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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77화 (7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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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알람 소리에 스르륵 눈꺼풀을 떠 올렸다. 이미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 아침이었다. 혼자뿐인 집 안은 더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어젯밤 불쑥 찾아왔던 서정혁의 얼굴이 아쉬워 가슴이 찌르르했다. 꿈이라도 꾼 건가 싶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제 손으로 덮은 적 없는 담요가 스르륵, 소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냥 그렇게 가 버린 건가.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제게는 오랜만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이었지만, 아마도 그는 그런 것 따윈 상관도 없이 오늘 역시 바쁜 여러 날 중 하루일 터였다.

지이잉.

문득, 멍하게 이어지는 상념을 깨듯 테이블 위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그였다.

“네, 본부장님.”

- 다 잤어?

“네. 근데 언제 가신 거….”

- 일어났으면 옷 입고 나와.

“네?”

- 나오시라고요. 아침 먹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대로 베란다 창문 쪽으로 콩콩콩 뛰어가 1층을 내려다보는데 익숙한 체형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훅 고개를 위로 올려 꺾는다.

- 훔쳐보지 말고 내려와, 얼른.

귀신같긴.

저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켜고 얼른 커튼 뒤로 얼굴을 숨겼다.

***

급한 대로 겉옷을 대충 챙겨 입고 아래로 내려가니 어제와 자못 다른 차림의 남자가 생수병을 들이켜고 있었다. 꿀꺽꿀꺽, 위아래로 깊게 일렁거리는 목울대가 그의 깊은 갈증을 대변했다.

“뭐, 예요?”

“단어 사용이 좀 거치시네. 사람한테 ‘뭐’냐니.”

“아니, 가신 거 아니었어요?”

“기껏 와서는 아무것도 못 했는데 가긴 어딜 가?”

“그럼 어디 다녀오신 건데요?”

현서는 앞에 선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어 내리며 물었다. 그는 어젯밤 입고 왔던 고급 슈트와 코트 차림이 아닌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차림이었다. 게다가 땀에 푹 젖은 머리칼과 이마는 누가 봐도 지금 막 조깅을 하고 온 사람의 그것이었다.

“내 집에.”

“근데 왜 다시 오셨어요?”

“보시다시피, 운동 오셨겠지?”

“설마 댁에서 여기까지… 뛰어오신 거예요?”

그가 태연히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 굳이 왜… 요?”

아무리 바빠도 하루 한 시간, 집착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추위에 그 펜트하우스에서 여기까지 밤새 뛰어오는 정신 나간 짓을 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왜라니. 잠깐 씻으러 간 사이에 잠든 죄인이 할 말이야?”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답을 한 그를 올려다보며 동그란 두 눈을 깜빡거리자, 그가 덥석 제 손목을 잡아당긴다.

“추운데 옷은 왜 또 이러고 내려왔어?”

“아뇨, 전 괜찮…. 괜찮은데.”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어깨 위에 올려 감싸는 남자의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절로 그의 품에 폭 안긴 모양이 되어 기분이 야릇해졌다.

“배고프니까 앞장서. 아침 먹으러 가게.”

“뭐가 드시고 싶으신데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에 아침은 먹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무슨 밥 타령인가 싶어서.

“우동.”

“…네?”

“회사 근처에 당신 자주 가는 거기.”

“…….

“김준한, 그놈이랑 매번 가는 거기. 가자고, 나랑도.”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제가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이 남자가 일이 너무 많아 어디가 좀 이상해진 건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

우동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 낸 남자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껏 자신과 함께 있는 이 사람이 골드스톤 라이언 서라고 말한다면 분명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해서였다. 이 남자가 어딜 봐서 어제 오후 콘퍼런스 룸에서 그 서슬 퍼런 표정으로 독설을 날려 대던 인간과 동일인이라고 보겠는가.

“내 얼굴 그만 보고. 먹어, 얼른.”

“원래 아침 안 드시지 않으세요?”

“누구 덕에 원래 안 먹던 떡볶이도 먹었어.”

“원래 이런 분 아니시잖아요.”

“원래 어떤 분인 줄 알았어?”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그가 짙은 눈썹을 들썩이며 지그시 저를 응시해 왔다.

“나도 우동 좋아하고, 차현서 이삿짐 정리하는 거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까 혼자서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나에 대해서.”

“멋대로 판단한 적 없어요.”

“말해 봐, 그럼. 당신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는 내 이미지.”

“네?”

“당신한테 나는 어떤 인간이냐고.”

“…….

쉽사리 한마디로 설명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여전히 제게 있어 서정혁은 속을 알 수 없는, 저와 매우 닮아 있으면서도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어서.

“돈밖에 모르고. 안하무인에 위아래 없고. 일할 땐 싸가지가 없고, 일 안 할 땐 또 재수가 없겠고. 입만 열면 못된 말밖엔 할 줄 모르는 데다 침대에선 변태가 따로 없지. 한마디로 줘도 안 가질 놈. 맞아?”

제 속을 정확히 읽어 낸 남자의 말에 현서는 할 말을 잃어 눈동자만 둥글둥글 깜빡였다.

“허. 아니란 답도 없고.”

“아니….”

“차현서한테 진짜 나 여전히 개자식이구나.”

느긋이 등을 뒤로 기대며 이마를 긁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심란해 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요….”

“당신 참 어지간히 어려운 여자야.”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목소리가 어쩐지 씁쓸하게 들렸다.

아마도 그는 여전히 한쪽 발을 뒤로 뺀 채,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어떻게든 적게 상처받을 방향으로 피할 생각만 하는 제 속내를 어렴풋이 눈치챈 듯싶었다.

사실 그런 마음이 아닌데. 이마저도 제어하지 않으면 헤아릴 수 없이 완전히 빠져들까 봐 겁이 나 그러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후….”

답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자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네. 맞아요, 개자식.”

“이젠 숨길 노력도 안 하기로 했어?”

“근데, 개자식인 거 다 알면서도 좋다고 이러고 있잖아요. 등신처럼.”

솔직한 제 답에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헛웃음을 짓는다.

“솔직히 저 아니면 누가 본부장님 같은 개자식을 좋아해 줘요?”

“그러게. 신선하긴 하다. 이렇게 대놓고 누가 나 후려치는 경험은 또 처음이라.”

“저나 되니까 성격 안 좋고 제멋대로인 남자 이렇게 친절하게 상대해 주는 거죠.”

“아. 이 여잘 어떻게 해야 돼?”

그가 불쑥 손을 뻗어 제 한쪽 뺨을 톡 잡아 늘렸다 놨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

“제가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말씀을 하지 그러셨어요. 그럼 본부장님 댁에서 하루 정도 자는 것쯤 어렵지도 않고….”

“당신은?”

“…….

“당신은 어땠는데.”

우동 면발을 휘휘 젓던 젓가락 끝이 멈칫했다.

“저도… 저야, 당연히….”

“당연히?”

“…보고 싶었죠. 엄청.”

기어이 제 속을 다 뒤집어 까 보이게 만드는 사람. 괜스레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리며 제 앞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먹어, 얼른.”

그제야 남자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말려 올라갔다.

“아, 어제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해결 봤어.”

“어떻게요? 어떻게 하셨는데요?”

“사외 이사 선임 건이랑 부실 채권 만기 연장 건, 딜.”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안 괜찮지. 안 괜찮은데 어쩌겠어. 이쪽에서 손해 본 거 어떻게든 태성 가서 탈탈 털어 봐야지.”

제가 올린 검토안이었으나 막상 일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자 마음이 찝찝했다. 이런 건 좀 예상에서 빗나가도 좋으련만.

“왜. 뭐가 걱정인데.”

“여기서 제대로 컨트롤 못 하면 끝까지 힘들어질 것 같아서요.”

“뭘 그렇게 태성 건에 집착을 해. 판돈이 적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크게 의미 둘 건도 아닌데. 그거 아니라도 파면 뿌리 내릴 곳은 많아. 물론 실패할 리도 없겠지만.”

이번 일에 양재숙과 조인호가 연루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손을 잡고 골드스톤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더 신경이 쓰이는 거였다. 지극히 사적인 제 사정 때문에 회사와 서정혁에게 민폐가 되긴 싫어서.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병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제 속내를 눈치챈 그가 슬쩍 코끝을 누르며 타박했다.

“언제는, 작은 거 하나도 놓치지 말고 꼼꼼히 상황 변수 하나하나, 다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하시더니….”

“그건 내가 차현서를 잘 모를 때 얘기고.”

“지금은요. 절 잘 아세요?”

“알 만큼은 알아.”

그 말이 왜 그렇게 뜨겁게 들렸는지 모를 일이다.

“뭘 아시는데요?”

“벗겨 놓으면 눈 감고도 당신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까지 찾아 짚을 수 있을 정도?”

진지한 답변을 기대했던 제 바람과 달리 장난기 어린 헛소리가 돌아오자 맥이 탁 풀려 헛웃음이 터졌다.

평소의 흐트러짐 하나 없는 슈트 차림과 달리, 땀에 젖고 바람에 슬쩍 엉클어진 머리칼, 그리고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뛰게 했다.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고개를 모로 숙인 채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오롯이 제게만 시선을 고정한 그가 더없이 설레면서도 버겁다.

“근데, 먹을 땐… 좀 안 쳐다보시면 안 돼요?”

“왜. 난 좋은데.”

“전 안 좋아요. 체할 것 같아.”

“그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그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시선을 붙박은 채 느물댔다.

“안 되겠어요. 그냥 그만 먹을래.”

“먹어, 다. 너 그거 다 먹을 때까지 못 일어나.”

“코앞에서 이러고 턱 받치고 빤히 쳐다보는데 어떻게 먹어요.”

“나중에 힘없고 배고프다고 울고불고 후회하지 말고 먹으랄 때 먹어.”

“후회 안….”

음험하기 짝 없는 남자의 말에 불현듯 눈을 크게 뜨며 그 의미를 되묻는다.

“오늘은 업무 스케줄 없으세요?”

“어.”

“…왜요?”

“오늘도 집 앞에 차 갖다 대면 내가 그 차 부순다고 했거든.”

차 애호가인 레오가 들었다면 경악할 만한 소리였다. 기가 막혀 픽, 웃는데 살벌한 농담을 태연히도 내뱉은 그가 조금 더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그러니까 기회 줄 때 여유 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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