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62화 (62/115)

♬(62)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정혁은 내 눈꺼풀을 꾹 내리감은 채 부러 그녀와의 대화를 단절했다. 마주하면 기어코 혼란스러워지고야 말 감정을 인정하기 싫었다. 시시각각 저를 쥐고 흔드는 차현서의 횡포를 더 받아 줄 용의가 없단 뜻이었다.

도착했으나 무슨 의미인지, 미동 없이 고집스레 앉아 있는 그녀를 남겨 둔 채로 홀로 차에서 내렸다. 뒤통수가 따끔거려 몇 번이고 돌아보고픈 충동을 억제하면서도 어렵게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주머니 속 진동이 요란히 울려 댔다. 발신자는 또다시 미셸이었다. 홍콩에서 함께 일했고 지금껏 오래도록 제 편에 선 비즈니스 파트너. 정혁의 결정을 늘 침묵으로 지지하던 그녀가 평소답지 않게 이토록 조급히 구는 건 골드스톤 내부의 분위기가 정말로 심상치 않단 또 다른 증거였다.

- [방금 이사회 취소됐어. 앤더슨도 일단은 뒷발 빼놓는 눈치고.]

정혁은 목과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기며 위스키 병뚜껑을 돌려 깠다.

[아주 대단한 결심들 하셨네. 원하는 게 뭐래, 대체 어떻게 박살 나고 싶으시대.]

- [하…. 라이언. 이건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피할 구실을 만드는 거잖아. 그쪽에서도 이 전쟁을 끝낼 명분이 필요하니까. 모르겠어?]

[그럼 진작 대가리를 박았어야지.]

- [아무리 바지라지만 래리도 체면이 있지, 그게 어디 쉬워? 그리고 당신도 지금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야. 막말로 래리가 이대로 눈 돌아서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당신도 최소 치명상이야. 정작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앤더슨이 래리가 아닌 당신 손을 들어줄 것 같아? 오히려 같이 세워 놓고 총질이나 안 하면 다행일걸.]

[잘됐네. 치명상 입은 김에 자살 폭탄 테러나 해야겠어.]

- [라이언!]

참다못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터뜨리는 미셸의 목소리가 귓전을 강강히 울렸다.

정혁은 가득 채운 술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알코올을 따라 붓는다.

- [앤더슨이나 래리나, 일단 당신이 직접 와서 해결 보길 원해. 그러니까 복귀해. 거기서 농땡이 그만 치고 뉴욕 돌아와.]

[가면.]

- [네가 완벽히 자기 사람이라는 거 확인시켜 주면 보장하겠대. 차기 후계자 자리까지도.]

[까고 있네. 본인 목 간수나 잘하라고 해.]

욕지기를 짓씹으며 다시금 빈 술잔을 채웠다.

발터의 부추김에 그간 잃었던 경영권을 되찾으려던 래리는 정혁의 역공으로 되레 그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해 명분을 잃자 허울뿐이던 공동 경영자의 직함마저 우스워져 버린 상황이었다.

발터의 경영 이사 해임에 이어 본인에게도 점점 더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궁지에 몰린 래리는 아예 대놓고 정혁을 저격해 이사회를 열었다.

안건은 아시아 총괄 본부장 라이언 서에 대한 징계 건이었다. 사유는 지난해 중국에서 대규모의 철강 회사를 인수하며 불법 로비 정황이 금융 당국에 적발되어 수십 억의 과징금이 발생한 데에 따른 책임 추궁.

중국 시장에서 과징금을 맞는 일은 꽤 잦았다. 특히나 중국 정부는 미국, 월가의 자본이 침투하는 걸 반기지 않는 데다 규제 기준이나 조건마저 제 입맛대로 해석하기 일쑤여서, 처음부터 투자 예산 목록에 아예 과징금을 위한 여유 자금 리스트를 세워 놓고 들어가는 곳이었다.

일반적 합리성, 경제성보단 공격적 선점과 물량 공세, 이른바 ‘꽌시’라 불리는 비합리적 로비 등이 더 우선되는 특수한 시장인 거였다.

다시 말하자면 과징금 건으로 라이언을 징계 붙이겠다는 것 자체가 억지였다. 게다가 이미 1년도 더 지난 일을 이제 와 책임을 묻는 것도 우스웠다. 의도 뻔한 트집. 어이없고 부질없는 시비.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래 보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누가 봐도 이 우스운 짓거리의 뒷배에 칼 앤더슨이 있다는 거였다. 단순히, 늘 있어 왔던 사내 정치 싸움이 아니라, 이 모든 게 실권을 쥔 앤더슨의 의지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로써 지난 10여 년간 라이언 서를 이용해 먹을 만큼 먹은 앤더슨이 이제 곧 라이언 목을 직접 치지 않겠냔 호사가들의 말들이 일부 사실로 증명된 셈이었다.

결국 앤더슨은 처음부터 검은 눈의 이방인에게 후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때마침 마음을 바꾼 래리와 탐욕스러운 발터를 바람잡이 삼아, 어느새 거대하게 몸집을 불리고 이젠 정말로 제게 위협이 될 만큼 커져 버린 서정혁을 잔인하게 쳐 낼 계획이었을 테고.

정혁도 모르지 않았다. 충분히 계산했었다. 언제고 앤더슨이 제게 총구를 겨누면 어떻게 반격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누누이 대비를 했었다.

왜 가만히 있었겠는가. 밑바닥, 진창에서부터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었던 그였는데. 각종 음모 술수와 배신이 난무하는 이 정글 판에서도 지독하게 버티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생이었는데.

- [그래. 이참에 싹을 밟자, 라이언. 그래야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도 쉽게 딴생각을 못 하지.]

생존은 눈물겨웠다. 방어보다는 공격에 능한 제 장기를 잘 알아 무기로 삼았다. 뭐든, 눈앞에 알짱거리는 것들은 제 발밑에 꿇려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악랄한 승부욕 탓도 있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건 당연했고, 누군가 작은 반동의 기미라도 보이면 선수를 쳐 그 싹을 짓밟고 숨통까지 끊어 놨다.

그렇게 피해자보단 가해자가 되길 원했고, 비참해지기보단 악랄해지는 걸 택해 왔던 삶이었다. 그게 오랜 시간 깨우친 그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철저했고 무참했으며 가능한 한 잔인해야 했던.

- [늘 하던 대로, 너 잘하는 거 보여 주라고.]

하던 대로. 잘하는 것.

그러나 이상했다. 그게 무언지 잘 알면서도 돌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차현서로 기인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지금의 혼란이 모든 사고를 마비시킨 거였다. 그렇게나 악착같던 생존 본능은 희미해진 대신 저 밑, 진창의 작고 하얀 여자 하나만 뇌리에 또렷할 뿐이다.

[그다지. 전투력이 안 생기네.]

아무래도 제 생존과 안위 따위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 배부른 과부하였다.

- [그럼 평화롭게 땅 짚고 헤엄이라도 치든지.]

[그것도 별로. 절충, 타협, 휴전. 다 안 해. 종전은 그쪽에서도 생각 없을 거고.]

- [하…. 좋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항복을 하든 자살 폭탄 테러를 하든 일단 돌아와. 뭐든 돌아와서 생각하자고.]

라이언의 성질머리를 모르지 않는 미셸이 긴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듯 말했다. 연거푸 술을 들이켠 정혁의 잇새에서 단호한 대답이 나갔다.

[안 가.]

- [뭐?]

미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이제 막 발붙이기 시작했어. 여기서 벌여 놓은 일이 얼만데 하다 말고 거길 가.]

- [농담이지?]

[아니. 도합 백 퍼센트의 진심이야.]

- [맙소사…. 라이언! 미쳤어?]

그녀는 기가 찬 듯 정혁을 비난했다.

그와 동시에 현관문 쪽에서 삐- 들려오는 기계음과 함께 인기척이 났다. 바닥에 드리워진 자그마한 그림자가 제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잔에 기울여 채우던 유리병을 내려놓고 눈꼬리를 가늘게 떴다.

-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지금 당신 목숨 줄이 달린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당신 거기 가 있는 동안 이 사달이 난 거라고. 근데 안 오겠다고? 대체 뭐가 문제야?]

타박타박, 입술을 앙다문 차서현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섰다.

- [처음부터 이상했어. 솔직히 말해. 도대체 당신 한국엔, 왜 간 거야? 그 코딱지만 한 시장에서 뭘 얼마나 먹겠다고? 다른 이유 있지? 뭐야? 거기서 죽은 가족들이라도 다시 만났어?]

아슬아슬하게 물기를 머금은, 붉어진 눈으로 저를 원망스레 올려다본다. 마주한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아무것도, 제 속의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으려는 듯한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눈빛이었다. 낯설었다. 그래서 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어져 버렸고.

“할 말 있어요.”

짧게 내뱉는 목소리에 설움이 잔뜩 담겼다.

-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이미 수화기 너머, 미셸의 목소리 따윈 귀에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맞아. 다른 이유 있어.]

시선은 오롯이 제 턱 밑에 아른대는 새하얀 여자의 얼굴에 가 붙박여 있었다.

- [허, 무슨 이유가….]

[그러니까 미셸 당신이 도와줘야겠어. 내 취향 제대로 파악하는 거 당신뿐이잖아.]

- [라이언.]

[급한 용건 끝났으면 나중에 통화하자. 지금 누가 날 전화 안 끊으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어서.]

툭. 끊은 핸드폰을 바 위에 올려 던지고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마셨다.

“누구예요?”

“누구라고 말하면 알아?”

“미셸 장, 홍콩에 계실 때 꽤 본부장님이랑 진한 스캔들까지 났던 거 모르는 사람 없던데요.”

훅 들어온 헛소리에 어이가 없어졌다. 정혁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조였다.

“우리 능력 좋은 차 팀장님, 스토킹 능력도 아주 뛰어나시네.”

또 삐딱한 말이 여과 없이 새어 나갔다. 와중에도 이 작고 하얀, 뭐라도 씐 것처럼 제 눈에 더없이 예뻐만 보이는 이 여자의 얼굴이 밉고 또 미워서.

“할 말 있어요. 제 말 같은 거 더 들을 기분 아니시겠지만, 전 꼭 해야겠어서요.”

“맞아. 내가 오늘 기분이 아주 엿 같아. 그러니까 내 눈앞에 알짱대지 말고 그만 들어가 줬으면 해.”

다소 붉어진 그녀의 뺨이 씰룩거렸다.

“꼭 지금 해야 할 말이에요. 아까 다 못다 한 말요. 아깐 혼자서 통보만 하셨잖아요.”

“피곤해. 2차전 할 기운 없어.”

“본부장님.”

“또 두 번 말하게 하지.”

“저도 두 번 말했어요. 할 말 있다고.”

그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하얗게 질리도록 짓깨물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옆에 놓인 술병을 통째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 하는 짓이야?”

기가 막혀 주머니에 깊이 손을 찔러 넣으며 인상을 썼다.

“맨정신엔 말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맨정신에 못 할 얘기면 하지 마. 듣기 싫어.”

상상이나 할까. 지금 자신이 어떤 기분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지. 무슨 혼란으로, 어떤 고뇌로 제 앞에 서 있는지를.

감당 못 할 격랑을 맞은 심장이 삐그덕, 앓는 소리를 낸다. 애정과 증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기꺼이 증오를 선택했으리라.

결국 고개를 먼저 돌려 시선을 피했다. 비겁한 외면이었다.

“듣기 싫어도 들으셔야 해요.”

불현듯, 차분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회피를 택한 그의 발걸음을 옭아 붙들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그 순간.

“좋아해요.”

그 또렷한 검은자위를 마주한 순간,

“저, 본부장님 좋아해요.”

겨우 붙들고 있던 마음의 결계가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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