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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따란 콘퍼런스 룸에 불이 켜지고,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말없이 프로젝터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 상석의 정혁에게로 향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고개를 설핏 모로 기울인 채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 퍽 심기가 불편하단 신호였다.
정혁은 한참 만에야 느긋이 입을 열어 소감을 내뱉었다.
“지루하네요.”
그 서늘한 시선에 지금껏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4/4분기 포트폴리오 보고를 했던 파트너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아무래도 그는 제 상사의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결론만 합시다.”
“…….
“바쁜데 한 줄로. 요약.”
그가 답답하다는 듯 멍하니 선 파트너를 채근했다.
“아….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정부 정책 기조의 변화, 그리고 국내 펀드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지난 분기 성장세를 비추어 봤을 때 이번 연도에도 꽤 긍정적인….”
“자화자찬 같은 결론 말고 좀 더 건설적인 결론은요. 없습니까?”
“…네?”
되묻는 파트너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서 대답을 잘해야 할 텐데.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은 채 선 신입 파트너를 보며 현서는 속으로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서정혁의 공격에 말려든 오늘의 희생양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몰랐는데 상당한 낙관주의자셨네요.”
아니나 다를까, 비웃음 섞인 그의 한마디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확 싸늘해졌다.
“여기.”
탁탁. 기다란 손가락 끝으로 앞에 놓인 패드의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나웠다.
“여전히 한국 지사 투자금 회수율이 제일 바닥인 건 보이시죠. 우리 아직 손해 보는 장사 중입니다. 근데 뭘 근거로 이렇게나 긍정적이신지?”
“…….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 골드스톤이 예뻐서 경제 정책 기조까지 바꿔 가며 협조했을 거란 순진한 착각을 하시는 것도 아닐 거고. 이참에 나라님들 토종 PEF에 연기금 수혈해서 굴려 볼 야심 만만하신 게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말이죠. 이러고 우리끼리 앉아서 서로 손뼉이나 쳐 주고 앉아 있을 때는 아니지 싶은데, 혹시 저 모르는 좋은 일 있으신 거면 같이 좀 압시다.”
당황한 파트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략 팀장님. 팀장님 의견도 이 파트너님과 이하 동문입니까?”
별안간 불똥이 전략 팀장에게 튀었다. 전략 팀장의 얼굴이 당황감으로 시뻘겋게 달았다.
“…아아…. 그래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토대로 한….”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챈 파트너가 가져온 자료를 다시 뒤적거리기 시작했으나 정혁은 이미 늦었다는 듯 손바닥을 무람없이 내밀어 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까지 하시죠.”
벽걸이 시계를 흘긋, 눈으로 확인한 그가 냉랭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바쁜 와중에 이런 무의미한 보고, 들을 시간 따위 없다며 매정하게 쏘아붙이는 거였다.
“팁을 좀 드리자면 그 전 지사장님 계실 땐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론 이런 포트폴리오 보고는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 몇 달 됐으니 제가 어떤 놈인지 대충들 파악 다 하셨잖아요. 본전도 못 건질 일은 하지 맙시다, 피차 아까운 시간에.”
어디 보통 까다로운 분이어야 취향을 파악하지.
현서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정혁을 바라봤다.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만 보이는 서정혁은 제게 여전히 멀고 어려운 남자였다. 아니, 어느 누구에게도 쉬운 사람은 아닐 터였다. 이런 캐주얼한 일상적, 연례적 보고 자리에서조차 이렇게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구니 직원들이 얼굴만 봐도 슬금슬금 피하고 보는 거겠지.
현서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 끔찍한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정 낙관적 결론을 내셔야겠거든 내일 아침까지 제 책상 위에 지난 분기 배타적 협상 기한 연기된 건들 분석한 자료나 낙관적으로 올려놔 주시길 부탁드리고요.”
보고는 그렇게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녀도 제 앞에 놓인 서류를 챙겨 들었다. 예정보다 빨리 끝이 난 김에 얼른 사무실로 돌아가 밀린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겠단 생각이었다. 먼저 일어난 정혁을 따라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킬 즈음이었다.
불현듯 문 앞에 멈춰 선 그가 휙 돌아서며 눈을 맞춰 왔다.
“차 팀장님은 잠깐 저 좀 보시죠.”
***
또각또각.
태블릿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그를 따라 본부장실로 들어섰다.
서로 바쁜 일정 탓에 이렇게 사무실에서라도 단둘이 얼굴을 마주치는 게 며칠 만인지 몰랐다. 그날의 ‘데이트’ 이후 갑작스레 출장 일정이 잡혀 어제까진 일본에, 그제까진 홍콩에 있었던 그다. 덕분에 지난 며칠 서로 몇 번의 통화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게 연락의 전부였고.
바쁘기론 저도 만만치 않게 바쁘니 괜찮다, 상관없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싶다. 이렇게 가까이, 단둘이 한 공간에 있단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걸 보면.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앞서 걷던 그가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어 휙, 소파 위에 내던지며 그녀를 향해 휙 돌아섰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설레는 내심을 숨기고 애써 사무적인 목소리를 냈다. 무감한 얼굴로 다가와 선 남자가 손목을 들어 흘긋 내려다보곤 제게로 시선을 맞춰 왔다.
“10분.”
어쩐지,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어조가 묘하게 달리 들려 가슴이 두근댔다.
“지금부터 10분쯤 여유 시간 있네.”
별안간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부풀었다.
“당신이랑 나, 정확히 사흘 만에 눈 맞추고 얘기할 시간이 드디어 10분쯤 생겼다고.”
“…….
“자. 그럼 뭘 해야겠어.”
어느새 바짝 다가선 그가 불쑥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휘어 감았다.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은 태블릿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쑥, 빼앗아 들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갑작스럽고도 노골적인 스킨십에 절로 헛숨이 삼켜졌다. 빚은 듯 오뚝한 콧날이 바로 눈앞에서 아른댔다.
“주영 은행 채권단 회동, 가시려는 거죠?”
당황해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 업무 얘기였다. 그가 긍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사외 이사 선임 보류로 의견들을 모으신 모양이라.”
“아, 결국…. 어쩌실 거예요?”
“가서 뭐라도 해야겠지, 협박이든 구걸이든.”
“어차피 주영 아니어도 방법은 많잖아요.”
“많지.”
느른히 답하며 눈동자를 깜빡이는 그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많은데 왜….”
“많은데, 우리 법무 팀장님께서 이후 태성 건에도 법적인 잡음 없이 가려면 이렇게 가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을 하셔서. 내가 우리 법무 팀장님을 꽤 신뢰하는 편이거든.”
믿는다는, 신뢰한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사람 심장을 쿵 떨어지게 하는 말이던가. 코앞에서 울리는 남자의 동굴 같은 목소리에 등골이 찌릿해졌다.
“제 검토안, 최종 결재해 주시는 거예요?”
“내 방식은 아니지만, 뭐.”
썩 나쁘진 않으니까. 뒷말을 생략한 그가 새카만 동공을 짙게 깜빡거려 긍정의 답을 했다.
“그럼 태성에서 보내온 합의 초안에도 그 부분을 변경한 의견으로 회신….”
“이제 9분.”
흥분해 연속으로 질문을 던지려던 말허리가 결국 서걱 잘려 나갔다.
“일 얘기 하자고 당신 불러낸 거 아닌데, 나. 계속 이렇게 시간 낭비할 거야?”
다시금 손목을 들어 시계를 흘긋 내려다본 그가 재차 채근을 해 왔다.
입술을 달싹인 그녀의 볼에 홍조가 올랐다. 제 허리를 더 바짝 옭아매는 그의 손길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았다. 지금은 근무 시간이라느니, 여기는 사무실이라느니 하는 핑계 따위 통할 리 없는 남자란 것 또한 잘 안다. 게다가 지금은 제가 더 갈증이 나 있던 참이었고.
잠시 망설이다 결국 까치발을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러곤 남자의 두툼한 입술에 슬쩍 제 입술을 갖다 붙였다 짧게 떼어 냈다. 문득 그의 잇새에서 기막히다는 헛숨과 타박이 함께 뒤섞여 나왔다.
“너 내가 이렇게 가르쳤어?”
“10분, 이라면서요. 시간도 없는데….”
“없는 시간을 이렇게밖에 못 써? 벌써 2분이나 허비했어.”
하릴없이, 다시 발끝을 들어 입술을 조금 더 진득하게 맞붙였다. 그러자 슬며시 벌어진 틈 사이로 기다렸단 듯 들어온 혀가 질척하게 뒤얽혔다. 익숙한 체향과 온기가 온몸에 스몄다.
그저 혀를 맞대고 타액을 섞은 것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의 짜릿함이 느껴져, 그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저와 마주한 남자가 내뿜는 페로몬에 머릿속에서 불꽃이 팡팡 튀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꽤 한참 만에야 아쉽게 떨어져 나간 그가 고개를 깊게 숙여 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뇌까렸다.
“감질만 더 나네.”
정말로 갈증이 난 듯 말끝이 거칠하게 갈라졌다. 그와 별개로 여린 살갗에 달라붙는 축축한 습기는 체온을 뜨겁게 데웠다. 그 저릿하고 소름 돋는 감각에 절로 목덜미가 방어적으로 움츠려졌다.
“오늘은 몇 시까지 일해. 퇴근할 생각은 있어?”
“잘 모르겠어요. 근데 본부장님도 저 못지않게 바쁘시잖아요.”
문득 어렵게 입술을 떼어 낸 그의 미간이 다소 구겨졌다.
“그러게 다시 짐 싸서 들어오라는데 왜 고집이야.”
그의 고백을 들었고, 그 진심을 확인했어도 다시 그의 집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서정혁에게 더 깊게 빠지고 말까 봐. 정말로 이 남자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될 만큼 절실한 마음이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자신이 아는 한 서정혁은 평범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첫 시작도 지금의 과정도, 평범한 그것의 범주에선 모두 한참을 비껴 나 있단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그러다 함께할 미래를 꿈꾸게 되는 일련의 자연스러운 과정들을 과연 서정혁, 이 남자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자답은 ‘NO’였다. 홀로, 오래 고민해 내린 결론은 그랬다.
보통의 연인들에게 있어 평범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바랄 순 없었다. 더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저 이렇게나마 꿈같은 시간을 그와 함께하고 있단 사실에 만족하자고. 이쯤 하자고. 이게 그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였다.
“불편해요, 계속 같이 지내는 건.”
“내 불편엔 관심 없어?”
“저도 저만의 공간이 필요해서 그래요. 본부장님도 혼자 있고 싶을 때 있으시잖아요.”
“없는데요, 난.”
“아뇨. 있으실걸요.”
또 지지 않고 대꾸하는 입술을 가만 내려다보던 그가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항복 선언을 했다.
“내가 계산을 잘못했지. 이렇게 비싼 여잔 줄도 모르고.”
낮은 자조에 조금은 미안한 감정으로 그의 목에 팔을 올려 감았다. 시야 가득, 남자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선명히 담겼다. 버겁게 잘났고 가슴 벅차게 좋았다. 그저 이렇게 눈을 맞추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상념이 사그라들 만큼.
“이제 몇 분 남았어요?”
“5분.”
제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아무래도 그리웠었다. 이 체온이.
“그럼 남은 5분 동안은 좀 더 최선을 다해 볼게요.”
“아주 바람직한 결심이야.”
그대로 눈을 감고 그의 품에 매달리듯 안겨 입술을 맞댔다. 묵직하고 나른한 향기가 입 안 가득 뜨겁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