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61화 (61/115)

♬(61)

캐묻듯 집요한 시선이 쏟아졌다.

“인간이 참 그래.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어떻게든 핑계 거릴 만들고 합리화하면서 자기 항변하기 바빠. 그게 그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 다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더라고. 정작 당한 사람은 아직도 치를 떠는데,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를 용서해 버려.”

“…….”

“내가 그래서 사람을 안 믿어. 눈앞에 보이는 숫자나 믿으면 모를까. 근데,”

타박타박. 시선을 고정한 그가 그녀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가깝게 걸어왔다.

“차현서 씨한텐 혹시나 했어. 어쩐지 좀 다른 사람 같단 생각이 들어서. 세상 무서운 것 모르고, 겁대가리 없고, 건방지고. 뺨 맞고, 칼 맞아도 죽을 날 받아 놓은 시한부처럼 굴질 않나. 자기방어 같은 건 도통 생각도 안 하는 사람 같길래.”

“…….”

“정말 혹시나 했다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현서의 턱을 치켜들었다.

“근데 역시 우린 참 안 맞는 것 같아, 차현서 씨.”

새까만 눈동자에 담긴 분노와 경멸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그를 마주했다.

도대체 이 남자에게 어떤 불행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다. 어떤 불행이 이 남자의 삶을 갉아 먹은 건지, 이토록 나약한 악마의 가면을 쓰게 한 건지 궁금했다.

“새삼 너무 관대했지, 내가.”

“…….”

“나사 하나 빠진 놈처럼.”

“무슨 뜻이에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마도 다음에 이어질 남자의 말이 뻔히 예측이 된 거였다.

“사적인 관계는 이쯤 정리하잔 뜻이야.”

혼란스러운 이야기에 피가 식고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미간을 꾹 조인 현서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을 잃었다. 여전히 제 턱을 바짝 쥐어 올린 채 코앞에서 느른히 뱉는 남자의 목소리가 현실감을 잃게 했다.

“갑자기…. 왜요?”

끓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이유를 물었다.

“흥미 잃었어.”

짧은 대답과 함께 턱 끝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거짓말.”

“상사에 대한 신뢰도가 영 없네.”

“통제 불가할 정도로 꼴린다, 어쩐다 하셨던 게 엊그제 일이에요. 그 이윤 말이 안 돼요.”

“말이 안 돼서 미안하지만 사실이야. 파악했겠지만 난 꽤 참을성 없고 변덕스러운 인간이고.”

“그러니까 왜요. 왜 갑자기 변덕이 나셨어요? 그걸 설명하셔야죠. 적어도 이런 말을 하시려거든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죠.”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질문과 원망 세례에, 그는 기막히단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나한테 이유까지 고지할 의무가 있었나? 자꾸 본인이 갑질하다 잊었나 본데, 내가 갑이야.”

“그래서 지금, 저한테 갑질하시겠단 거예요?”

“아니. 내 기준, 위약금 조항 없는 의사 철회는 갑질의 카테고리에 포함이 안 돼.”

“뭐든 다 돈으로만 판단하세요?”

“차현서 씨 오늘 나 처음 봤어?”

무감한 시선이 버겁게 일렁이던 마음을 사납게 할퀴고 지났다.

“저한테…. 어떻게 이러세요?”

결국 목소리가 떨려 터졌다. 말도 안 될 만큼 멍청하고 수치스러운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제 마음 따윈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을 남자의 눈꼬리가 서늘하게 가늘어지고 있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그가 희뿌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네가 뭔데.”

사납게 되묻는 말에 대꾸할 답이 없어졌다.

내가 뭐라고. 서정혁이 내게 뭐라고.

이 위험한 관계를 시작한 이래로 매일, 수천, 수만 번도 더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결말이 뻔한, 끝이 예정되어 있던 시작이었으니. 이 순간이 올 게 두려워 늘 뒷걸음질 치고 몸을 움츠려 스스로를 방어하려 노력했던 거였다.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닥치자 모든 준비와 앞선 걱정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머릿속이 백지였다.

낯설지 않은 이별. 익숙한 관계의 배반 앞에, 이런 초조한 마음으로 마주한 건 처음인 듯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논리적 대화는 고사하고 눈부터 질끈 감고 떼를 쓰고 싶어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짓깨물며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적어도, 파트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그런 거….”

“그래. 서로 합의하에 즐기는 잠자리 파트너, 그거.”

얄미우리만큼 명확한 발음과 듣기 좋은 음성이 말허리를 잘라 왔다. 부적절한 사적 관계를 단번에 요약해 주는 그 단어를 기어코 제게 주지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합의가 깨졌단 상황 고지에 왜 이런 감정적 질문이 튀어나오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는데, 난.”

“아뇨. 지금 감정적인 건 제가 아니라 본부장님이죠. 도대체 뭐에 핀트가 나가서 갑자기 이러시는 건진 모르겠지만요.”

추측건대 아무래도 그의 트라우마, 가장 연약하고 아픈 곳을 건드린 게 기제가 된 듯싶었다.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의 약점이 죽은 여동생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예고도 없이 이러시는 거, 너무 유치해요.”

안다. 유치하게 그를 힐난하는 건 도리어 저였다. 한심하리만큼 감정적인 호소인 것도 안다. 그는 기막히단 듯 헛숨을 터뜨렸으나 그만큼 초조하고 절박해서였다. 어떻게든 이 관계의 끝을 미뤄 보고 싶단 간절함에 매초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어서.

“비겁하고 치사해요.”

“핑계 김에 입 터졌네.”

제 맹렬한 비난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버티고 선 남자가 그저 원망스러워졌다.

“그만하자면 누구보다도 반가워할 줄 알았더니.”

나쁜 놈.

“거부 반응이 너무 격하잖아, 지금. 기횐데, 도망을 쳐야지. 당신 틈만 나면 도망칠 기회 엿보느라 안달이었잖아. 그 기회 주겠다니까? 서로 즐기자고 시작한 일에 왜 혼자 멋대로 진지해져선 난리야?”

지금 핑계 김에 입에 칼 문 사람이 누군데.

“질척대고 뒤끝 긴 스타일은 아닌 걸로 아는데. 왜, 실컷 역할 몰입했는데 내가 산통 깨서 하는 항의인 건가? 차현서 도도한 자존심에 금이라도 갔어?”

한마디 한마디, 따끔거리는 말들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원망스레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사람처럼 빈정거리는 서정혁이 미웠다. 또 부러웠다. 그만하자, 그저 이 한마디 말로 모든 관계와 감정을 정리해 버릴 수 있다는 게.

“본부장님은 모든 게 다 참 쉽네요.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너무 억울해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겐 시작도 끝도, 어느 것 하나도 쉽지가 않았노라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모든 일들이 죄 어렵고 버거워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인다고.

겨우 울음을 참아 삼키느라 새된 목소리가 갈라져 나갔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는 지켜 주셔야죠. 물론 상도 없이 장사하는 분이란 건 알지만….”

“알면 바라지 말아야지. 대가 없는 존중과 예의가 나한테 무슨 이익이 되는데.”

“그럼 그 밑도 끝도 없는 자기 학대는 본부장님께 무슨 이익이 되는데요.”

“계속 까불래?”

위압적 목소리에, 결국 하려던 말을 꾹 누르며 입술을 질근댔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이야길 하는 진짜 이유가 뭐냐고, 동생 이야긴 갑자기 왜 또 꺼낸 거냐고, 끝까지 그를 추궁했다간 정말로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날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였다.

고집스러운 침묵이 꽤 길게 이어졌다. 그걸 먼저 깬 건 서정혁이었다.

일순, 제게 흥미를 잃었다던 그의 말이 거짓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자극만을 좇으며 살아온 그의 인생엔 이런 작은 정적도 참기 힘들 만큼 지루한 것일 수 있었다, 충분히.

“말장난 이쯤 해. 난 지금 차현서 씨랑 사적 관계를 끊고 싶은 거지 돈 벌어다 줄 유능한 직원까지 잃고 싶은 건 아니니까.”

“본부장님.”

“왜요, 차 팀장님.”

감정 한 자락 남아 있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댔다. 그 바람에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스멀스멀 눈자위를 적시며 비어져 흐른다.

“할 말 더 있어요?”

입속 살을 질근거리며 손을 말아쥐었다.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초라한 기분도 모자라, 터지려는 진심을 애써 꾹꾹 눌러 감춘 보람마저 잃고 싶진 않아서였다.

“갑시다, 그만.”

얼음장 같은 강바람이 두 뺨과 코끝을 사정없이 스쳐 지났으나 예고 없는 날벼락을 맞은 가슴께엔 도리어 열이 피어올랐다.

야멸차게 저를 스쳐 지나는 남자에게서 알싸한 담배 향과 묵직한 향수 냄새가 섞여 여운처럼 퍼져 나왔다.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눌러 훔쳤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향해 앞장서 걷는 그의 너른 어깨가 어느새 저 멀리서 가물거렸다.

현서는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선 채, 꾹 말아쥐었던 손가락을 펴 제 손바닥을 살폈다.

빈손이었다. 쥔 것이 없었다.

이제 정말, 제 손에 남은 성냥이 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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