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저를 내려다보던 잘생긴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이런 여우짓은 어디서 배웠어.”
제 음란한 의도를 들킨 것 같아 그 시선을 피해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뭐, 제가 말 안 해도 그러려고 오신 것 같아서요.”
“예쁜 게 예쁜 짓 하니까 영 못 쓰겠네.”
남자의 매끈한 미간이 다소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람 잡겠어.”
허리 아래를 더 바짝 붙이자 단단한 윤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뜨거움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깎은 듯 선명한 이목구비가 시야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심장이 터질 듯 방망이질을 쳐 댔다.
“왜, 벌써 이렇게….”
“벌써가 아니고 종일 이랬거든요. 누가 감질나게 딱 10분 들쑤셔 놓고 나간 뒤로 쭉 이 상태라고.”
“하, 진짜….”
바지 속에서 팽창할 대로 팽창한 굵다란 기둥이 보란 듯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변태 같아요. 순 야한 생각만.”
“불쌍한 변태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 볼 생각은?”
“동정심이라니, 본부장님이랑 진짜 안 어울리는 단어네요.”
“그래. 인정. 그냥 어울리는 짓이나 해야겠다.”
낮게 뇌까리며 목덜미에 콧대를 파묻는 남자의 숨소리가 뜨거웠다.
“웃, 잠깐, 만…요!”
“나한텐 캐모마일 실컷 먹여 봤자 효과 없어. 어디서 수작질이야?”
“흐으…!”
“이럴 거면 여우짓이나 하지 말든지. 하나만 해, 하나만.”
슬쩍 도망가려는 몸을 제 품에 더 바짝 옭아맨 그가 괘씸하다는 듯 이를 세워 살갗을 거칠게 긁었다. 짜릿한 감각에 절로 신음이 샜다.
“하아, 아파…!”
“양심 좀 챙겨요, 차현서 씨. 아프다면서 매번 질질이잖아. 내가 사디스트면 당신은 마조히스트야. 고로 우린 섹스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단 소리고.”
보드라운 살결을 길게 핥은 그가 아쉽게 몸을 떼어 내며 속삭였다.
“하아, 전혀, 몰랐던 사실이네요.”
“괜찮아. 몰랐으면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고.”
“아무리 봐도 진짜….”
“진짜 뭐. 감격스러워?”
“뻔뻔해.”
낯 뜨거운 소리를 뻔뻔히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가 기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발짝 물러난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단단한 목덜미, 넥타이 매듭에 기다란 손가락을 푹 끼워 툭툭 풀어내고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내고, 손목의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툭 올려놓는 동안 내내 제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는다. 작품 감상이라도 하듯이.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대놓고 따져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상대를 절로 열없어지게 만드는 시선을 애써 회피하면서.
“변태라는 칭찬에 걸맞은 다음 행동이 뭘까 하는 진지한 고민?”
“굳이 고민 안 하셔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씻고 올 테니까 벗고 있어.”
“네?”
이게 무슨 앞뒤 호응 되지 않는 문장의 쓰임인가 싶어 눈썹을 들썩였다.
“아니면 같이 씻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는 말에 어이가 없어 또 헛웃음이 났다.
피식거리는 저를 뒤로한 채 셔츠를 벗으며 그대로 욕실로 향하는 남자의 너른 등을 바라봤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인데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멋진 남자가 제 곁에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쏴아, 곧이어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선연했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그가 올려놓은 머그 컵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가득 고였다. 저도 모르게 그가 입을 댔던 위치에 입술을 대고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 마셨다.
이 캐모마일이 부디 저에겐 효과가 있길 간절히 바라면서.
***
정혁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의 물기를 대충 털어 내며 서둘러 욕실을 나섰다. 워낙 아담한 크기의 집이라 몇 걸음 떼고 말 것도 없었다. 욕실 문을 열면 곧장 거실이었다. 욕실 밖이 아무래도 너무 조용하다 싶어 모퉁이 너머로 곧장 고개를 빼고 밖을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그마한 인영이 소파 한편에서 쪼그린 채로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설마 싶어 성큼성큼 다가서니 한쪽 뺨을 쿠션에 묻은 채 눈을 감은 여자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쌔근대는 거였다.
“허.”
씻고 올 동안 기다리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잠이 든 건가. 평화롭기 짝이 없는 여자의 모습과 제 허리 아래, 위를 향해 꺼떡거리며 치솟은 수건이 퍽 대조적이었다. 기막혀 한 손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하릴없이 허리를 굽혔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그녀의 작은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곤 곧장 불을 껐다.
어두운 고요함이 부드럽게 깔렸다. 슬몃 젖혀져 있는 커튼 너머에선 새하얀 보름 달빛이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그 빛을 조명 삼아 소파 아래, 그녀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곳 바닥에 툭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온종일 그립고 또 갈증 났던 여자를 더 오롯이 눈에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확실히 정상 범주는 아니었다. 잠든 여자 얼굴이나 훔쳐보겠다고 이러고 앉아 있는 걸 보면.
실은 연일 계속된 일정 탓에 제대로 여자를 볼 수 없었던 지난 요 며칠 계속 이런 상태였다. 저를 향해 입술을 열고 눈꼬리를 휘어 웃던 이 예쁜 얼굴이 참을 수 없이 그리워 미친놈처럼 괴로워했다.
온종일 잠잠한 핸드폰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한 번을 먼저 제대로 연락하는 법이 없는 차현서의 인내를 원망도 했었다.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게 하고 제 옆에 꼭 붙여만 놓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했을 만큼.
대체 이 작고 말간 여자가 뭐라고 당장에 안 보면 죽을 것처럼 보고 싶었던 건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죽은 동생한테 본부장님은 어떤 오빠였을지. 동생분은 아마 전혀 다른 기억으로 본부장님을 기억하고 있을걸요.”
“짧은 순간의 기억에만 잠식돼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껏 충분히 슬펐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저를 위로하려 애를 쓰던 모습이 꽤 귀엽기도, 가엾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차현서에게,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는 상황이 갑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어떻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꾀어냈는지 알게 된다면. 과연 그때도 그런 눈빛으로 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좋아요.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그때에도 과연 그런 천진한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저릿한 가정에 절로 쓴웃음이 났다.
결부터 말하자면 철없는 마음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차현서를 사랑하는 일은, 차선엽의 뻔뻔한 절규에 정신이 번쩍 들 만큼의 끔찍한 고통이 되살아난 것과는 완벽히 별개의 일이었다. 도저히, 더는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제 판단과 달리 차현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순간 모든 게 다 리셋이었다.
여자를 앞에 둔 채 수많은 옵션을 가정하고, 수없이 계산기를 두드렸던 일이 결국 하등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린 거다.
깊었던 분노와 고뇌는 허무하리만큼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해 봐도 또다시 결론은 차현서였다. 그래서 종국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투항하며 제발 제 마음을 봐 달라고 구걸하기까지 했다. 그러지 않고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이젠 제 속이 썩어 들어가고 문드러져 짓이겨진대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그 편이 속 편할 일이었다.
차현서란 이름 앞에 알량한 이성 따윈 완전하게 무용했다. 그저 저 하나만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고 참아 내면 그뿐이었다. 그러면 그토록 갈망하고 원하는 여자를 제 곁에 둘 수 있을 거란 일차원적 결론만 눈앞에 들끓었다.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단 걸 알면서도 마약성 진통제를 결코 끊어 낼 수 없는 불치병 환자처럼 끊임없이 어리석고 무모한 판단만 하게 되는 거였다.
대신, 그녀가 던져 준 구실로 일말의 자위를 택했다.
부당한 불행.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끊임없이 나태한 신과 불필요하게 부지런한 악마 사이에서 재수 없게 헤매고 다닌 죄로 부당한 불행을 맞닥뜨린 것뿐이라고, 그렇게 한가로운 결론을 내려 볼 요량이었다.
그러니 이외의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도리어 이 부당한 불행 속 찾아온 차현서의 존재가 행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으니까.
미친 게 분명했다. 이 무슨 어울리지도 않을 종교 철학적인 결론이란 말인가.
단순히 나사 하나 빠진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자 하나에 홀려 정신이 나가도 제대로 나갔다. 인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는 99퍼센트의 이유가 감정이라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자신이 지금껏 경멸해 왔던 인간 유형의 꼴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연애가 이렇게나 해로운 것이던가. 무모한 감정이 이토록 막무가내로 날뛸 때까지 그냥 놔뒀다니.
“후….”
정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작은 몸 위에 덮어 놓은 담요 아래로, 새하얀 발목이 빼꼼히 드러나 있었다. 꼭 저처럼 작고 아담한 발가락이 귀엽고 어여뻤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발목과 발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손끝만 닿아도 가슴께 어딘가가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는 감각에 머릿속이 아연해진다.
돌연 단전 아래가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눈꺼풀을 슬몃 내려 수건 속 한계까지 부피를 키워 배꼽 아래로 올라붙은 성기를 내려다봤다.
이 여자와의 일은 늘 이런 식이다. 뭐든, 종잡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
정혁은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터뜨리며 이마를 짚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