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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회장의 비서가 직접 찍어 보낸 주소지는 용산의 어느 한정식집이었다.
7시 45분.
법원이 있는 서초동에서부터 이곳 용산까지, 퇴근 시간이 겹쳐 평소보다 대략 한 시간 정도 더 걸린 듯싶었다. 현서는 재차 시간을 확인하곤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드르륵, 열리는 장지문 안으로 들어서며 살짝 묵례를 했다. 방 안엔 이미 자리를 잡은 안성태 의원과 금동준 회장, 골드스톤 전략 팀장 김종훈, 그리고 서정혁이 한 상 가득한 테이블 앞에 마주해 있었다.
“이야. 차 팀장, 오랜만이야.”
안성태가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아, 이 친구가 그 친구로구먼.”
금동준 회장이었다. 옆에 선 직원에게 목도리와 코트를 벗어 건네곤,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희끗한 머리의 그 앞에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차현서입니다.”
태성 리테일 계열사 통합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안을 협의하기 위한 회동 자리였다.
안성태가 이 판에 또 발을 들인 건 철저히 본인의 의지였다. 여전히 야당의 실세라 할 수 있는 그의 지휘하에 기재위며 법사위 소속 야당 의원들이 합심해 성실히 밑 작업을 시작했단 소식이었다.
물론 뒤에서 그를 부추긴 건 분명 서정혁이었다. 대체 어떤 설득과 협박을 했기에 가능한 건진 몰라도, 안성태는 잔챙이 같은 은성제약을 먹어 보려던 마음을 바꿔 이번엔 태성 쪽으로 완전히 노선을 틀기로 한 모양이었다.
안성태는 금 회장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길 원했다. 물론 남들 보기엔 그저 금 회장을 향한 애달픈 짝사랑 정도로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현서가 이 자리에 참석해야만 했던 건 금동준 회장의 의지 때문이다. 회장은 컨소시엄 구성 시 TF팀의 핵심 멤버로 현서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녀의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유는 확연했다. JK의 양재숙을 어떻게든 견제해 보겠다는 의도였다.
“반갑구만. 얘기 많이 들었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금동준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현서에게 빈 술잔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잔을 받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한 모금을 들이켰다.
“차 팀장님이 검토한 컨소시엄 구성안에 대해선 회장님께서도 매우 만족스러워하셨고요. 지금은 구체적으로 계열사 통합 절차가 있기 전에 절차상 아무래도 안 의원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착석한 전략 팀장이 중간에 합류한 현서를 위해 작게 부연 설명을 했다.
“난 안 의원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 줄 줄 몰랐어. 안 그래도 계열사 간에 크고 작은 잡음이 있어 걱정을 꽤 했는데. 안 의원이 도와준다면야 나도 더 바랄 게 없겠지.”
“하하! 저야말로 이 작은 정성으로 회장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죠.”
안성태는 내 바라던 답을 얻은 듯 목소리를 한껏 띄워 웃어 댔다.
“아, 그리고 저도 다 상황 봐서 끼어든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서 본부장, 회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손만 댔다 하면 아주 기가 막히게 그림 만들어 놓는 거. 제가 서 본 수완에 아주 혀를 내둘렀습니다.”
하마터면 조인호 쪽에 줄 잘못 서서 크게 한탕 잃을 뻔한 게 엊그제 일이건만 안성태는 뻔뻔한 얼굴로 정혁을 추어올리며 오버를 해 댔다. ‘우리’라니. 누가 들어도 기막혀 실소를 터뜨릴 말이었다.
“그래. 나도 서 본부장 아니었으면 생각도 안 해 봤을 카드였지, 통합은.”
금 회장도 안성태의 말에 일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제가 아니라 차 팀장이라 생각한 카드인 건 아니시고요.”
정혁이 금 회장의 잔을 채우며 슬몃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한 회장은 잠자코 의뭉스러운 표정만 지었을 뿐이다.
그는 어쩐지 금 회장이 ‘차현서’를 콕 집어 지명한 불순한 의도를 퍽 못마땅해하면서도 이 상황을 더 활용하려 하는 것 같았다. 제게는 자신이 꽤 믿을 만한 능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라는 답지 않은 따뜻한 이유를 들먹였지만, 현서의 생각으론 분명 그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며 또 저를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지.
넘칠 듯 맑게 일렁거리는 액체를 바라만 보다 술잔을 집어 들었다. 제법 진한 과실 향이 섞인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뜨끈하고 쌉싸름했다. 시뻘건 불덩이를 삼킨 듯.
중요한 이야기도 다 끝났고, 식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무렵이었다. 다음 일정이 있다는 금 회장이 제일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취기가 오른 안성태는 그가 나가기 무섭게, 화장실에 다녀오다 우연히 마주친 옆방의 국회 의장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며 전략 팀장을 끌고 별안간 사라져 나갔다.
널따란 방 안. 순식간에 저와 서정혁, 단둘만이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무거운 정적에 빈 술잔만 만지작댔다. 불편하고 조바심이 나 속이 울렁대기까지 하는 저와 달리 눈앞에 버티고 앉은 남자의 얼굴은 영 무감하기만 했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정리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마주 앉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의 그가 등받이에 느긋이 몸을 기댔다. 그는 긴장해 먹는 둥 마는 둥 하느라 깨끗하기만 한 제 앞접시를 흘긋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뒤로 꺾어 술잔을 들이켰다. 남자답게 솟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굵게 일렁거렸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감정을 떨치기 위해선 이 불편한 침묵부터 끊어 낼 필요가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낼까 잠시 고민하다 적당히 떠오른 말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금 회장님도, 안 의원님도 예상보다 더 적극적이신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이제 내부 반발 이슈 컨트롤이 관건이겠죠. 늘 그런 수순이니까.”
“그래도 해 볼 만은 할 것 같습니다. 적대적 M&A를 하겠단 것도 아니고, 금 회장님이 아직 저렇게 건재하신데 누가 감히 목숨까지 걸고 반발을 할까요?”
“멍청한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 그게 우리 하는 일의 원동력이 되고요.”
무슨 뜻인가. 따가운 한마디에 손끝이 시큰댔다. 금세 무너진 복잡한 심경으로 다시 고개를 떨궜다. 빈 술잔을 다시 채우는 그의 손목시계로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애꿎은 손끝만 꾹 감아쥘 뿐이었다.
“법원에 갔던 일은….”
“들었어요. 조성호가 지명한 사내 이사로 최종 승인 결정 난 거.”
어색한 분위기를 대충 때우려던 제 속셈이 대번 좌절당했다. 또다시 할 말을 잃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끊임없이 저를 훑는 남자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모르는 척, 못 본 척, 고집스레 외면하고 피했으나 그의 시선을 받아 내는 오른쪽 뺨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지고 있단 사실까진 부정할 수 없어졌다. 한계였다.
결국,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한 그녀가 결심한 듯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혹시 더 지시하실 사항 없으시면 저 먼저 일어나도 괜찮을까요. 아침까지 은성 쪽에 법원 통지 내용을 전달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말하는 저를 바라보며 느른히 눈꺼풀을 깜빡거릴 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이어 갔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기로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혹시 아직도 나 좋아해요?”
예고도 없이 경계를 허물어 온 질문에 몸이 얼어 뻣뻣이 굳었다. 무심한 것 같기도, 조금은 날이 선 것 같기도, 한 사나운 눈빛이 저를 낱낱이 뜯어보고 있었다. 가슴 어디 께에서 불씨가 탁, 탁 소리를 내며 터져 올랐다.
“…아뇨.”
그 또한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할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감정 동요라곤 없는 남자 앞에서 자신만 초라한 마음을 죄 펼쳐 놓고 웃음거리가 되는 건 한 번으로도 족했다.
“아닙니다.”
태연을 가장하며 재차 부정했다.
“근데 왜 도망갑니까?”
이어진 추궁에 붉어진 두 뺨이 씰룩댔다.
“도망이 아니라…. 용건이 끝났으니 그만 가 보려는 것뿐입니다.”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가소롭다는 듯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거짓말 여전히 어설픈 거 보면 그냥 도망치는 걸 택하는 그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만.”
“…….”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차 팀장님.”
그가 안타까움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산발적인 생각의 파편들이 차마 반박할 말을 제때에 찾지 못하고 형편없이 뒤엉키고 있었다. 한심했다.
“요즘 나 피하느라 너무 애를 쓰시던데, 도둑고양이처럼.”
그저 뺨으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리며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조롱을 하겠단 건가, 건드려 장난을 걸어 보겠단 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의 의도는 전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너절해진 제 마음 하나 추스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 아니던가.
“불필요하게 마주쳐서 좋을 것 없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본부장님께나 저에게나.”
“그래서. 그 노력의 결과는?”
속이 뒤집혔다. 간당간당하던 연약한 감정이 치받쳐 너덜너덜 나부댄다.
그저 한 번 밟고 지나갔으면 그뿐이지, 왜 이렇게까지 확인 사살을 하며 악마처럼 구는지. 기어코 사람을 몰아붙여 밑바닥까지 까뒤집어 보이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노력한 보람이 있습니다. 기대했던 성과가 제법 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답을 했다. 적의 가득한, 사나운 제 목소리에 그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이 나느냐고, 이게 당신에겐 재미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때마침 드르륵, 문이 열리고 나갔던 두 사람이 들어와 착석했다.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어 싸늘히 얼굴을 굳힌 자신과 달리,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 밉살맞은 얼굴을 외면하며 술잔에 입술을 묻었다. 입가에 맴도는 알코올이 쓰디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