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늦었어요.”
마른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갈라져 나갔다.
“다 끝났고요.”
단호하고 싶은 결심과 달리, 이미 허물어진 감정이 울컥 북받쳐 눈물이 줄줄 났다. 바보 같고, 멍청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마음 정리 끝났단 말을 하는 거예요, 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건 그인데, 도리어 제 목구멍에 지진 듯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구태여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하고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깊은 바다처럼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 속 진심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진짜 속내는 알 수 없어도 표면적으로나마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지금 본부장님이 뭔가 착각하시는 거예요.”
“뭐를.”
“마음이 아니라 몸이 동하는 걸, 착각하시는 거라고요.”
들은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자학하듯 날카롭게 내뱉은 제 말에 도리어 제 살갗이 베이는 듯 아팠다. 늘 막연히 부유하던 감정이 비로소 선명한 통증으로 되살아난 거였다. 덕분에 가슴께에서 목구멍까지, 거칠게 쓸린 듯 아리고 쓰라린 감각이 덩달아 또렷해졌다.
새는 빛 하나 없이 어두운 복도였다. 가깝게 마주 선 두 사람의 시야엔 서로의 표정만이 오롯이 가득 담겼다. 그 외의 모든 건 새카맣기만 했다.
적막에 휩싸인 남자의 얼굴이 짙은 상실감에 잠식당한 듯 어두웠다. 퍽 어울리지 않았다. 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라이언 서의 그것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어서 낯설었다.
“세다, 시작부터.”
불현 커다란 그의 엄지손가락이 다가와 더 깨물지 말란 듯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폈다.
“승자의 여유와 포용력을 보여 줄 생각은.”
어둠 속에서 연방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속 모를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 보면 아주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없어요. 전혀.”
그의 말이 맞았다. 어설픈 거짓말을 할 바엔 차라리 도망을 치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텐데.
“이건 진심 어린 충고인데. 어디 가서 거짓말은 하지 마라, 당신. 아무래도 영 재능이 없어.”
절절히 남은 미련만큼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눈꼬리에 잔뜩 단 채 아무렇게나 칼자루를 휘둘러 대는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거짓말 아니라구….”
“그래서. 거짓말인 거, 그게 뻔히 다 보여서 더 치명상이라고, 지금은.”
핏발 솟은 그의 관자놀이가 불룩거렸다. 화를 참는 건지, 충동을 참는 것인지. 무언가를 억누르려 애쓰는 다소 팬 두 뺨이 금욕적으로 보였다.
보란 듯 다시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런 순간에조차 저와 달리 꽤 멀쩡해 보이는 남자에게 화가 났다. 사람을 바닥까지 만들어 놓곤, 칼자루를 내어 주며 마음껏 저를 망쳐 보란 우아를 떨어 대는 꼴이 속 뒤틀리게 미워진 거였다.
“왜….”
이미 물기를 흠뻑 머금은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왜, 본부장님은 되고 저는 안 돼요? 본부장님도 거짓말 많이 하잖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내키는 대로 내뱉어서 헛된 기대하게 만들고…. 쓸데없이 사람 희망 품게 하는 의미 없는 친절 같은 거…. 자기가 먼저 흔들리게 해 놓고는…. 자기가 먼저 그래 놓고는…. 누가 마음 달라고 구걸한 적도 없는데 맘대로 줬다가 또 제멋대로 거둬 가고….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 그래 놓곤 뭐를…. 나더러, 뭘, 어떻게 망치…!”
여자의 손목을 더 바짝 제 앞으로 당겨 끈 그가 연신 떨리는 붉은 입술 위에 제 것을 겹쳐 물었다. 미처 끝맺지 못한 두서없는 목울음이 남자의 입 속으로 완전히 삼켜져 사라지는 건 당연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단단하게 받쳐 든 그의 또 다른 손바닥이 뜨거운 열을 뿜어냈다.
순식간에 단단한 그의 품에 포박되듯 갇혀 버린 그녀는 옴짝달싹 못 하고 무기력히 그의 코트 깃만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뜨겁고 익숙한 감각이 붉게 터진 그녀의 입술을 열어 들어왔다. 그녀 또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순순히 내려 감고 뿌예진 시야를 스스로 차단했다. 제 무기력함과 한심함을 구태여 인정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열에 달뜬 살덩이가 울음을 가득 머금은 입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고 헤집으며 우는 여자를 살살 어르고 달랬다. 그는 그녀의 예민한 점막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타액을 섞고 혀를 빨아 가며 나약한 감정을 잔인하게 부추겨 댔다.
서정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를 밀어내지 못할 거란 걸. 직접 제 손에 쥐여 준 칼자루로 후려치지도, 찌르지도, 마음껏 망쳐 놓을 수도 없다는 걸. 결국, 이렇게 또 그의 품에 안겨 탐욕스러운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다 알면서도 저를 이용하고, 농락하고, 뒤흔들어 대는 남자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본부장님이, 제가 망친다고 망쳐지기는… 하는 사람이에요?”
여전히 제게 입술을 붙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채 끝맺지 못했던 원망을 내뱉었다. 갑은 언제나 그였고, 제 목줄을 쥔 사람 역시 그였다. 관계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명백히 제가 아닌데, 이렇게 나약하고 무기력하기만 한 제게 뭘 어쩌라는 거냐고.
“도대체 당신 눈엔 내가 어떤 인간으로 보여. 아니, 인간으로 보이긴 해.”
이 와중에도 제 여린 뒷덜미를 쓰다듬고, 마른 날개 뼈와 등을 찬찬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지나치게 따스했다.
기어코 또, 이렇게 착각을 하게 만든다. 네 모든 불안과 흔들림을 다 이해한다는 듯. 네 마음에 품은 진심 모두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모호한 의구심이 다시금 마음을 뒤흔들었다.
“저는… 정말로… 모르겠어요. 어떤 게 진짜예요?”
“뭐가 알고 싶은 건데.”
“진심, 요.”
“내 입으로 장렬히 패배 선언까지 했는데도 못 알아듣겠다니 할 말이 다 없어지려고 하네.”
“네. 저 바보라 못 알아듣겠어요. 헷갈리지 않게 쉽게 말씀해 주세요.”
이마 위로 남자의 느른한 한숨이 쏟아졌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누르며 슬쩍 더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간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세차게 뛰어 댔다.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몸을 맞붙인 그에게도 선명히 들릴 만큼, 빠르고 크게.
“나 당신 좋아해. 당연히 착각 아니고. 오해도 아니고. 지금 당신이랑 똑같은 마음, 똑같은 감정이란 소리야. 이런 내 진심, 눈곱만큼도 안 알아주는 여자한테 굳이 칼 쥐여 주고 내 모가지 드러내 놓을 만큼 아주 심각하게.”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진심을 토로해 왔다.
“…거짓말.”
믿을 수 없어서 더 믿고 싶은 그의 말을 부정하며 냅다 도리질부터 쳤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당신한테 믿어 달라고 하는 말 아니고, 당신처럼 속이나 편해 보자고 하는 소리도 아니야.”
“그럼… 왜 해요?”
“내 옆에 잠자코 붙어만 있어 달라고.”
“…….”
“멀어지지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그냥 옆에만 있어 달라고. 차현서 씨가 지금 나한테 원하는 게 진심이라니까, 그래서 말하는 거잖아. 아니, 부탁. 사정. 애원쯤 되려나.”
제 젖은 시야에 오롯이 들어찬 남자의 얼굴이 가물거렸다. 자세히 보고 싶은데, 그 깊은 눈동자에 담긴 진심을 조금 더 읽고 싶은데 보이질 않아 속이 답답했다.
도무지 못 믿을 얘기뿐이었다. 서정혁의 입에서 부탁, 사정, 애원 같은 단어가 나올 리 없잖은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댔다.
“갑자기 마음이 왜 바뀌셨는데요? 지난번엔 분명히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제가 애원하고 부탁하고 매달려도 매몰차게 제 마음 끊어 내셨잖아요.”
“그래서 속죄하잖아. 그래서 당신한테 나 망칠 기회 주잖아, 지금.”
“하…. 뻔뻔해….”
입술을 감쳐물고 젖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좋아. 다 거짓말이라 쳐. 그냥 날 뻔뻔한 개자식이라 여겨.”
도리어 순순히 제 거짓을 인정하는 남자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젖은 뺨을 훑고 지났다.
“근데 난 이 거짓말에도 차현서가 다시 흔들렸으면 좋겠어. 간신히 정리한 그 마음, 다시 펼쳐 놓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고. 그렇게 거슬리고, 신경 쓰이고, 화가 나서라도 내 옆에 붙어 있었으면 싶어, 아주 오래.”
고장 난 테이프처럼 느려진 그의 목소리가 침전하듯 가라앉았다. 지독히 이기적이고 세상 뻔뻔한 고백임에도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고 따뜻하게 들려서 더 화가 났다.
“복수. 화풀이. 혐오. 좋아, 다.”
“…….”
“다 좋은데, 내 옆에서 해. 어디로 내뺄 생각 하지 말고, 여기서 하라고.”
여전히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분명 저였다.
“저한테 명령하세요, 지금?”
“명령이면 들을래?”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 기막혀.”
“충분히 이해해. 화내는 것도, 기막혀하는 것도.”
“진짜… 나쁜 새끼예요.”
“칭찬 고마워.”
“어이없어, 진짜….”
울음에 다 뭉개진 발음으로 그를 향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입술을 떨었다.
“울지 마. 시작부터 난도질당해서 울고 싶은 사람이 지금 누군데 네가 울어.”
울지 말라는 말에 꼭지가 열린 듯 더 울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금 가까워진 남자의 얼굴이 제 머리꼭지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꼬리에 쉴 새 없이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훔쳐 닦고, 작은 턱을 바짝 추켜올린 그가 고개를 숙여 또다시 입술을 겹쳤다.
울음과 함께 쿨쩍거리며 넘어가는 타액의 외설적인 소리가 기다란 복도에 소란스레 울려 퍼졌다. 코트 깃을 움켜쥔 작은 손가락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쉬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제껏 차갑게 식어 있던 작은 몸에 혈기가 돌고 있었다. 다정하게 혀를 얽고 타액을 넘겨주는 키스가 더없이 달콤해서 순순히 혀를 내고 풀어진 마음을 내어줘 버린다.
졌다. 이 게임에서 패배한 건 서정혁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이었다.
어둡고 망망한 우주의 공간에 덩그러니 남자와 저, 단둘만이 남겨진 것 같았다. 아니, 버려진 듯도 했다.
그래서 좋았다. 이대로 우주의 작은 먼지처럼 소멸해 버린대도 아무런 상관도 없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