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71화 (71/115)

♬(71)

또각또각.

바쁘게 발끝을 움직여 걷던 현서의 구두가 복도 끝, 어느 지점에 다다라 느릿하게 멈춰 섰다. 스튜디오처럼 차려진 소규모 영상 회의실 앞이었다. 방음이 완벽한 유리창 너머의 광경에 절로 눈이 갔다. 더 정확히는 한 사람에게로만 향한 시선이었다.

태성의 주요 이사진과 정부 인사 몇몇을 앉혀 놓고 진행되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골드스톤 쪽 사람이라곤 문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레오가 유일했다.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거부한 그가 오롯이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고 선 거였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조금은 우려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작게 내쉬며 그를 응시했다.

이마 위로 말끔하게 쓸어 넘긴 머리칼. 질 좋은 고급 슈트와 여기저기 번쩍거리는 액세서리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치스럽고 거만한, 지극히 라이언 서스러운 모습의 그가 삐딱하게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긴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좀체 받아들이기 힘든 현저한 괴리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저를 안고 끊임없이 고백을 속삭이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 맞는지 퍽 의심스럽기까지 해서.

“이 여자한테는 나도 좀 좋은 사람이고 싶다. 신뢰할 만한 인간이 되고 싶다.”

“내 인생에 지금처럼 망가진 적이 또 있었나 싶은데.”

“내 옆에 잠자코 붙어만 있어 달라고.”

문득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낯 뜨거운 이야기에 희고 말갛던 두 뺨이 불쑥 홍조를 띠었다.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잘난 저 남자가 제게 진심을 토로해 왔던 일 모두가 다 꿈처럼 몽롱했다.

생각해 보면 서정혁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새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갔다.

서정혁은 화려하고 견고하게 지어진 성이었다. 속에 어떤 무기를 숨기고 있는지, 감히 성벽 너머를 갈망할 수도, 엿볼 수도 없는 높고 거대한. 그 실체를 알 수도 없거니와 아무리 폭격을 가해도 결코 함락되지 않을, 그런 성 말이었다.

그러므로 우상향으로 치솟는 그래프나 끝도 없는 길이의 숫자가 찍힌 계약서쯤은 들고 가야 그의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서정혁이 제 손으로, 이렇게나 쉽게 제 속을 까 내보이리라고. 그러니 그의 고백을 불신하며 징징거렸던 건 순전히 제 탓만은 아닌 거였다.

“내가 많이 좋아해, 차현서 씨를.”

손끝이 찌르르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애꿎게 움켜쥐었다.

때마침 안에선 얘기가 끝난 건지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정혁이 제일 먼저 회의실 안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걷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문득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그만 쳐다보고 따라 나와. 저녁 먹게.」

자신이 유리창 너머 몰래 훔쳐보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라보며 홀로 했던 불순한 회상마저 모조리 다 들킨 것 같아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졌다.

열 오른 얼굴에 손등을 가져다 대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1층 로비로 나가자 그녀를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레오가 주차된 세단의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 안으로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와 시선이 맞닿았다.

“뭐해. 타.”

두 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읽어 낸 레오가 알만 하단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한 번 더 재촉을 했다. 제 발이 저려 민망함에 바짝 마른 입술을 앙다물며 차에 올랐다.

“저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모를 수가 없게 뚫어져라 쳐다봐 놓곤.”

“뭔가, 꽤 심각한 분위기이길래…. 아, 얘기는 잘 끝난 거예요? 태성 쪽에선 뭐래요?”

“뭐, 예상했듯이 멍청한 인간 하나가 있긴 한데. 정확히 예상했던 반응이라 딱히 놀랍진 않아.”

“누군데요?”

“박신우라고, 있어. 양재숙이랑 조인호가 앞세운 놈 하나.”

조인호란 말에 대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조인호요?”

“아, 이참에 당신한테 허락 좀 받자. 지난번에 제대로 못 다 밟은 거 완전히 조져 놓을 건데 괜찮지.”

“조인호 상대하는데 제 허락이 왜 필요하세요? 어차피 이제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직까지도 조인호와 저를 엮는 발언에 발끈해 반박을 했다. 그러자 그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귀엽네.”

“…….”

“예쁘면 귀엽지나 말든가.”

태연한 얼굴로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돌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국말을 결코 알아들었을 리 없는 레오를 백미러를 통해 힐끗거리며 눈알을 굴리자 도리어 여봐란 듯 제 손을 끌어당겨 움켜쥐는 그였다.

“미쳤, 어요?”

“잘 봤네. 제정신일 리가 없지.”

백미러 속 레오의 시선이 느껴져 화끈거리는 손을 바르작거리자 그가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나 옆에 앉혀 두고 감히 누굴 힐끗대.”

“갑자기 이러면 레오가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불필요한 신경 꺼. 다 알아서 적응 잘하는 놈이야.”

“그래도….”

“뭐 먹을래.”

그제야 레오의 불필요한 시선이 아직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탓임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아무 거나요.”

“당신은 도대체가 음식에 취향이라는 게 없어?”

“제가 먹자고 하면 그거 먹어 주실 거예요?”

“뭐가 어렵다고.”

“후회하실 텐데요.”

“이거 봐, 차현서 씨. 내 후회 비싸요.”

지그시 내려다보며 답하는 남자의 한마디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 작은 손을 커다랗게 덮은 따뜻한 촉감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뛴다.

***

“맛있게 드세요.”

낡은 테이블 위. 앳돼 보이는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이 올려놓고 간 떡볶이와 김밥 한 접시를 멍하니 응시하던 정혁의 잇새에서 기막힌 헛숨이 터졌다. 어이가 없단 듯 앞이마를 짚어 긁는 남자의 표정에 분명한 후회가 묻어났다.

“왜요. 후회되세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현서가 그를 놀려 물었다.

“이래 봬도 여기가 이 동네에선 가성비 제일 좋은 맛집이에요. 얼마나 싸고 얼마나 맛있는데. 경제적 선택, 본부장님 이런 거에 엄청 쾌감 느끼시잖아요.”

“나에 대한 큰 오해가 있으시네. 나 소비 생활에 있어선 가성비, 경제적 선택, 이런 구질구질한 거 경멸하는 사람이야.”

왜 모르겠는가. 잘 아니까 여기에 온 거였다. 못마땅하게 들썩이는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며 겨우 웃음을 참아 냈다.

“묻자. 내 연봉 얼마게.”

“안 궁금한데요.”

“기본으로 책정된 금액만 천만 달러가 훌쩍 넘어.”

“엄청나네요. 대단하세요.”

“대단히 돈 잘 버는 나한테 겨우 이런 거 얻어먹기 아깝단 생각 안 들어?”

전혀 그렇지 않단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떡볶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음식 식는 게 더 아까워요. 드세요, 얼른.”

그러곤 포크로 떡 하나를 푹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고기 안 섞인 음식은 안 먹어.”

“아, 육식주의자시랬지.”

“이제라도 나한테 관심을 좀 가져 주는 게 어때.”

“이참에 채식을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건강에도 좋고, 좋은 ‘사람’이 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허. 기막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를 마주하자 결국, 비죽비죽 새는 웃음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너 지금 재밌지.”

노골적으로 눈썹을 치켜들며 캐묻자 깜찍한 얼굴이 뻔뻔하게도 고개를 빠르게 끄덕인다. 제 미약한 복수가 성공적이라 퍽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동안 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껏 뒤흔들고 뒤집어 봤던 그에게 이렇게나마 한 방을 먹일 수 있어서 통쾌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여우한테 홀린 거야.”

기어코 눈꼬리를 휘고 웃어 대는 여자를 보며 결국 그가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먹어 봐요. 맛있어요. 진짜로 이거 먹고 싶어서 온 건 맞아요.”

그녀의 말에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포크를 집어 들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한 향이 입 속을 고루 자극했다. 제게는 아무래도 마뜩잖은 맛이건만, 이걸 맛있다며 열심히 먹고 있는 눈앞의 여자를 보고 있노라니 좀 황망해졌다.

이제껏 비싼 거, 고급스러운 거 다 갖다 먹였어도 영 미각 없는 사람처럼 깨작깨작 굴 때는 언제고.

“뭐라도 잘 먹는 게 있긴 하네.”

차현서에 대한 거라면 이제 꽤 알 만큼은 알았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결코 아니었던 모양이다. 봐도 봐도 모를 여자. 시간이 갈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여자의 모습에 계속 기에 찬 헛웃음만 비어져 나왔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실 거죠?”

“아니요.”

“전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처리할 게 좀 많아서요.”

여자가 커다란 김밥을 조그마한 입 안에 꾹 밀어 넣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물오물, 움직거리는 입술이 당장이라도 빨고 싶게 붉었다.

“이렇게 많이 먹고 힘내서 할 일이 고작 그거뿐이야?”

입 안 가득 찬 음식을 버거워하는 하얀 두 뺨은 왜 또 이렇게까지 선정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 때문에 어제 했어야 할 일을 아직도 다 못했거든요.”

현서가 물을 들이켜며 눈을 조금 흘겼다.

“미룬 김에 좀 더 미루면 되겠네.”

“아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할 일이 태산인 당신네 본부장도 너랑 데이트하겠다고 만사 제쳐두고 나왔어. 양보 좀 하고 살아.”

‘데이트’라는 단어가 이렇게 이질적으로 들릴 줄은 또 몰랐던지, 헤 벌어진 현서의 입술이 멍하니 달싹였다.

“지금 이거, 데이트예요?”

“아니면. 미쳤다고 여기 앉아서 내 금쪽같은 시간을 쓰고 있겠어요.”

노골적인 관계의 정의에 창백하리만큼 하얗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저 아직 아무 대답도 안 했는데요? 혹시 우리 사귀어요?”

“왜. 갑질에 재미 들려서 계속 튕기고 싶어?”

그녀는 항의하듯 눈썹을 움츠리며 그를 응시했다.

“네. 억울해서 당분간은 그러고 싶어요. 일단은 원래대로, 잠자리 파트너, 뭐…. 그 정도로 공사 구분 철저히 하면서요.”

“구분 작작 해. 이게 어젯밤에 그 절절한 고백을 받은 사람의 올바른 태도야?”

“한 번쯤은 본부장님도 거절을 당해 보셔야 공평하죠.”

“공평.”

조소를 터뜨린 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길고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제 앞에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여자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단단히 코가 꿰었다 싶었다.

“귀여워 죽겠네, 진짜.”

기다란 팔을 뻗어 티슈를 채어 뽑은 남자의 손이 그녀의 입술 위를 다정히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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