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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60화 (60/115)

♬(60)

아버지를 배웅하고 다시 차에 오른 현서는 정혁의 굳은 옆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연히 제 뒤까지 쫓아오신 볼일이 뭐예요?”

그에게 아직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단 사실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제 사생활마저 완벽히 저당 잡혔단 억울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도 서정혁은 여전히 차현서라는 본인 소유의 물건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고 있구나 싶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 건만 속이 쓰렸다. 언제 발 디딜 틈이나 내보이던 남자던가. 가진 것 많은 그에게 저는 그저 잠시 잠깐 스칠 소모품일 뿐.

“아버지가 딸을 아주 애틋해하시던데.”

“네?”

시커먼 차창 밖을 응시하던 정혁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보자 고개를 돌린 그가 낯선 눈동자를 맞춰왔다.

“원망스럽지도 않나 봐. 당신 그 빚 다 아버지 때문이었으면서.”

화가 난 건지, 그저 또 피곤할 따름인 건지. 좀체 속을 알 수 없을 표정으로 앉은 그의 심기가 의아했다.

“당신한테 짐 다 지우고 혼자서 도망치듯 사라진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어.”

“…….”

“안 밉냐고.”

아까부터 그가 왜 제 아버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제 초라한 과거며 구질구질한 사연이며 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거면서, 왜 불쑥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당최 그 의도도 파악할 수가 없었고.

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가 답을 할 때까지 거둬지지 않을 기세로 고정됐다.

“미워도 아버지니까요.”

당연하고 진부하지만 사실 그대로의 속내를 답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애증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미치도록 버리고픈 짐이었고 진저리 나게 벗어나고 싶었던 진창이었지만, 정작 다시 아버지를 마주했었을 때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

미워하려 노력했고 끊어 내려 안간힘을 썼어도 결국 어찌하지 못했던, 천륜. 그러니 제 모든 방황과 체념은 지극히 비이성적이고도 감정적인 그 단어 하나로만 설명이 가능할 따름이었다.

“아버지니까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수 있다?”

“그 무슨 짓들 전부 다, 저 때문에 벌이셨던 걸로 알아서요. 그러니 저라도 아버질 받아들여야죠. 게다가, 굳이 저까지 보태지 않아도 이미 아버진 당신 죗값 다 치르신 것 같고요.”

“누가 그러는데.”

코웃음을 치며 말허리를 자른 그의 표정이 소름 끼치게 차가워졌다.

“혹시 당신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자기가 치러야 할 죗값 이미 다 치렀다고.”

현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들을 이해하려 미간을 바짝 좁혔다. 차갑다 못해 얼음장처럼 굳은 안색에선 미세한 분노가 새고 있었다. 좀체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서정혁이 이렇게까지 분노를 표출하는 걸 본 일이 있던가. 점점 더 의아한 기분이었다.

“참 모를 일이지.”

“…….”

“누군가에겐 평생 용서 못 할 짓을 저지른 악마인데, 또 어떤 누군가에겐 이렇게 애틋하고 안쓰러운 아버지일 수 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실종됐고, 스무 살 때 다시 만났다 그랬나? 물론 그 이후에도 지금껏 죽은 사람이었던 아버질 제대로 마주할 시간은 없었을 거고. 그럼 차현서 씬,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있기는 해?”

알아야 할 게 더 있느냐 되묻고 싶었다. 기실 아버지의 과거와 사정 따위 더 알고 싶단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 이제 와 그녀에겐 다 지난 일일 뿐이다.

“궁금하지 않아? 딸 앞에서 한없이 자상하고 애정 넘치는 딸바보가 그 가면 벗어 던지면, 진짜 어떤 모습의 인간이 되는지.”

그 또한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존재를 제 모든 불행의 기제라 믿을 뿐이었다. 그의 진짜 모습, 진짜 이야기를 곱씹어 제가 얻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되레 더 또렷해지기나 할 비참함만 가중될 뿐.

“네. 전혀요. 하나도 안 궁금한데요.”

딱 자른 그녀의 대답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런 얘길 왜 하세요? 본부장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저희 아빠한테 관심을 보이시는지가 더 궁금해요, 전.”

지독하리만큼 경제적 인간인 서정혁이 어디 하나 의미 없는 말과 행동을 할 사람이던가. 그저 자신이 소유한 차현서에 대한 관심의 연장이라고만 보기엔 어딘가 지나치게 흥분한 면이 있었다. 물론 이마저도 다 혼자만의 착각일지 몰랐지만.

“그냥.”

침잠하듯 낮은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싸늘하게 울렸다.

“뭐랄까. 아버지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본 주제에 그저 피 섞였단 이유 하나만으로 감정적으로 구는 꼴이.”

“…….”

“토할 것 같아서.”

별안간 악랄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 내는 남자의 양쪽 눈동자를 번갈아 살폈다. 어렴풋이 숨겨 둔 그의 속내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경멸과 멸시. 그리고 분노.

어쩌면, 서정혁은 제게 지금까지의 모든 게 다 착각이란 걸 자각시켜 주고 싶은 게 아닐까. 부질없는 꿈에서 이제 그만 깨어나라는 신호 같은 것 말이었다.

“말 참 못되게 하시네요. 그냥 제가 역겨우면 역겹다고 말씀하세요, 괜히 아빠까지 들먹이면서 사람 초라하게 만들지 마시고요.”

“효심 한번 눈물겹다, 아주.”

“…하. 이렇게 빈정거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세요?”

“근데 당신 아버지도 알아? 자기 딸이 뭘 대가로 나한테 팔려 왔는지.”

“본부장님.”

“아, 알면 날 죽이려고 들겠군. 보아하니 딸 사랑이 어지간하신 것 같던데.”

때마침 차가 낯선 산길의 도로변에 멈췄다. 정혁은 코웃음을 치며 거침없이 차 문을 열어젖혔다. 완고히 거둬 가는 시선이 더 이상 저와 마주 보기도 싫단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현서는 답답한 듯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올리며 차창 밖을 응시했다. 인적은커녕 가로등 하나 없는 창밖의 풍경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낯선 장소였다. 분명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여기, 어디예요?]

운전대를 쥔 레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백미러 속에서 마주친 레오의 얼굴이 썩 좋질 못하다. 레오는 직접 내려 물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창밖으로 짧은 턱짓만 했을 뿐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 너머 흐릿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두 뺨을 매섭게 후려치고 지났다. 사방을 둘러싼 나무들과 차갑게 얼어붙은 흙바닥.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도심과 꽤 떨어진 것 같은 교외의 풍경이었다.

현서는 어둠 속, 그가 등을 지고 멈춰 선 곳까지 타박타박 걸었다.

도대체 여기엔 왜 온 건가. 오늘따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뿐인 제 앞의 서정혁만 바라보며 걷던 현서의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희미한 달빛에 어둠이 걷히고 물안개에 잠식당한 호수가 눈앞에 드러났다. 잡초만 무성한 풀밭 위,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비스듬히 선 남자의 뒷모습이 어딘가 처연했다.

“여기 왜 온 거예요?”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반쯤은 얼어 버렸을 시커먼 호수 한가운데만 응시할 뿐.

“본부장님.”

어둠에 잠긴 겨울 호수. 괴괴하고 어둡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한 주변의 풍경에 그녀는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현서를 돌아본 그가 잇새에 담배를 물며 고개를 슬몃 기울였다. 타악, 잠깐 켜진 라이터 불에 그의 매끈한 이목구비가 또렷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꼭 성냥팔이 소녀의 신기루 같았다. 제 손에 남은 성냥이 이젠 얼마이던가. 현서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으로 손가락을 꼭 말아 쥐었다.

“여기. 저 물에다 세 사람을 뿌렸어, 내 손으로. 제일 먼저는 여동생, 다음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까지.”

느른히 담배 연기를 내뿜은 그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의도치 않게 가족묘로 이용하는 곳이야.”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에 암순응을 마친 동공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할 말을 잃어 붉은 입술만 달싹이자 그가 관찰하듯 제 얼굴을 응시해 온다. 꼭 미끼를 던져 놓고 물기만 기다리는 악랄한 낚시꾼처럼.

결국 그녀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장난 같은 말을 내뱉었다.

“땅 주인이 알면 기겁하겠네요.”

“응. 그래서 샀어. 시세의 두 배나 주고. 알잖아. 내가 그렇게 경우 없는 새낀 아니야.”

다시 말문이 막혀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여긴, 왜 왔는데요?”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

정말이지 쉴새 없이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남자라, 현서는 기막힌 헛숨을 짧게 내뱉었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내내 계속 그가 이상했던 이유를.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던 그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근데 빈손으로 왔어요?”

“뭘 들고 와야 하는데.”

“아니, 제사상은 못 올려도, 하다못해 꽃이라도….”

“이미 죽은 사람한테 뭐가 더 필요해서. 죽은 사람 아니고 산 사람 위안하자고 가져오는 그거, 누굴 위한 꽃이야. ”

말을 말아야지. 현서는 얄미운 말만 골라 내뱉는 그를 흘기며 이마를 짚었다.

“저번에 어머니 미국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 10년 전에 유골 가지고 돌아와서 여기 다시 뿌렸어. 살아생전에도 워낙 고국만 그리워하다 가셨던 분이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 노릇 좀 해 봤지. 대체 이 빌어먹을 땅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렇게 밤낮 한국, 한국, 노래를 부르셨는지. 난 대한민국이라면 아주 치가 떨릴 만큼 끔찍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그 얼굴이 자못 쓸쓸해 보였다.

“…왜요?”

“나한텐 여기가 생지옥이었어. 동생 죽던 날부터.”

자연스레 시선이 상처투성이인 그의 오른손으로 떨어졌다. 늘씬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끝에서 하얀 담배 연기가 뽀얗게 퍼져 나간다.

“동생분이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전 자세한 사연은 잘 모르지만요.”

문득, 그 커다랗고 단단한 손을 맞잡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 아직도 동생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란 자책에 잠식당한 그를 위로하고 싶은 거였다.

“자책, 이제 그만 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분명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 떤단 타박이나 돌아올 게 뻔했지만, 그냥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당신 탓이 아니라고.

“이제 그만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본부장님도 다 알면서도 괴로워하시는 거잖아요. 동생분 죽은 거, 본부장님 탓 아니라는 거.”

평생을 벌 받는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았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악마의 가면을 쓴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버티는 일이 도리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뻔뻔함을 가장한 미안함과 악랄함을 방패 삼은 그 여린 속살이 얼마나 참담하게 뭉그러지는지. 그렇게, 차마 용서를 구할 수도 없을 만큼의 회한으로 스스로를 어떻게 나락까지 떨어뜨리는지를.

“내 탓이 아니면.”

음산히 가라앉은 침묵이 깨지고, 서늘한 질문이 귓전에 내리꽂혔다.

“그럼, 내 동생은 누가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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