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늦은 오후. 커다란 전면의 유리창 너머에 길어진 해가 붉은 노을빛을 냈다.
기다란 다리를 꼬아 앉아 뚫어져라 저를 응시하는 정혁의 시선에, 다소 위축된 표정의 차문엽이 계속해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현장, 집, 현장, 집. 뭐 그렇게 인생을 재미없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더 지켜볼 것도 없이 매일 똑같긴 합니다. 특별히 만나는 사람도 없고, 쉬는 날엔 혼자 집에 들어박혀서 대체 뭘 하는지 종일 나오지도 않고 말이죠.”
차문엽은 이미 보름이 넘게 형 차선엽의 행적을 살피고 보고를 해 왔었다. 당장 입에 풀칠할 돈이 필요해 대충 시작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꽤 열의를 갖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무슨 사연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이 돈 많은 인간이 형 차선엽에게 갖는 관심이 제 상상 이상이란 확신이 들어서.
선불금으로 받은 돈과 지난 이 주 간 받은 돈, 그리고 추가로 지불된 활동비만 해도 벌써 기백만 원이었다. 꽤 짭짤할 뿐 아니라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액수였다. 별로 위험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에 이렇게 돈을 벌 수 있다니. 돈을 만진 차문엽의 나쁜 머리가 팽팽 돌아갈 법도 했다.
오늘도 그래서 찾아온 거였다. 계속해 이 돈 많은 젊은 놈을 잘 이용하면 화수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한참 차문엽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혁이 느긋이 말을 끊었다.
“바쁜데 본론만 할까요.”
브랜디가 반쯤 담긴 유리잔을 커다란 손바닥 아래로 놓고 들어 올린 그가 빙그르 손목을 크게 돌렸다. 달카닥, 아이스 볼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히 정적을 가른다.
“꼭 나한테 직접 말해야겠다던 얘기. 그거.”
무감하고 짧은 정혁의 명령에 차문엽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녹음기였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데 계속 그 인간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의미도 없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본부장님도 이런 걸 더 원하실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몸빵은 좀 했지만요.”
생색내듯, 누군가에게 얻어터진 게 분명한 제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형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으로 살아온 건지는 이미 다 아실 거고. 혹시 실종 처리되기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도….”
“알 만큼은 압니다.”
“안다고요? 뭐를? 어디까지요?”
차문엽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되물었다.
들고 있던 잔을 입가에 가져간 정혁이 느긋한 목소리를 냈다.
“뭐. 궁지에 몰리면 협박, 유괴. 심지어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그런 쓰레기라는 거?”
“뭐야, 진짜 다 알고 있으시네?”
차문엽은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슬몃,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정혁을 마주하며 그는 더더욱 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돈줄을 제대로 잡은 것 같다고.
“자, 그럼 부연 설명 없이 바로 틉니다.”
차문엽은 잔뜩 신난 얼굴로 녹음기 버튼을 꾹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녹음된 음성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차문엽과 차선엽의 대화였다.
- 너…! 왜 또 나타났어! 썩 꺼지지 못해?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 거,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빚 받으러 온 빚쟁이인 줄 알겠네. 가족끼리 같이 좀 먹고살자는 거지, 개수작은 무슨.
- 설마, 너, 현서 찾아갔었던 건 아니지?
- 아직 안 갔수, 안 갔어. 왜요. 그래도 아버지라고 딸내미한텐 끝까지 체면 차리고 싶어서? 하기사. 나라도 기절초풍할 일이지. 평생을 짐짝처럼 제 발목 잡던 아버지가 유괴, 아니, 살인까지 저질렀단 거 알면….
- 그 입 안 닥쳐!?
녹음기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정혁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기가 싹 걷혔다.
- 누가 그래, 내가 죽였다고!?
- 허, 벌써 치매는 아닐 거고. 형님은 형님 때문에 죽은 그 애한테 미안한 마음도 없수?
- 닥쳐! 그 앤 내가 죽인 게 아냐!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야. 나나 그 애나.
- 아이고, 운이 없기는. 형님이 애초에 그 애들 유괴만 안 했음 멀쩡한 애가 왜 죽었겠….
퍼억!
- 닥치랬지!
우당탕탕, 하는 시끄러운 파열음들과 함께 맞아 쓰러진 차문엽의 신음 소리, 그리고 분노에 악을 쓰는 차선엽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 미안하지도 않냐고? 그래! 하나도 안 미안해. 나도 그 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어. 아니! 나도 모자라서 우리 현서까지 지금껏, 지금껏 이렇게 힘들고 괴롭게 살아왔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그저 살겠다고 발버둥 친 것뿐인데!
이를 바득 문 정혁의 관자놀이가 불룩해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일말의 죄책감은 느끼고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고의였든 아니었든 어쨌든 자신 때문에 아직 제대로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아이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으니까. 한 아이의 죽음으로 누군가는 목숨을 포기했고,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잃었으며, 누군가는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잘못한 게 없다고? 미안한 게 하나도 없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한 가정을 파탄 내고 그 가족 구성원들의 인생을 무참히 난도질했었던 이 악마 같은 인간의 뻔뻔함에 소름이 끼쳤다. 다시금 오랜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잠시 망각했던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저주 같았던 제 지난 인생이 뇌리에 꼿꼿이 싹을 틔웠다.
- 나는 그저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을 뿐이야. 엄마도 없이 자란 우리 딸 남 부럽지 않게, 좋은 거 먹이고 입히고 부족하지 않게 살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최선을 다했어. 근데 그놈! 그 같잖은 검사 놈 하나가 전부 다 망치려고 하잖아. 내가 죽을힘을 다해서 얻었던 것들 모두 다! 한 번에 날려 버리려고 하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어떻게!?
오열하는 차선엽의 목소리가 너른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 그놈한텐 그냥 딱 한 번만 눈 감으면 되는 일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도,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도 그 괴물 같은 새끼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잘난 척만 했어. 그러니까 그 애는 그놈이 죽인 거야, 그놈이… 자기 새끼를 죽인 거지 나는…. 나는 아니야, 나는 절대로….
울음기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을 한탄과 오열이었다.
슬쩍, 무섭게 굳은 정혁의 표정을 살핀 차문엽이 녹음기를 껐다. 싸늘한 정적이 괴괴히 내려앉았다.
“뭐 이 정도면 자백이나 다름없는 대화 같아서 말입니다. 이거, 본부장님께 확실히 도움이 되겠다 싶은 건수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대가를 바라는 차문엽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정혁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녹음기를 틀기 전까지만 해도 오만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던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꺼진 녹음기만 무섭게 노려보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미안하단 감정이나 후회.”
무겁게 다물려 있던 정혁의 잇새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은 자책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기색이 하나도. 전혀, 없었나 봅니다.”
“아, 그랬으면 나한테 이렇게 했겠습니까? 반성은커녕 내가 현서한테 가서 말할까 봐 그저 전전긍긍이죠. 도대체 딸내미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결국, 딸 때문에 이 모든 짓을 저질렀고 딸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그의 행동을 합리화해 줬단 소리였다. 그의 딸. 차현서 때문에.
제 인생 모든 불행의 원흉이 차현서였다니. 그런데도 그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허허실실, 팔자에도 없을 사랑 놀음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그 애가 죽었고, 누구 때문에 삶이 지옥으로 떨어졌는데.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곱씹고 나니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멍하니 있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골이 얼얼하게 울렸다.
“그만 나가 보시죠.”
“네? 그럼, 이대로….”
“물건값은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유, 감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에 돌아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어요. 덕분에 본부장님 같은 이런 귀인도 만나 뵙고.”
줄곧 눈치만 살피던 차문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떻게, 앞으로도 요런, 종류로 원하시면 제가 조금 더 신경 써 보구요.”
정혁이 차문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경멸과 무시가 섞인 눈빛. 어서 제 앞에서 꺼지란 뜻이었다.
“아아, 네네. 바쁘실 텐데,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싹수 없고 오만한 어린놈의 태도가 다소 불쾌할 법도 하건만, 어쩐 일인지 그의 잇새에선 연방 웃음만 비실비실 새어 나올 뿐이다. 좀 건방진 게 무슨 대수랴. 제게 돈 주는 놈이 최고인 거지.
차문엽은 낄낄거리며 반지빠르게 뒷걸음질 쳐 나갔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녹음기를 노려보는 정혁의 눈가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유리잔을 쥐고 있던 오른손 또한 허옇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 치미는 분노와 혼란스러운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던 매끈한 미간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 하나도 안 미안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악을 쓰던 차선엽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되살아났다. 아니나 다를까 눌러 감추고 있던 고통이 악귀처럼 악독하게 따라붙었다. 내 잠잠하던 오른손이 끊어져 나갈 듯 욱신거리기 시작한 거였다.
“젠장.”
정혁은 입술을 짓씹으며 오기처럼 움켜쥐고 있던 유리컵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름이 끼칠 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차게 긁었다.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품에 움켜쥐고 얼굴을 우그러뜨린 남자의 낮은 신음에 원망과 애한이 섞여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