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좋아해요.”
다분히 충동적인 고백이었으나 오래 예정된 고백이기도 했다. 후회는 안 했다. 반드시 해야만 했다. 이대로 놔뒀다면 언제고 제멋대로 범람해 버렸을 감정이니까.
“저, 본부장님 좋아해요.”
남은 이성을 쥐어짜 속사포처럼 내뱉은 진심에, 남자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동요는커녕 매끈한 얼굴엔 일말 실금 같은 균열조차 없다. 제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건지, 말뜻을 제대로 이해나 한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무감한 표정이었다. 아니, 도리어 종전보다도 더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눈빛만 새카맣게 쏟아져 내릴 뿐이다.
그저 내뱉고 나면 앓던 이를 뺀 듯 속이라도 시원해질 거라 생각했던 건 순전히 제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위험 수위를 찰박이던 마음이 이젠 롤러코스터를 탄 듯 심연의 바닥으로 깊이 추락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저 깊은 곳으로.
살려 달라 무섭게 뛰어 대는 제 심장 소리에 귀가 먹을 것만 같았다. 쉬지 않고 쿵쿵대는 심박이 버거워, 그녀는 난청을 겪는 사람처럼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한다니까요…?”
어이가 없어서인가. 대꾸할 가치도 없단 뜻인가. 여전히 반응 없는 그를 원망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대답이라도 좀….”
“왜.”
초조해 갈라지는 말허리를 불쑥 자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날 왜 좋아해.”
악랄했다. 그래서 한편 반가웠고, 불안했다. 더없이 감정적인 고백에 지극히 이성적인 근거를 보채며 반문한다는 게 너무나 서정혁다워서.
“당신 나 알아?”
“…….”
“알면 얼마나 알아. 우리가 알게 된 지는 또 얼마나 됐고.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를 좋대?”
무채색의 표정. 감정이라곤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얼굴의 남자가 계속해 저를 몰아붙이고 추궁했다.
“난 돈으로 차현서 씨를 샀고, 내가 지불한 돈값만큼 당신을 가치 있게 이용하고 있어서 아주 보람차. 당신은 오히려 그런 날 혐오하고 역겨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어떻게든 나한테서 도망 못 가 안달인 거 아니었냐고.”
눈앞이 막막했다. 왜 서정혁을 좋아하는지, 그 복잡다단한 마음의 과정과 사유를 대체 어떻게 설명하라는 건가.
“근데 이렇게 갑자기 대뜸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 내가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돌이켜 봐도 차현서 씨가 날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답을 기다리듯 가만 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손끝이 저릿저릿 울었다.
“이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마음이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본부장님이 제 앞에 나타난 이후로 지금껏 마음이 계속 엉망진창이에요. 어느 날은 가슴이 간질거리고, 또 다른 날은 미치도록 화가 나고. 그래서 외면해야겠다 싶어서 마음먹으면 또 보고 싶고, 다시 그리워 미치겠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감정에 휩싸인 말들이 제멋대로 터져 나갔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동한 걸 착각하는 건 아니고?”
“…하.”
“차라리 그게 더 설득력 있어. 노선 바꿔.”
“바꿀 수 있었음, 돈을 주고서라도 바꿨어요.”
“억울해 죽겠단 표정이네.”
“네. 억울해요.”
“솔직한 거야, 뻔뻔한 거야.”
“억울해요. 억울해 죽겠어요. 해 봤자 나만 상처받을 거 뻔히 아는데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단 게….”
“똑똑하기도 하지. 답도 알고 있단 소리네, 그럼.”
예정된 고백에, 예상한 결과였다. 기대라곤 눈곱만큼도 한 적 없다.
그러나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를 밀어내는 남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알알이 쓰라린 건 별개의 일이었다.
“할 말 이게 다야?”
그는 별것도 아니었단 듯 확인하며 되물었다.
“그러는 본부장님은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저도 모를 일이었다.
“제 얘기 다 듣고도 해 줄 답이, 이게 다예요?”
오기와 무모. 욕망과 갈애. 원망과 열망. 분명 살며 느껴 본 적 없는 낯선 감정들이었다. 감정의 임계점을 한 번 넘어서자, 정신 못 차리는 아이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놓고 애원했다. 자존심도, 수치도 다 내려놓은 채.
“진짜 골 때리네.”
한 발짝, 거리를 좁힌 그가 짜증으로 인상을 구겼다.
“이거 봐, 차현서 씨.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기시감 드는 반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지금 당신과 뭘 하고 싶은 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게 뭘까.
“뭘… 하자고 한 적 없어요. 원하는 거. 없어요, 본부장님한테.”
“그런데.”
“그냥 제 마음이 이렇다는 거 알고 계셨으면 했을 뿐이에요.”
“알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길래. 내 답도 뻔히 알고, 바라는 것도 없다면서 그냥 당신 속 시원 하자고 무작정 싸질렀다 이 말이야?”
“왜요? 그러면 안 돼요? 내 마음인데, 마음만이라도 좀 시원하면 안 돼요? 어차피 이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실 거면서. 본부장님은 지금껏 본부장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셨잖아요. 저도 하나쯤은 제 맘대로 해도 되잖아요.”
“허.”
짧은 헛웃음을 흘린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갔다.
“진짜 흥미 떨어지게 하네.”
싸늘히 내뱉는 낮은 읊조림에 서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뜨거운 불덩이를 그대로 삼킨 듯 꾹 누른 목울음이 샐 것만 같았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진짜 저한테 남은 거 하나도 없으실 테니까. 동정이든 뭐든.”
후드득, 어느새 뺨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을 손등으로 빠르게 훔쳐 내며 그를 똑바로 올려봤다.
“걱정 마세요. 구질구질, 질척질척. 본부장님 끔찍해하실 그런 짓 같은 거, 할 계획도 생각도 전혀 없으니까. 골 때리는 소리도 이제 그만할게요. 다 그만할게요.”
떨리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해요. 네. 끝내요, 다.”
이게 그가 떠난 빈 차에 홀로 남아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누가 보더라도 뻔한 결말의 관계였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엔딩이라면 미련은 남기고 싶지 않단 욕심이 들어서였다. 홀로 상처받고 아프겠지만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멀리 와 버렸으므로.
그저 이 답도 없는 담박질을 어떻게든 매조 지을 핑곗거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 집에선 가능한 한 빨리 나갈게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 만나기 전에 봐 뒀던 집 계약하고 왔어요.”
“도망갈 자리까지 다 봐 두고 나를 떠보셨다.”
“제 일신에 아무 도움도 안 될 감정 때문에 직장까지 잃고 싶진 않으니까요.”
“역시 잘해. 선 긋기.”
냉랭한 기운을 내뿜는 짙은 동공이 새카맣게 저를 옭아맸다. 빤히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아프고 따가웠으나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 모든 감정은 까발려졌고 더는 바닥을 칠 수치 또한 남아 있지도 않다. 이런 저를 마음껏 비웃고 조롱해도 상관없었다. 이젠 정말 끝이니까.
“그간 사적으로 살펴 주셨던 건 감사했습니다. 더는 본부장님과 업무 외 일로 마주치거나 대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앞으론 회사에서만, 사무실에서만. 업무적으로만 뵙는 걸로 할게요.”
울음 섞인 말끝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비스듬히 저를 내려다보는 그를 외면한 채 돌아서 빈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쿵,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깟 뻔한 마지막 따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더 아쉬울 것도, 미련 남을 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신기루 없이 맞이한 첫 밤은 길고도 황량하기만 했다.
***
달칵, 달칵. 전지가위를 손에 든 양재숙이 불필요하게 기다란 줄기와 가시를 거침없이 탁탁 쳐 잘라냈다.
“박신우 교수님, 제 은사님입니다. 저와는 친아버지보다 더 정이 깊은 사이고요.”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태성 리테일 최대 지분을 보유한 박신우 얘기였다. 이상한 외골수 기질이 있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골칫덩이. 태성 금 회장이 리테일을 통합해 정리하려는 이유엔 그도 없진 않았다.
양재숙은 흘긋, 안경 너머로 제 앞에 앉은 조인호의 얼굴을 확인하곤 다시 심드렁하게 손을 놀렸다.
“도무지 소문이 어떻게 난 건지 모르겠네. 혹시 나 곧 망한대?”
“태성 일로 공들이셨던 거 제가 잘 아는데, 아무래도 마음 심란하시겠다 싶었습니다. 남 일 같지가 않아서요.”
“왜 남 일 같지가 않을까. 우리 남인데.”
“양 이사님이랑 저랑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가 같지 않습니까.”
“그랬나?”
“박 교수님 발언권이면 골드스톤에서 컨소시엄 구성하는 거 막을 수 있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슬쩍 떠봤더니 교수님께서도 JK에 호의 가지고 계시고요.”
“어쩌지. 알겠지만 난 그쪽에 별로 내줄 게 없어. 내가 고작 컨소시엄 구성 못 막아서 발등에 불 떨어진 걸로 보여?”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질문에 조인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막을 수 있으셨음 막으셨을 것 같은데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할 사태를 일부러 만들진 않으실 거 아녜요.”
“이번 일로 인호 씨 상처 많이 받았나 보네.”
정곡을 찌르는 조인호의 말을 들은 양재숙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버지와 형에게 제대로 버려진 것도 모자라 그나마 쥐고 있던 자리까지 모두 잃은 조인호는 그야말로 빈털터리 신세였다.
“그래서. 나랑 손잡아서 인호 씨가 얻는 건?”
“아시겠지만 이제 와 이 처지에 뭘 더 욕심내겠습니까. 특별히 바라는 거 없고 전 이제 그냥 하나면 됩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지, 말을 잇는 조인호의 눈썹이 형편없이 들썩였다.
“혼자만 지옥에 떨어질 수 있나요. 서정혁이랑 차현서. 그것들 둘 같이 데리고 가야죠.”
기어코 양재숙의 잇새에서 희미한 웃음이 샜다.
“그러네. 우리가 원하는 게 같았었네.”
그녀의 손끝에서 시뻘건 장미 꽃봉오리가 댕강 잘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