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64화 (6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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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는 간단했다. 애초에 관계는 거래의 연장이었고 감정은 등가로 나눈 적 없으니 그저 저 하나만 돌아서 나오면 그뿐. 표면상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현서는 새삼 그에게 있어 저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던가를 깨달았다. 그런 남자를 두고 혼자 무슨 마음을 품었던 건지. 익숙한 초라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물 한 모금과 함께 두통약을 꿀꺽 삼켰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댔다. 먼지 가득한 이곳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우기 시작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괴한의 습격 사건 이후, 꽤 오래 비웠던 집에서부터 짐을 옮겨 왔다. 얼마 안 될 거라 생각하고 간단히 용달차 한 대만 불렀는데 펼쳐 놓고 보니 꽤 많은 양의 짐이라 퍽 당황스러웠다. 혼자 살며 하나둘 늘려 온 살림이 이렇게나 많단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났다.

욕심, 욕망 같은 감정들 모두 저완 상관없는 단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많은 걸 손에 움켜쥐고도 놓치지 않겠다 아등바등, 그렇게 추하게 살아왔나 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불식간 또 무얼 욕심내고 있었던 걸까.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거리기를 한참. 적막을 깨고 별안간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아무래도 관리 사무소에서 이사 들어오는 걸 확인차 왔나 싶어 현서는 의심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선배…?”

문밖엔 뜻밖에도 준한이 서 있었다.

“넌 힘쓸 일 있으면 재깍재깍 날 불렀어야지.”

그녀는 잠시 벙찐 얼굴로 준한을 응시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사건의 연속이었던지라, 이사한단 말은 아직 그에게 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내가 모르는 게 어딨냐?”

“솔이한테 들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 네 이삿짐 정리 도와줄 고급 인력이 하나 생겼단 게 중요하지.”

결국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는 준한을 따라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집 안으로 들어선 그가 아직 엉망진창으로 널려 있는 짐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 많은 걸 다 혼자서 정리하려고 했어? 너, 힘이 남아돌아?”

“급할 것도 없는데 뭐. 천천히 하면 할 만하겠다 싶었지.”

“하여튼 고생 사서 하는 타입이야.”

준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팔을 걷어붙이며 목장갑을 꼈다. 그러고는 그렇잖아도 어떻게 옮기나 싶었던 제일 커다란 박스를 번쩍 들어 내렸다. 두꺼운 법전들과 책들이 든 박스였다. 자연스레 책들을 집어 들어 책장에 하나씩 꽂아 넣는 손길이 꼭 성격만큼 꼼꼼했다.

“이제 그 집에선, 완전히 나온 거야?”

무심히 질문을 던진 그는 계속해 책을 꽂고 있었다.

“응. 첨부터 잠깐 있기로 했던 거였는데, 뭐.”

서정혁과 자신의 사적 관계를 결코 알 리 없는 그에게 최대한 덤덤하게 답을 했다.

“이제 더는 사적으로 엮일 일 없지. 본부장님이랑은.”

아닌 척해도 대답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준한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서렸다.

“다행이네. 잘 생각했어. 그런 놈이랑 계속 엮여 봐야 좋을 거 없어. 마음 같아선 그 회사에서도 당장 나오라고 하고 싶은데….”

뭐가 다행이고 잘 생각했다는 건지, 의미 모를 말을 읊조리는 준한을 가만 바라봤다.

“애초에 더 강하게 못 말린 내 탓이 크다 싶다.”

일순, 다른 사람 눈엔 서정혁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비칠까 궁금해졌다. 눈에 뭐가 단단히 씌어 더 이상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거리가 필요했던 거다. 누군가와 함께 분이 풀릴 때까지 나쁜 놈, 서정혁을 욕할 수 있게.

“선밴, 본부장님을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 해?”

“이유 없어. 싫어, 그냥.”

논리도 없이 딱 자르는 답이 평소의 준한답지 않았다.

“그래. 감정엔 이유가 없지.”

현서는 쓴 미소를 지으며 작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제 감정의 이유를 캐묻고 추궁하던 남자의 모습이 선연해 입 안이 씁쓸했다. 어쩌면 정말로 이유가 궁금해서가 아닌, 제 못난 마음에 대한 조롱이었으리라. 아무래도 서정혁은 저와 달라도 너무 다른 곳에 있다.

“근데 너, 점심은 먹고 이러고 있는 거야?”

답이 없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준한이 설마, 의심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다시 돌아봤다.

“뭐야. 또 밥 안 먹었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밥 말고, 술 안 마실래?”

“뭐?”

“술 마시자.”

완고한 제안에 준한의 잇새에서 어이없다는 듯 허, 하는 헛숨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떨구고 아릿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어쩐지 가슴을 쿡 쑤셨다.

***

차현서가 곁에서 사라져 나가고 익숙한 악몽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아이러니했다.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 여자 덕분에 얼마간은 그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는 게.

땀에 젖은 몸을 샤워기 아래 밀어 넣은 정혁의 잇새로 거친 욕지기가 짓씹혔다. 조금 전까지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던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아무렇게나 쓸어내렸다.

“좋아해요.”

“이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마음이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본부장님이 제 앞에 나타난 이후로 지금껏 마음이 계속 엉망진창이에요. 어느 날은 가슴이 간질거리고, 또 다른 날은 미치도록 화가 나고. 그래서 외면해야겠다 싶어서 마음먹으면 또 보고 싶고, 다시 그리워 미치겠고….”

그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고백이 정혁을 뒤흔들었다.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후려 맞은 듯이 혼란스러웠다. 늘 뒷걸음질만 치던 여자의 입에서 그 순간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확실히도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려 모든 경우의 수와 감당할 몫을 계량하려는 저와 달리 차현서는 흡사 어린아이처럼 감정적으로 굴었다. 염치도, 수치도 없이 제 마음을 숨김없이 고스란히 드러내며 솔직하게 울고 떼를 썼다. 제 마음을 알아 달라고. 자기를 좀 봐 달라고.

어쩌면 그래서 더 겁이 났는지도 몰랐다. 한 번 둑이 무너지고 나면 저 또한 같은 모습으로 한없이 나약해져 버릴까 봐. 지금까지는 우스웠단 듯 더 대책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까 봐. 간신히 틀어막아 수습해 놓은 제 모든 노력들이 다 허사가 되어 버릴까 봐.

“씨발….”

초라한 감정을 사납게 짓이기며 차가운 물줄기를 껐다. 멍하니 얼이 빠져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한기에 비로소 정신이 말끔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물기도 닦지 않은 채로 배스로브를 대충 걸쳐 입고 욕실을 나섰다.

겨우 일주일. 고작 사람 한 명 나갔을 뿐인데, 고요하다 못해 괴괴하기까지 한 집 안의 풍경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건지, 불쾌감이 한계까지 치솟는다.

더는 잠도 오지 않을 게 뻔해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서재로 향했다. 갈수록 더 격렬해져 가는 것 같은 증세에 약을 미리 한 알 더 집어삼킬 요량으로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어젖혔다. 약을 털어 넣고 와인을 벌컥 들이켜며 무심코 서랍을 다시 닫으려는 순간, 낯선 모양의 액자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유리잔을 그대로 내려놓고, 액자를 꺼내든 남자의 미간이 왈칵 일그러졌다.

통째로 바뀌어 버린 액자 속 낡고 빛바랜 사진엔 죽은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제 모습, 그리고 가장 오른쪽 가장자리에 선 여동생 주희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손을 맞잡은 동생과 저 사이, 세로로 접힌 경계의 자국이 선명했다. 제 손으로 만든 경계였다. 일부러 보이지 않게 뒤로 접어 놓곤 차마 다시 펼쳐볼 용기가 없어 그대로 깊숙이 묻어 뒀었던.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모습의 동생 주희는 여전히 해사한 얼굴로 환히 웃고 있었다.

그랬지. 너는 이렇게 맑게 웃는 애였지.

미치도록 잊고 싶기도, 또 오래 기억하고 싶기도 했던 이 얼굴. 오래 잊고 있던 동생의 미소에 손등이 욱신거렸다. 아픈 악몽이 스멀스멀 고개를 짓쳐들었다.

애써 접어놨던 기억을 이렇듯 잔인하게 펼쳐 전시한 사람. 범인은 확실했다. 이 집에, 이 공간에 제멋대로 드나들었던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뿐이었다.

마른침을 쓰게 삼키는 남자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깊이 일렁거렸다.

“자책, 이제 그만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본부장님도 다 알면서도 괴로워하시는 거잖아요. 동생분 죽은 거, 본부장님 탓 아니라는 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건방지게 지껄이던 여자의 말들이 머릿속에 끈질기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제 탓이 아니라면 누구의 탓인데. 누구 때문에 그 애가 죽었는데, 감히.

고통의 여운에 들끓는 마음이 제멋대로 비죽비죽 어그러지고 있었다.

기실 본질은 두려움이었다.

괜찮은가. 할 수 있는가. 잠시나마 품었던 순진한 기대를 모두 털어 낼 수 있는가. 여자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 내고 원래의 지옥 같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아니, 자신이 불가능하다면 차현서는. 그녀는 가능할까. 언젠가 진실을 마주할 여자는, 그걸 받아들이는 게 가능은 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문, 두서없는 의식의 흐름이 이어졌으나 결국은 모든 게 원점이었다. 두려움은 결국 모든 이성적 시도를 허망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완벽한 잠식이었다.

불덩이 같은 무언가가 목에 콱 걸려 도무지 삼켜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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