.
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겠거니, 머릿속으론 충분히 이해를 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서운함에 목 끝이 따끔거렸다.
“알고 계셨어요?”
“대충은. 짐작은 했어, 들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겠다, 싶긴 했지.”
“분위기가 좀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아마 조만간 본사로 돌아가시지 않을까 싶던데요.”
그렇겠지.
차마 동조하지 못하고 까끌거리는 목을 가다듬었다.
“괜찮으세요?”
솔이 잔뜩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 왔다. 그 눈빛은 마치 그러게 애초에 시작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결국 상처받는 건 변호사님일 거라고 경고하지 않았었냐 타박을 하는 듯했다.
현서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에 든 커피 잔의 얼음을 달그락거렸다.
“내가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본부장님이 안 괜찮겠지. 직접 가서 수습해야 하는 상황인 거면 가는 게 맞을 거고. 알아서…. 하시겠지.”
가만, 현서의 반응을 살피던 솔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죠? 전 여전히 두 분 연애에 격렬한 반대파예요.”
그녀는 여전히 서정혁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있었다.
“뭐, 제가 말린다고 들으실 건 아니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연애할 땐 하시더라도 너무 마음 다 내놓고 하진 마세요. 변호사님도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두셔야죠.”
“그렇게 다 내놓진 않았는데.”
“안 그런 분이 이렇게나 수시로 안 하던 행동들을 하세요?”
“내가 뭘….”
변명의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뻔한 거짓말 따위가 통할 리 없는 그녀의 표정에 말문이 막힌 거였다.
“티 나? 많이?”
조심스러운 제 질문에 솔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네, 너무요. 제가 다 조마조마할 만큼.”
그 정도였던가. 솔이의 말에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포커페이스를 해 본다고 한 건데, 죄 쓸데없었단 소리였다.
“지금도 이미 두 분에 대한 소문, 루머처럼 도는 건 아시잖아요. 사내에서도 다들 뒷말로 쉬쉬…. 제가 들은 기막힌 얘기 다 들려 드리면 아마 변호사님 출근 못 하실걸요?”
서정혁과 저를 두고 무슨 소문이 떠도는지 아예 모르진 않았다. 이미 골드스톤에 처음 들어오던 그날부터 그런 소문들이 파다했었으니까. 처음엔 그저 저만 떳떳하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이었고, 이제 와선 도리어 싫지 않은 뻔뻔함이었다. 유치하게도.
“지금이야 그냥 루머지만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밝혀지면 또 변호사님만 피해 막심하실 텐데…. 후…. 오지랖인 건 알지만 걱정돼서 그래요, 진짜.”
솔이의 말에는 여전히 틀린 게 없었다. 이제는 스스로 내지른 감정에 뒤따를 책임을 각오해야만 했다.
“알아. 무슨 말인지.”
저를 생각해 주는 그녀가 고마워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웃었다.
“알면 꽃 배달은 직접 하시고요.”
솔은 테이블 위, 제가 올려 둔 화병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하얀 튤립 다발이 풍성하게 꽂힌 화병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 휑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사무실에 가져다 두면 좋을 것 같아 사 온 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들고 가면 이상한 오해를 살까 싶어 그러잖아도 솔이에게 부탁을 하려 했었는데, 제 속을 기가 막히게 읽은 그녀가 선수를 친 거였다.
작은 한숨을 내쉬자 솔이가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차며 시선을 거뒀다.
“아 참.”
그대로 탕비실을 나서려던 그녀가 돌연 뭔가 더 할 말이 떠오른 듯 다시 돌아섰다.
“변호사님, 혹시 오늘 회사로 아버님 부르셨어요?”
“응?”
“아까 등기소 다녀오다가 로비 앞에서 아버님 나가시는 걸 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전 혹시 변호사님 만나고 돌아가시는 건가 싶어서….”
“아닌데, 아빠가 왜….”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현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요즘 변호사님 따라서 정신이 아주 오락가락해서 큰일이에요.”
대수롭지 않게 제 착각을 인정하고 사라지는 솔이의 말이 자꾸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렸다. 불현듯, 이유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