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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회장이 떠난 뒤 곧 파할 줄로 알았던 술자리는 그 뒤로도 꽤 길게 이어졌다. 옆 방에 있던 국회 의장을 비롯한 야당 의원 몇몇이 합석해 도리어 판이 커져 버렸다.
현서는 일찌감치 술이 떡이 되어 떠난 전략 팀장을 대신해 혼자서 정혁을 수행했다. 그에게서 바쁘면 먼저 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으나 사적 감정에 휘둘려 책임감 없는 행동을 하긴 싫은 까닭이었다. 그 기저엔 서정혁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단 생각이 깔려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의 소박한 기대에 부응해 뭐든 잘 해내고 싶었다. 비록 그에겐 우스운 결심과 하찮은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골드스톤에 유리한 여러 가지 법안 상정을 앞둔 걸 생각해 보면 이 갑작스러운 술자리가 꽤 자연스러운 로비 자리가 된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상황은 정반대로 보였다. 누가 누구에게 로비를 하고 있는 건지. 이 자리의 주도권이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건지.
우스운 광경이었다. 정치판에선 그래도 한가락 한다는 국회 의원 나리들께서 체면 불고하고 고작 장사꾼인 라이언 서의 환심을 사려 아양을 떨어대는 꼴이라니. 돈 냄새를 맡고 모인 이들의 싸구려 욕망이 퍽이나 천박했다.
일순 권력도, 명예도, 지위도 결국 다 부의 뒤꽁무니나 쫓을 뿐이라던 그의 말이 결코 뒤집을 수 없는 정언 명제로 느껴져 입이 썼다. 너 따위가 뒤집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잔인하게 확인받는 것 같아서.
그는 여상히 정중하고도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몸에 밴 여유와 자신감은 다소 오만방자한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그 태도가 외려 상대의 환심을 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듯했다.
적어도 서정혁이라는 인간의 줄을 잡으면 제 돈 잃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부지불식간 심어 주는 식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강력한 신뢰는 가슴이 아니라 제 눈앞에 찍힌 숫자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서정혁은 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다뤘다. 지금껏 자신이 아는 한 예외는 없었다. 지금도 이 속물스럽기 짝없는 인간들을 제 발아래 두고 거래를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이 거래의 갑은 이미 그였다.
조용한 소란 속에서 멀거니 앉아, 다소 방관자처럼 그들의 풍경을 바라봤다. 자리는 불편하고, 따분하고, 괴로웠다. 내내 갈증이 나 앞에 놓인 맹물만 숱하게 들이켰다. 비단 끊임없이 제게 향하던 남자의 따가운 시선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식당을 빠져나왔을 땐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레오가 운전대를 쥔 검은 세단이 기다렸다는 듯 입구 앞에 스르륵 멈춰 섰다.
그가 돌연 말없이 차 뒷문을 열어 보였다. 타라는 의미였다.
“괜찮습니다. 택시 타고 갈게요.”
고집을 부리는 제 앞에 선 남자의 눈빛 또한 고집스러웠다. 짧은 침묵이 스쳤다. 그 짧은 순간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먼저 피했다.
이내 고집을 꺾고 핸드백을 움켜쥐며 뒷자리에 오르자 그가 곧바로 옆자리에 몸을 실어 왔다. 밀폐된 공간, 한층 더 가까워진 남자의 체향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 끝을 꾹 눌러 접었다.
[저는 회사에 내려 주세요.]
레오를 향해 한 말이었으나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이 시간에.”
“말씀드렸잖아요. 할 일 남았다고.”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어떻게든 증명해 내려는 것처럼 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하고 하찮게 여겨졌으나 뭐든 상관없었다. 간신히 붙들어 맨 제 마음만 더 허물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짙은 눈썹을 들썩이는 남자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 차창을 응시했다. 잠시 후 시트에 등을 푹 묻은 채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검은 창에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습관처럼 넋 놓고 그를 바라봤다.
취한 걸까. 단단한 목덜미 아래를 조이던 단단한 넥타이 매듭도 한 손으로 길게 당겨 풀어내고, 셔츠의 단추도 연달아 가볍게 풀어낸 남자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퍽 흐트러져 있었다. 아무리 술이 센 그라도 걱정스러울 만큼 많이 마시긴 했다. 결국은 혼자서 그 주당들과 대작을 한 거였으니까.
그래도 식당에선 음흉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들에게 날 선 농담까지 할 만큼 멀쩡해 보였었는데. 규칙적으로 내뱉는 날숨에 쌉싸름한 알코올 향이 섞여 풍겼다. 아무래도 취기가 오르긴 오른 모양이었다.
지금 취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혹시 아직도 나 좋아해요?”
알면서도 묻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우스울까. 얼마나 재밌을까. 멍청한 계집애 하나가 제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 바보처럼 허둥거리는 게. 아무래도 가학적 성향의 그에겐 꽤 재밌는 구경거리가 됐을 거다.
나쁜 놈. 이 사디스트.
평온한 그의 얼굴이 꼴도 보기도 싫어 그대로 동공에 맺힌 남자의 얼굴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금세 도착한 회사 주차장에 차가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으나, 잠이 든 건지 취한 건지, 눈을 감은 그는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하질 않았다. 하릴없이 운전을 해 준 레오에게만 백미러를 통해 눈인사를 하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정말로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또각또각. 어둑한 복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끝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또 부여잡았다. 이제는 정말로,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떻게든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또 그의 지옥에서 연명하듯, 계속 버티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땡, 울리는 차임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각의 공간에 올라탔다. 12층 버튼을 누르고 멍하니 서 다시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문이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닫히는 문틈 새로 불쑥 낯익은 구두 코가 침입해 들어 왔다. 서정혁이었다.
기막혀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리만큼 멀끔했다. 특유의 묵직한 스킨 냄새와 알코올 향이 섞여 더 진해진 그의 향기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였다.
“뭐, 예요?”
딴에는 겨우 도망쳐왔는데 왜 또 옭아 붙드는 거냔 항의였다.
“뭐겠어요. 따라온 거지.”
“네?”
“나도 내 일 하러.”
취한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연히 내뱉으며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는 그를 위해 직접 14층 버튼을 눌러 주었다. 한 발짝 뒤,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서 있던 그가 픽,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본부장님은?”
결국, 기껏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이 노력한 보람도 없이 불쑥 북받쳐 오르고야 말았다. 돌아본 남자의 눈빛에 놀라고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어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재미.”
그가 낮게 뇌까리며 제 말끝을 곱씹었다.
“네. 뭐가 재밌어서 간신히 마음 비우고 정리한 사람 들쑤시지 못해 안달이신지 궁금합니다.”
“내가 재밌어 보여, 당신 눈엔?”
말문이 턱 막혔다. 흥분해 높아지는 제 말소리를 딱 자르는 남자의 동공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까닭이었다. 취한 게 아니었다. 외려 블랙홀같이 까만 눈동자가 번득이며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선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어떤데. 밤낮으로 괴롭히던 인간, 이젠 밤에라도 멀리할 수 있게 된 기분.”
“…….”
“좀 살 만해? 즐거워?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선 긋고 도망치면서 여유 있게 이렇게 항의도 하는 거고.”
여상히 빈정거리는 내용이었으나 어투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어쩐지 푹 가라앉아 잠긴 음성이 다소 원망하는 듯이 느껴졌다면 제 착각인 걸까.
“재밌냐고?”
“…….”
“아니어서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기분은 아주 엿 같아.”
짧은 순간,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해석하려 노력했다. 입술을 짓깨물며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짙은 눈썹이 길게 치켜 올라가더니 이내 당황스러운 말을 내뱉는다.
“후회해.”
후회. 오만한 남자의 입에선 결단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단어가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써 비우려 노력했던 머릿속 상념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재수 없게 느물대고 남 조롱하는 데 재주가 있는 남자이긴 했어도 함부로 허튼소리를 내뱉고 의미 없는 농담은 할 사람은 아니었다.
“되지도 않을 정리하잔 헛소리 한 거. 내 사적 바운더리에서 당신 내쫓은 거. 차현서에 대한 사적 소유권 스스로 걷어찬 거까지, 전부 빠짐없이 다.”
새카맣고 깊은 눈동자가 제 심연을 들여다본다. 더 알 수 없어진 기분이다. 아니, 되레 추궁을 당하는 건 저였다.
“재밌고 쉽녰지. 아니. 더럽게 재미없고, 진저리나게 안 쉬워. 신나게 도망치는 차현서 쳐다보면서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 아주 엿 같다고.”
땡.
어지러운 침묵을 깨는 소리가 아스라했다. 12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가 잠깐의 공백을 두고 다시 쿵, 닫혀 버렸다. 그 소리로부터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위가 고요해졌다.
한참 만에야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버린 생각을 겨우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당신이 짐작하는 뜻.”
“…왜요?”
수수께끼 같은 함의보단 이유를 먼저 알고 싶었다. 이해가 안 갔다. 막상 관계를 깨고 나니 돌연 아쉬운 마음이 들기라도 했을까. 도무지 통제 불가능한 본능 때문에? 하기야, 마음을 담보 삼지 않은 그런 인스턴트 같은 관계에 스스로 갑이길 포기했으니 조금은 애석한 기분이 들 법은 했다. 조금 더 쥐고 있었다고 결코 그에겐 손해일 게 없었으니까.
“혹시 이제 와서 본전 생각이라도 나세요?”
날 선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상처 하나 없는 잘난 얼굴로 후회니, 재미니 뭐니 하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게 얄미워서였다.
“죄송한데요. 일방적으로 ‘관계 종료’ 통보한 거 본부장님이세요. 자존심이고 수치심이고 다 내팽개치고 고백까지 한 저한테 골 때린다고, 흥미 떨어지게 한다고 짜증스러워하셨던 것도 본부장님이시고요. 그거 기억은, 하시죠?”
억울하고 속이 뒤집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람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좋아한다는 제 마음을 약점 삼아 이런 식으로 또 장난질이나 치려는 그의 의도에 감정이 치받쳤다.
“아무래도 더 있으면 제 기분까지 엿 같아질 것 같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지불식간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버튼을 찾아 닫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그대로 도망쳐 나가기 무섭게 뒤에서 손목을 낚아챈 악력이 그녀를 다시 남자 앞으로 돌려다 세웠다. 쿵, 닫힌 엘리베이터 앞. 어둠에 잠식당한 12층 복도엔 서늘하고 날 선 침묵이 맴돌았다.
설움이 북받쳤다. 그 무거운 침묵을 견디다 못해 그대로 이를 악물고 욕이라도 내뱉어 주려는 찰나.
“내가 졌어.”
깊게 가라앉은 그 진중한 목소리가 모든 걸 깨부쉈다.
“당신이 이겼어.”
남자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제 앞의 여자를 또렷이 응시했다. 좀체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아득하고 진득한 동공이 오롯이 그녀에게로만 쏟아져 내렸다. 불현듯 철옹성 같던 그의 표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쓸쓸하고 낯선 표정이었다.
“지금 칼자루 쥔 사람, 나 아니고 당신이란 소리야. 그걸로 날 후려치든, 찔러 죽이든, 뭐든 원하는 대로 해.”
불순한 예감에 눈앞이 어른어른 댔다. 모든 거래의 판단 기준은 자신이라 해 놓고 이제 와 제게 이런 선택권을 주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제 당신 차례야, 차현서 씨.”
타박, 한 걸음 더 가깝게 몸을 붙인 남자의 서늘한 체향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갔다.
“어디 마음껏 망쳐 놔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