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캄캄한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 곧장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벽걸이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집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현서는 흐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샤워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 서서 오랜만에 느긋이 여유를 즐겼다.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며칠 만에 주어진 휴식인 것 같아 더 그랬다. 가만히 눈을 감고 물줄기를 맞는데, 미지근한 물이 입술과 턱을 타고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문득, 오늘 낮에 제 입술을 하염없이 물고 적셨던 남자의 키스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달았다. 더불어 몸도 뜨거워졌다. 하얀 살갗 위, 그가 만들어 놓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을 하나씩 훑고 확인하고 있자니 괜스레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거였다.
부스에 하얀 김이 어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남자의 체온을 찾아 제 허벅지 사이를 손끝으로 더듬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물을 잠그고 샤워실을 나섰다.
그에겐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그에 대한 그리움만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늘 보고 있어도 보고 싶던 그 얼굴이 점점 더 갈증을 키워 가는 느낌이라….
띵동.
아직 비눗물을 다 닦아 내지도 못했는데 별안간 현관 벨이 울렸다. 급한 대로 대충 물을 뿌리고 헐렁한 티셔츠를 빠르게 챙겨 입었다. 그러곤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이 시간에 누구인가 싶어 덜컥 불안해서였다. 여차하면 곧바로 경찰에 전화를 걸 생각으로 액정에 ‘112’ 숫자 세 개부터 찍고 봤다.
그런데, 그렇게 숨을 죽이고 월 패드 앞에 섰는데, 뜻밖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본부장님…?”
그였다.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른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틈 새로 밀려들어 온 찬 바람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두 뺨에 와 닿았다. 고개를 꺾어 올리자, 깃을 세운 코트 차림의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제 머리꼭지를 느른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갑자기, 어떻게….”
“그 표정 뭔데. 왜 하나도 안 반가운 표정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요. 왜 오셨어요?”
“너 보러요.”
“네? 이 시간에요?”
“별수 있나. 더 보고 싶어 죽겠는 사람이 와야지.”
예고도 없이 들려오는, 가슴 내려앉는 남자의 고백에 멍하니 얼어붙어 그를 바라봤다.
“나 계속 여기 서 있어?”
“아…. 들어, 들어오세요.”
말을 마치고 뒷걸음질을 치기 무섭게 그가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젖혀 열곤 성큼,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집 안 꼴이 엉망진창이라는 걸 생각해 내곤 얼른 그의 앞을 가로질러 허리를 숙였다. 허겁지겁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대충 주워 올려 커다란 세탁 바구니에 숨기듯 던져 넣었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신 이유가?”
말끝을 맺지 못한 그가 기막힌 헛숨을 터뜨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현서를 눈동자로 쫓았다.
“아시잖아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집 치울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본부장님처럼 돈 주고 사람 써서 청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아. 변명 안 해도 돼.”
“변명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구요. 워낙에 지저분한 거 끔찍하게 싫어하시니까.”
“끔찍까지야. 그 정도 미친놈으로 보는 건 서운한데.”
“이미 그렇게 보였거든요?”
“유감이네.”
“그러게 이 시간에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게 어딨어요, 연락도 없이. 놀랐잖아요.”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억울해졌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좋은 모습,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은 제 마음을 하나도 몰라주는 그가 어쩐지 원망스러워져서.
“갑자기 보고 싶어 돌겠는데 그럼 어떡할까. 그러게 퇴근을 하면 한다고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실컷 기다렸더니 혼자 도둑고양이처럼 내빼고는.”
그가 혀끝을 쯧, 걷어차며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냈다.
무슨 말을 하랴. 아무래도 이런 잘난 남자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제 잘못이 가장 컸다.
“뭐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묻는 그녀의 말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느긋이 고개를 돌려 집 안 구석구석,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으며 관찰하고 섰을 뿐이었다. 좁은 거실과 작은 침실을 차례로 돌아보던 그의 잇새에서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차현서는 이러고 사는구나.”
어쩐지 가슴이 콩닥댔다. 오롯이 저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에 서정혁이 들이닥쳤단 이유만으로도 그런 묘한 기분을 느낄 이유는 충분했다. 어쩐지 간질거리는 감각에 남자의 뒷모습만 쫓으며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대로 살 만해요. 본부장님 눈엔 누추해 보이겠지만.”
“그러게. 진짜 누추하네.”
아니나 다를까, 가감 없이 느낀 그대로 내뱉는 남자의 직설 화법이 여지없었다.
“와서 보니 굳이 이 누추한 데서 지내야겠다고 고집부린 게 더 이해가 안 가는데.”
그 와중에도 저를 돌아보며 느긋이 깜빡이는 새카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빨려 들 듯 깊어져 있었다. 내내 보고 싶었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잠시 발끈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누그러졌다.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죠.”
“내 말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자격지심 가득한 해석이 나와?”
“누추하다느니….”
“당신이 먼저 누추하다며.”
“하, 내가 누추하다고 하는 거랑 남이 누추하다고 하는 거랑 같아요?”
“다르지. 근데 내가 ‘남’은 아니잖아.”
아, 더 말을 말아야지.
“앉으세요. 마실 거 갖다 드릴게요.”
얄밉다는 듯 눈을 가늘게 흘기며 화제를 돌리자,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댔다. 아무래도 저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소파에 앉는 모습을 확인하곤 곧장 주방으로 갔다. 이 늦은 시각까지 일에 시달려 피곤했을 그를 위해 캐모마일을 우려 내밀었다. 물론 수많은 허브차 중 하필이면 그걸 고른 또 다른 불순한 속내도 없진 않았다.
“드세요. 캐모마일에 진정 효과가 있대요.”
그가 작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제가 쥐었을 땐 두 손으로 쥐기도 벅찰 만큼 커다랬던 용량의 머그 컵이 그의 손에 들어가니 꼭 미니어처 모형처럼 작아 보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슴이 간질대 저도 모르게 그의 손끝만 바라봤다.
“혼자 사는 집에 무슨 짐이 저렇게 많아?”
정혁이 아직도 거실 한편에 놓인 풀지 않은 박스 꾸러미를 흘긋 보며 물었다.
“이제 다 했어요. 정리 못 한 건 저거 하나가 다구요.”
“이 많은 걸 다 혼자 정리했어?”
“아뇨. 준한 선배가 도와줘서, 할 만했어요.”
무심코 준한의 이름을 뱉고는 곧바로 아차,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도 준한과 저 사이를 의심하고,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제 우려와 달리 머그 컵을 내려놓는 그의 표정엔 아무런 동요도 없다. 다행히 더 이상 오해는 않을 모양인가 보다 싶었다.
남자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가만 앞에 앉은 저를 직시했다. 현서는 그가 저를 빤히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지금처럼 이유 없이 부끄러운 기분이 들지는 않을 텐데 싶어서였다.
“왜 그렇게 보세요?”
뜨겁고도 집요한 시선에 괜스레 열이 올라 홧홧해진 마음을 숨겨 보려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봤다. 그 깊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영 마뜩잖았다.
“이 집에선 늘 이런 차림으로 있어?”
“아….”
그제야 제 차림새가 썩 남사스럽다는 걸 깨달은 그녀의 두 뺨이 붉어졌다.
“씻, 씻는데 갑자기 오셨잖아요, 본부장님이.”
“내 집에 있을 땐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있더니만.”
“옷 입고 나올게요, 잠시만….”
“됐어. 어차피 벗길 건데 뭘.”
불쑥 저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딸려 가듯 그의 품으로 안겨 붙었다. 얇은 티셔츠 자락 안으로 커다란 그의 손이 밀려들었다. 옷자락 아래, 탱글탱글하고 부드러운 엉덩이의 맨 살갗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에 음란함이 그득했다.
그럼에도 현서는 저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피곤을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며칠간 비서실에서 공지한 라이언 서 본부장의 일정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고, 밥은 언제 먹나 싶을 만큼.
“뭐 하러 오셨어요. 잠잘 틈도 없이 바쁘신 것 같아서 일부러 연락도 참고 있었는데요.”
“쓸데없는 걸 잘도 참네.”
“정말로 피곤하실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아니.”
“그럼 좀 주무실래요?”
“내가 이 시간에 여기까지 고작 잠이나 주무시러 왔겠어요.”
나지막이 들려온 답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빡센 스케줄 속에서도 제 얼굴이 보고 싶어 여기까지 왔단 소리였다.
“대단하기도 하지. 기어코 날 여기까지 찾아오게 하고. 그래도 내가 계약서상 갑인데 사람을 이렇게 모양 빠지게 만드시나.”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타고 올라온 커다란 손이 마른 등과 날갯죽지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설마 그간의 복수라도 하는 중이야? 이참에 아주 안달 나 죽어 보란 건가.”
슬쩍 엿보여 준 한 조각 진심이 그 어떤 고백보다 더 진하게 들려 두 볼에 열이 올랐다.
“내가….”
“…….
“그렇게나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말이라고.”
용기 내 겨우 짜내듯 물은 질문에 망설임 없는 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도리어 당황한 건 그녀였다. 발개진 얼굴로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모르는 체 여우 같은 질문을 덧붙여 봤다.
“아까 회의 끝나고 얼굴 봤는데도요? 키스도 했는데, 우리.”
“그깟 10분을 누구 코에 붙여.”
진득이 제 얼굴을 훑어 내리는 눈빛에 결국 마음이 몽글몽글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까지 다정하고 달콤한 말을 할 수 있는 남자였던가. 아니면 제가 미쳐 그의 모든 말들이 죄 달달하게 저를 녹일 것처럼 들리는 건가.
불현듯, 낯설고도 낯익은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그저 마주 서 있을 뿐인데 남자가 내뿜는 노골적인 눈빛에 온몸이 열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화끈, 뜨거워졌다.
“본부장님.”
제 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이상한 충동이 치밀었다. 그게 꼭 억눌렸던 욕망과 달뜬 마음을 부추기는 것만 같아서.
“오늘 자고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