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65화 (65/115)

♬(65)

레오가 사무실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기가 무섭게 정혁의 추궁이 쏟아졌다.

[JK모직 대표 건, 내일 아침 이사회 최종 결정만 남았는데 양재숙 쪽 여전히 아무 움직임 없는 거 맞아? 멍청히 발등에 떨어진 불 감상하고 있을 타입 아닌데. 장기용이나 장기준, 아님 장민영 쪽이라도 뭐 건수 잡힌 게 하나도 없어?]

태블릿 액정과 서류를 번갈아 살피며 인상을 구긴 남자의 목소리가 퍽 사나웠다. 그날, 차현서와 함께 호수에 다녀온 이후로 정혁은 계속 이렇게 날카로운 상태였다. 레오는 그런 제 보스의 심기를 가히 알 만하다는 듯 눈썹을 찡긋거리며 앞으로 다가섰다.

[나흘 전 오후에 조인호가 JK갤러리에 다녀갔답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그제야 정혁이 고개를 쳐들며 제 앞에 선 레오의 얼굴을 바라봤다.

[보고가 이제 들어왔어요. 웬 이상한 차를 타고 와선 지하에서 곧장 관장실로 올라가는 바람에 조인호인 줄 몰랐다는데, 아무래도 수상해서 차 번호로 차적 조회해 보니 조인호 이름이 나왔답니다.]

[같잖고 귀찮아서 밟다 말았더니. 기어코 제 무덤을 제 손으로 파시네.]

잊고 있던 조인호의 이름에 정혁은 코웃음을 치며 인상을 구겼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근데, 양재숙이 궁지에 몰리긴 했다지만, 굳이 개털인 조인호 손까지 잡아가면서 득 볼 게 있을까요.]

[모르지. 양쪽 다 지금 나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원래 목적은 뚜렷할수록, 수단은 잔인할수록 공모가 잘 돼.]

[일단은 지켜보시죠. 여기저기 눈 귀 심어 놨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 보이면 뭐든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인생 보람차네. 하루하루 나 잡아 죽이겠다는 인간들이 아주 글로벌하게 늘어가서.]

정혁은 짜증스럽다는 듯 인상을 쓰며 넥타이를 툭, 당겨 풀어 던졌다. 그사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정혁의 핸드폰이 짧은 진동 소리를 냈다. 화면이 켜진 액정엔 ‘Missed Call : 16’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흘긋, 액정을 본 레오의 두 눈썹이 들썩였다.

[안 바쁘시면 미셸이 전화 좀 받으시라는데요.]

라이언이 제 전화를 안 받는다며 레오에게 화풀이하듯 성화를 해 대던 그녀였다.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답답해 미치려고 하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지금 눈 돌아가게 바쁜 거 안 보여?]

예상했던 무감한 답변이 돌아왔다. 레오는 슬며시 라이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짜 안 가실 거예요?]

[어디를.]

[뉴욕요.]

뉴욕에서의 상황이 제법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레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앤더슨이 등 뒤에 어떤 칼을 숨기고 있는지는 일전의 아시아 자문위원회 구성 건으로 이미 확인한 바가 있었고.

물론 기회와 위기를 직감하는 능력만큼은 동물 같은 라이언이 자신도 아는 이 상황을 몰라서 외면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차현서, 아직도 그 여자에 대한 감정 수습에 애를 먹고 있는 거였다.

[왜. 미셸이 이젠 너더러 나 직접 끌고 오래?]

[미셸이 아니어도 여차하면 제가 알아서 모시고 갈까 싶은데요.]

[꽤 먹고살 만해졌나 봐. 내가 하극상에 관대한 상사는 아닐 텐데.]

[수습하신다면서요. 아니, 이미 시작하신 거 아니었어요? 그럼 이참에 완전히 여기 떠나도 상관없으시잖습니까.]

레오가 답답하다는 듯 캐묻자 정혁은 피곤한 관자놀이를 꾹 눌러 고개를 기울였다. 그답지 않은 긴 한숨이 이어졌다. 예상과 달리 그럴싸한 변명도, 능글맞은 농담도, 날 선 타박도 돌아오지 않았다. 낯설 만큼 심란한 표정이었다.

레오는 결국 더 하려던 말을 꾹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

[잠은 좀 주무세요?]

[요즘 같아선 안 자는 게 나아.]

눈만 감으면 악몽이란 뜻이었다.

[그래 보이시네요, 얼굴이 영.]

[약발 더럽게 안 받는다고 제임스한테 연락이나 해 둬. 그 돌팔이, 뭐라고 변명하나 들어나 보게.]

레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따라 내쉬었다. 지난여름 라이언이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 저라도 말려야 했단 후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사진 속 차현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공항으로 향하던 그의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게 잘못이었다. 일이 잘못되려니 모든 게 처음부터 다 꼬여 있었던 거다. 운명이니 악연이니 하는 그런 지독히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은 차치하고서라도.

[약은 제때제때 챙겨 먹으면서 해야 하는 말인 건 아시죠? 여기서도 일 못 줄여서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제임스가 퍽이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겠네요.]

잠시 커다란 손을 들어 두 눈을 깊게 감쌌다가 떼어 낸 그가 피곤한 눈을 치켜뜨며 레오의 말을 끊어 냈다.

[요즘은 게임 안 해?]

[어렵게 손 뗐습니다.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거기 서서 계속 그렇게 잔소리나 할 거면 퇴근하고 가서 게임이나 해, 제발.]

정혁은 저 멀리 문 쪽을 향해 귀찮은 듯 턱짓을 했다. 레오도 그럴 줄 알았단 듯 순순히 자리를 피해 물러 나갔을 뿐이다.

다시 혼자가 됐다. 어둠이 내려앉아 사위가 고요한 시간이었다.

레오가 들어오기 전부터 정혁의 시선은 줄곧 누군가 올린 전자 결재 서류의 ‘협조자’ 란에 붙박여 있었다.

협조자 : 법무팀 차현서

업무적으로만 보자며 선을 긋던 그 말대로, 짧은 사이 차현서는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 완벽히 모습을 감췄다.

“본부장님은 모든 게 다 참 쉽네요.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시작도, 끝도 모두 쉬웠던 건 도리어 그녀였다.

얄미우리만큼 그리운 액정 속 세 글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고작 이름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단전에서부터 목 끝까지 꽉 막힌 듯 갑갑했다.

째각째각. 손목 위에서 움직이는 시계 초침 바늘의 소리만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을 갈랐다.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까.

결국은 버겁게 밀려드는 상념을 견디다 못한 정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의미한 잡생각은 이쯤 끊어 내야만 했다.

마음을 추스르듯 벗어 뒀던 코트를 걸쳐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금요일 자정 무렵의 회사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차가 주차된 지하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불현듯 12층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야간 순찰을 돌던 경비업체 직원이 아는 체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야근을 할 때면 꽤 자주 마주치곤 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퇴근하시나 봅니다.”

“네. 일이 좀 바빠서요.”

“항상 이 시간까지 남아 계신 건 본부장님이랑 법무 팀장님뿐인 것 같네요.”

그저 지나치듯 아무 의미 없이 했을 직원의 말에 코트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손끝이 찌르르 울었다. 정혁은 대시 보드판의 점점 줄어드는 새빨간 숫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또다시, 채 삼키지 못한 불덩이 같은 무언가가 목 끝에서 일렁였다.

땡.

지하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먼저 발걸음을 뗀 경비업체 직원이 그를 돌아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안… 내리십니까?”

“네. 뭘 놓고 왔네요.”

짧게 답하며, 엘리베이터 안 수많은 숫자 버튼들 중 하나의 버튼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연스럽게 스르륵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새로, 작별을 수긍하며 인사를 건네는 직원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져 갔다.

12층.

내 응시하고 있던 숫자 버튼을 망설임 없이 꾹, 눌렀다. 잠시 멈춰 있던 기계가 다시 요란한 작동 소리를 내자 이내 붉은색 숫자가 카운트 되듯 천천히 올라갔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목 끝까지 차오른 이 무언가를 잠시라도 해소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다분히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단 걸 인정했다.

다시 12층에 도착해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어둑한 빈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본능처럼, 불빛이 새어 나오는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법무팀장 차현서

목적지였던 명패가 걸린 문 앞에서 남자의 구둣발이 멈췄다. 시선은 일찍이 유리창 너머, 작은 도토리 같은 여자의 머리통에 가 닿아 있었다.

시선의 끝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지칠 때까지 일을 하다 결국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감고야 만,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차현서가 요요한 얼굴로 책상에 뺨을 댄 채 잠들어 있었다.

홀린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 며칠간, 목 끝에 치미는 뜨거움을 못 이기고 남몰래 여자의 모습을 훔쳐보다 발걸음을 돌렸던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확실히 더 무모한 면이 있었다. 늘 무모함이라는 낯선 명제 속에 저를 집어 던지고야 마는 여자다.

아무래도 그동안 간당간당 버티고 있던 마음이 닳을 대로 닳은 모양이었다. 아니, 안달이 났다. 손 뻗으며 닿을 거리에서 살랑거리며 제 속을 들쑤셔 대는 차현서 때문에.

가까이 다가선 여자에게선 달큼한 향내가 났다. 붉은 입술 사이로 작은 숨소리가 보드랍게 새어 나왔다. 가느다란 속눈썹은 내뱉은 제 숨에 날려 쌔근대며 팔랑였다. 헝클어져 뺨에 붙은 머리카락마저도 꼭 자기 같은 모습으로 하늘거렸다. 뒷골이 뻣뻣해질 만큼 예뻐서, 부지불식간 불손한 충동이 들끓어 올랐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한없이 고결하고 순수한 얼굴로 잠든 차현서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 이미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참을성 없고 본능에 취약한 인간인지 거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습관처럼 훑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기껏 채워 놨던 목줄을, 보란 듯 떼어 내 버린 거였다.

정말이지, 누가 더 끝을 쉽게 낸단 말인가.

혼란한 마음으로 미간을 바득 좁혔다.

어째 감정이 점점 더 추잡하고 구접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해갈은커녕 극심한 갈증만 엿같이 커져 간다. 할 수 있는 모든 후회가 연쇄적으로 뒤따라왔다. 어리석고 한심했다.

결국, 들끓는 시선을 거두며 충동만 가득한 그 공간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확연 냉정을 잃은 표정의 남자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긴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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