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약속이 있어서 나가요. 좀 늦을지도 모르구요.」
어디냐 묻는 제 메시지에 현서가 보내온 답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정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레오는 흘긋 백미러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냥 가시죠. 몸도 안 좋으신데.]
차문엽이 사무실에 다녀간 뒤로 최근 뜸했던 환상통 증세가 심하게 나타났다. 것도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이른 시각에. 비서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는 공휴일이라 다행이었지,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월요일 아침 골드스톤 코리아 차트 그림이 아주 볼 만했을 거였다.
차문엽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평소 먹던 양의 두 배의 약을 먹고 나서야 통증이 멎은 정혁의 얼굴을 본 레오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졌다. 핏기없이 차게 식어 덜덜 떠는 그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가 않아서.
화려하고 오만한 가면 뒤에 가려진, 악몽에 시달리며 실체 없는 고통에 발작하던 라이언 서의 진짜 모습을 오랜만에 목격한 소감은 꽤나 끔찍스러웠다. 묻어 뒀던 불길함이 자연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래도 결말이 예견된 불행으로 치닫는 느낌이라 불안했다.
[불안하셨겠지.]
차창 너머로 시선을 옮긴 정혁이 낮은 혼잣말을 읊조렸다.
차가 세워진 길 건너의 카페 안엔 현서와 마주 앉은 차선엽이 초조한 표정을 숨기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문엽이 다녀가고 난 뒤 마음이 불안해진 그가 기어코 딸을 찾아온 거였다.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이냐며 뻔뻔히 악을 쓰던 악마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제 딸 앞에선 세상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로 앉아 있는 꼴이라니. 못 견디게 역겨웠다.
[무슨 생각 하세요?]
망설이던 레오가 답답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기묘하리만큼 감정 동요가 없던 라이언 서의 감정이 지금은, 매우 요동을 치고 있단 사실 말이었다.
[못다 한 계산. 패인 분석. 뼈저린 반성. 지금 이게 얼마나 좆같은 상황인가, 면밀한 상황 파악. 뭐 그런 것들.]
혼잣말하듯 낮게 뇌까리는 그의 시선은 못박인 듯 창밖을 향해 고정됐다.
[투자금 회수도 불가능할 만큼 너무 멀리 와 버렸는데, 밸류 업은커녕 그나마 담보 잡은 자본마저도 하루하루가 우습게 잠식당하고 있는 꼴이라. 이게 뭔 개망신인가 싶네.]
정혁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쓰게 웃었다. 그간 무모했던 제 행동을 인정하고 후회한단 뜻이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늦었단 건 핑계였고 애초에 수습할 생각도 마음도 없었던 게 팩트야. 너절한 변명을 해 보자면 손해야 막심하겠지만 감수 못 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고, 이력에 스크래치 남더라도 그냥 나 하나만 모르는 척 눈 딱 감으면 그뿐이겠다 싶었어. 그럼 내가 원하는 거, 내가 가지고 싶어 안달 난 거 그거 완전히 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네. 그렇게 자신하셨었죠. 제 말도 다 무시하시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우습게 봤어. 복수? 그게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 단어야. 그딴 건 평생 남 탓이나 하면서 자기 인생 조진 루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지. 내 딴엔 쿨한 척이 하고 싶었던 거야. 나란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인지, 주제 파악도 못 하고선.]
예견된 자조에 레오는 이마를 짚었다. 뭐든 객관화 하나는 피눈물 날만큼 잔혹하게 해내고야 마는 라이언의 특장점이 발휘된 거였다.
[나 혼자서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무시를 하네 용서를 하네, 혼자 원맨쇼를 했어. 정작 차선엽 저 새끼는 일말의 죄책감도 하나 없이 저렇게 멀쩡한데.]
[예상하셨던 일이잖아요.]
[못 했어. 참회까진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갖고 살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전제부터 틀렸을 줄이야.]
[…….]
[사람 아니야, 저 새낀.]
내뱉은 냉기가 유리에 닿아 결로처럼 응집됐다.
[그래도 차현서 씨에 대한 과도한 관심, 여전히 별개이신 거잖아요?]
레오는 다시 정혁의 진심을 확인하려는 듯 되물었다. 부정하지 않고 눈썹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남자의 새카만 동공이 싸늘했다. 답은 충분했다.
[이 엿 같은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세 가지 정도가 있겠지. 첫째, 계속 이렇게 한쪽 눈 감고 모르는 척한다. 이 경우 피상적 내 욕망은 충족되겠지만 결국 내 속이 썩어 들어갈 거야, 지금처럼. 그래서 생각한 둘째. 저 악마 새끼에게 최대한 잔인하고 유치하게 복수를 하고 차현서 눈을 가린다. 이것도 잠깐은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눈 가린 손 떼는 순간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겠지.]
[차현서 씨 성격에 절대 가만히 안 있겠죠.]
짧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가라앉았다. 모든 상황을 알게 됐을 때, 자신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했단 걸 다 알고 났을 때. 차현서는 과연 멀쩡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은 또 어떠한가. 그때야말로 제 삶은 진짜 지옥으로 변하고 말 거였다.
마지막. 가장 현실적이고도 현명한 방법이자 가장 외면하고 싶은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셋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손을 턴다.]
잠식하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짧았다. 유리에 서린 김 탓에 여자의 얼굴이 현실감 없이 흐릿해 보였다. 아스라이 짓는 미소마저 알알해 정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불가능하신 거 아니었어요?]
레오가 되물었다.
[네 말대로 수습할 시도는 해 봤어야 했나 싶어서.]
[갑자기요? 대체 차문엽이랑 무슨 말씀을 나누셨길래….]
짙게 선팅된 창문 너머를 노려보던 그가 달카닥, 차 문을 열어젖혔다. 때마침 카페 밖으로 차선엽과 차현서가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뭘 어쩌시려고요.]
레오가 뒤늦게 정혁을 불러 세워 보지만, 그의 귀엔 그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정혁은 그대로 성큼성큼, 긴 다리를 뻗어 차선엽과 차현서를 향해 다가갔다.
“여기는, 어떻게….”
제게로 다가오는 정혁을 발견한 현서의 눈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어떻게 알고 여길 온 건가 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싸늘한 정혁의 눈동자가 제가 아닌 제 옆에 선 아버지를 향해 붙박였다.
“아…. 저희 아버지예요. 아빠. 우리 본부장님이세요.”
현서는 아버지에게 정혁을 소개했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차선엽도 얼른 표정을 바꾸며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서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상대를 경멸하듯 노려보는 정혁의 한쪽 눈썹이 날카롭게 들썩였다.
“현서한테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 딸애를 좋게 봐주셔서 직접 스카우트 하셨다고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차선엽은 다시 한번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어찌 됐든 정혁 덕분에 차마 갚을 생각조차 못 했을 액수의 빚을 단번에 갚을 수 있었으니, 은인이었다.
정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감사의 인사 뒤에 으레 따라붙는 겸양의 답이나 의미 없는 대꾸마저도 하질 않는다. 그저 차선엽을 속속들이 파헤치겠다는 양 빤히 응시하고 섰을 뿐이었다. 매끈한 관자놀이엔 간신히 분노를 참느라 굵게 솟은 핏줄이 불룩거렸다.
적의였다.
“따님과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요.”
짧은 침묵을 깬 남자의 첫 마디에, 차선엽이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는다.
“아아, 그래 보이나요?”
“네. 제가 아버지 없이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렇게 아버지랑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 보면 신기하고 부럽고. 그렇습니다.”
현서는 아주 미묘하게 달라진 정혁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겉보기엔 여상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의미 없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언가, 흐르는 기류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져서였다.
“사실 현서 힘들 때 제가 곁에 있어 주질 못해서 늘 안타깝고, 애틋합니다. 그래도 못난 아비랑 상관없이 이렇게 예쁘고 착하게 잘 커 줬으니 저로선 늘 고마울 따름이죠.”
차선엽이 회한에 잠긴 듯 쓰게 웃었다.
“부럽네요, 차현서 씨.”
정혁이 돌연 시선을 돌려 말을 걸어왔다.
“이런 아버지도 다 있고.”
뭐라 대꾸해야 할지, 현서는 잠시 고민하며 눈알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우연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뻔뻔한 거짓말이 돌아왔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퍽 동떨어진 이곳에서 마주친 게 우연일 리 없다. 개연성 없는 인과의 나열을 끔찍이도 증오하는 서정혁의 입에서 나온 우연이란 곧 헛소리란 자백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무언가 있다. 평소와는 확연 다른 의아함에 직설적으로 곧장 용건을 물었다.
“혹시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또렷한 눈동자가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집에 들어가 마주칠 거였는데 굳이 여기까지 저를 찾아 나온 이유가 뭔지.
“그, 나는 이제 그만 가 보마.”
차선엽이 서로를 가만히 응시만 하고 선 둘 사이의 침묵을 깼다.
“저 그럼, 아빠 택시 태워 드리고 올게요.”
“아니다. 난 여기서 집 앞까지 바로 가는 버스 있어. 그거 타고 가면 돼. 나 신경 쓰지 말고 넌 네 갈 길 가.”
차선엽은 현서의 어깨를 떠밀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려던 찰나, 정혁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제 차 타시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민폐를….”
“타시죠.”
당황한 차선엽이 무어라 더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 정혁은 이미 등을 돌려 건너편에 세워진 세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결국 차선엽은 엉거주춤 조수석에 올랐다. 그는 어쩐지 가시방석에 앉은 표정으로 숨을 죽였다. 행여나 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의도치 않게 딸이 피해를 보진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거였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차까지 다 태워 주시고.”
어색한 침묵에 할 말을 찾던 차선엽이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바로 뒷좌석, 차선엽의 뒤통수만 노려보던 그 또한 느긋이 대꾸를 한다.
“저야말로 감사할 일입니다. 아버님 덕분에 제가 차현서 씨같이 좋은 직원을 얻게 된 것 같거든요.”
가만히 정혁을 응시하고 있던 현서의 미간이 슬몃 좁혀졌다. 그러잖아도 회사를 옮기며 그 큰 빚을 다 갚았단 제 말을 믿지 않고 걱정하던 아버지였다. 행여나 제게 그 빚이 약점이 됐단 걸 아버지가 알게 될까 두려웠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구태여 걱정과 염려를 더할 필욘 없을 테니.
“능력 있는 변호삽니다. 제가 한국 와서 가장 잘한 일이 차현서 씨 데려온 거라고 할 수 있을 만큼요.”
저를 흘긋 바라보는 눈동자에 불순한 의도가 명확했다. 일부러인 게 분명한 서정혁의 도발이었다.
“하하, 다행이네요. 제 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현서 정말 똑 부러진 아이입니다. 못난 아비 만나 그 고생을 했어도 이렇게 멋지게 컸는데…. 저만 아니었다면, 아마 남들처럼 평범하게만 자랐더라도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잘됐을 애예요.”
딸 칭찬에 기분 좋아진 차선엽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차현서 씨 여러모로 뛰어난 인재란 거.”
“네. 본부장님께서 이렇게 알아봐 주시니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계속 예쁘게 봐 주십쇼.”
“아빠.”
이어지는 대화를 더 참지 못한 현서가 그만하라는 듯 차선엽을 불렀다. 멋쩍어진 그가 허허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책을 떨었나 봅니다. 저도 모르게 딸 자랑에 흥분을 해선….”
차선엽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현서, 모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어둠 속, 살의 넘치는 정혁의 시선이 제 뒤통수에 꽂혀 있는 줄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