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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하나 없이 새하얗고 깨끗한 외벽 앞, 커다랗게 걸린 붉은색 캔버스 앞에 선 정혁의 눈썹이 느긋이 꾸물거렸다. 고른 밀도로, 깨끗하게 칠해진 붉은 물감 위에 수직의 선 두 개만 곧게 내려 그어진 바넷 뉴먼의 그림이었다. 구태여 이 그림을 제 앞에 걸어 놓은 의도가 뻔하게 느껴져 쓴웃음이 절로 났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갑자기 회장님 호출이 있어서.”
정혁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또각또각, 널찍한 갤러리 안으로 바쁘게 걸어 들어오는 양재숙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습니다. 불쑥 찾아온 건 전데요.”
“그러게, 식사를 하자니까.”
“아. 제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능청을 떨며 어깨를 으쓱거렸으나 거절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렇게 갤러리에서 뵙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하긴. 서 본 그림에 관심 많지?”
정혁의 등 뒤에 걸린 그림을 흘끗, 확인한 양재숙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면 한 점 내줄까? 자기 작품 수집하는 거 좋아하잖아.”
“뭐. 좋아는 하지만 부담스러워서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림값이 꽤 비쌀 걸로 예상이 돼서.”
“하여튼 눈치는 귀신이지.”
양재숙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정혁은 자신의 용건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거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더 에두르지 않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금 회장님이 자기한테 리테일 부탁하셨다면서.”
“네. 감사하게도요.”
“그거 나한테 넘겨라. 그럼 골드스톤에 JK 모직 경영권 내줄게.”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말에 정혁은 픽, 코웃음을 쳤다. 장 회장의 첫째 딸인 장민영이 곧 JK 모직의 대표 이사직을 맡게 될 거란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양재숙이 이렇게까지 위기감을 느끼고 움직이는 걸 보면.
“그 정도로 가능한 거래라고 보셨을 리는 없고. 또요.”
느긋함을 한껏 위장한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며, 정혁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어디 남은 조건을 들어나 보잔 듯이.
무례한 그의 태도에 양재숙은 끓는 속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차현서 말야.”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정혁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럴 줄 알았단 듯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소개비도 안 받고 넘긴 게 아무래도 너무 손해였다 싶어.”
“자꾸 후회가 되시나 보네요, 어지간해선 후회 안 하실 분이.”
“서 본이 굳이 그런 애를, 그렇게까지 빨리 채갈 줄 몰랐지. 걔가 그렇게 헤플 줄도 몰랐고.”
자극하려 일부러 내뱉는 노골적인 말에 정혁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죄송한데, 이미 물건은 제 손에 있습니다만.”
성립 가능한 거래가 아니란 뜻이었다. 물건부터 넘겨주고는 이제 와 물건값을 받을 수 있겠냔 조소이기도 했고.
“차 변이랑 나랑 거래해 온 게 벌써 몇 년이게. 차 변에 대해서라면 내가 서 본보다야 더 많이 알지 않겠냐구.”
소문은 천하의 라이언 서가 웬 애송이 같은 변호사 하나를 비싼 값에 스카우트해 애지중지 싸고돈단 기막힌 이야기로 시작했다. 물론 뉴욕에서부터 숱한 염문설의 주인공이자 늘 화제의 중심에 있던 그였으나 이번엔 좀 그 결이 달랐다.
여자를 업무로 엮은 것도 모자라 제집에까지 들여 노상 옆에 끼고 있는다니. 게다가 금번 합병 건으로 은성의 승계 싸움에서 완전히 날아간 조인호는 또 누구이던가. 실상 조인호가 회사뿐 아니라 여자까지 라이언 서에게 빼앗긴 거란 말도 이미 파다했다.
주목할 만한, 아주 희한한 일이었다.
“그래. 이제 자기 사람이니까. 서 본 자기 거 건드리는 거, 그거 치 떨리게 싫어하잖아?”
그러므로 양재숙은 서정혁과 차현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확신하는 바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지독한 돈 귀신이 돈 안 되고 약점이나 될, 손해 뻔한 이런 짓을 구태여 하겠는가 말이었다.
“이사님.”
타박,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그의 존재감이 제법 위압적이었다. 양재숙의 눈꼬리가 설핏 씰룩거렸다. 힘주어 한 협박에도 도통 눈 하나 깜짝을 않는 꼴이 못마땅해서였다.
“이사님께서 지금 저한테 하셔야 할 게 협박이겠습니까, 부탁이겠습니까.”
이 건방진 새끼.
속을 삼킨 그녀의 목소리 톤이 다소 높아졌다.
“서 본 귀엔 내 말이 뭐로 들리는데. 협박? 부탁?”
“협박은 아니길 바라죠. 손에 유리한 패를 쥔 쪽이 할 수 있는 게 협박이니까요.”
“내 손에 유리한 패가 없다고 단정하나 봐.”
“네. 이사님 지금 누가 봐도 개패 쥐셨습니다.”
거침없고 노골적인 대답에 양재숙의 잇새에선 기어코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무리 눈에 뵈는 것 없이 제멋대로 미쳐 날뛰는 놈이라지만 제게 감히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군다는 건 선전포고를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돌연 참을 수 없어진 짜증에 그녀는 미간을 깊게 우그러뜨렸다. 이 검은 머리 외국인 놈이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싶어서.
“아닌데. 들고 있어 봐야 개패인 차현서 손에 쥐고 전전긍긍하는 거, 내가 아니라 서 본인데?”
“아. 그렇게 보셨구나.”
정혁은 알만 하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뚜름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실망스럽네요. 여기까지 오면서 어떤 가격을 부르실지 내심 좀 기대는 했었는데.”
더 이상 흥정도 없을 거란 의도 또한 명백했다. 양재숙은 기막히단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하게 지껄이는 정혁의 어조에 이상하리만큼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서정혁을 그저 앤더슨에게 이용이나 당하다 버려질 사냥개 정도로 만만히 얕잡아 봤던 게 잘못이었다 싶다.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이 협박이어도 상관없단 뜻이구나?”
“차현서에 대해서 저보다 많이 아신다면서요. 그 여자가 어디 고분고분, 날리면 날아가고 때리면 맞고만 있을 여자던가요.”
정혁은 픽, 그녀를 조롱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드님 문제로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유감입니다만 다른 활로를 찾아보시죠. 태성 리테일엔 제가 이미 침을 발라 놔서요.”
“차현서한테도? 나 생각보다 비위 좋아, 서 본.”
“아. 죄송하게도 그 여자한텐 침 말고 다른 것도 잔뜩 발라 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허. 천박해 죽겠네, 정말.”
“그러게요. 누가 저한테 그러던데. 천박하고 야만적이라고.”
“서 본.”
“근데 저랑 달리 고상한 이사님께선 왜 남의 밥그릇에 눈독을 들이십니까, 천박하게.”
“지금 뭐 하잔 거야? 한국에서 자리 잡겠다면서 나랑 이렇게 척 져도 돼?”
“이사님이야말로 저랑 척 져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계속 이렇게 자릴 잘 잡아 가는데, 조만간 큰 후회 하시지 싶은데.”
이 망나니 같이 날뛰는 놈의 코를 어떻게든 납작하게 해 주고 싶단 승부욕과는 별개로 저급한 날것의 분노가 끓었다. 낯선 불쾌감이 거북스러웠다. 사람 속을 제대로 뒤집어 놓고, 감정의 저 밑바닥까지 자극할 줄 아는 양아치 중의 양아치에게 제대로 놀아나는 기분이라.
“제가 좀 바쁩니다. 다음부턴 좀 거래가 될 만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때 연락을 주세요. 괜한 시간 낭비시키지 마시고.”
그대로 갤러리를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정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잇새에서 기막힌 헛숨이 샜다.
기어코 이렇게까지 건드리겠다 이거지.
아무래도 제 손으로 호랑이 새끼를 키워 놨다 싶다. 그것도 남 좋은 일만 시키는.
빈 갤러리에 홀로 남은 양재숙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이를 바득 물었다.
***
「본부장실로.」
핸드폰 액정에 불쑥 뜬 다섯 글자에 고요하던 심장이 시끄럽게 맥동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잠시 망설이던 손가락으로 다소 건방진 답장을 전송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그의 사무실에서 나눴던 정사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그러므로, 퇴근 시간이 다 지난 지금 시각에 굳이 제 사무실로 오란 말을 메시지로 보내는 그의 의도가 어딘가 불순하고 야릇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제 답을 읽고도 그는 답이 없었다. 흘긋 본 유리창 너머엔, 솔이를 비롯해 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하는 직원이 꽤 많이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업무 관련 용건 아니시면 집에 가서 뵙고 싶은데요. 할 일이 많아서요.」
아니나 다를까,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곧바로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그녀의 잇새에서 작은 한숨이 짧게 샜다.
“네.”
- 너무 선 긋네. 업무 관련 아니면 이젠 내 말도 개무시하겠다?
“공사 구분 확실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지난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딱 부러진 목소리로 대꾸하자, 헛웃음을 터뜨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에 낮게 울렸다.
- 상사가 부르는데 대체 무슨 생각부터 하면 이런 반응이야.
“본부장님께서 원인 제공 충분히 하셨잖아요.”
- 건방 떨지 말고 올라와, 얼른.
“바쁩니다. 업무 때문에 부르시는 거 아니시면….”
- 내가 내려갈까요, 차 팀장님?
현서는 결국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을 나서며 책상에 쌓아 뒀던 서류 뭉치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이미 두 시간 전에 정혁의 메일로 다 보냈던 자료들이었으나 핑계가 될 그럴싸한 방패가 필요해서였다. 왜 본부장실에 가느냐고 누가 추궁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제 발이 저린 탓이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종일 업무에 시달려 다소 지치고 피곤한 자신의 안색이 영 마뜩잖아 절로 한숨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울이라도 좀 보고 나올걸.
때맞춰 땡, 하는 청량한 소리가 낯선 상념을 깼다.
정말이지, 뭘 상상을 하는 건가.
현서는 스스로를 자책하듯, 작게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뗐다. 본부장실 앞에 앉은 그의 비서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너른 공간에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음악처럼 울리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신 장관님께서도 이미 흔쾌히 참석 의사 밝히셨습니다.”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붙인 서정혁이 눈썹을 들썩이며 들어서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게요. 꽤 쓸 만한 그림 하나 나올 것 같아 저도 기대가 됩니다.”
통화를 하면서도 제게로만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고 서자 여지없이 심박이 빨라졌다. 매끈한 얼굴과 이목구비가 꼭 수려한 그림 같았다. 그 역시 종일 외부 일정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다녔을 건데,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은 아침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여튼 세상 혼자 사는 인간.
괜스레 치미는 원망을 곱씹으며 그를 응시했다. 문득, 우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저를 향해 눈짓한다. 더 가까이 오란 뜻이었다. 두 뺨이 델 듯이 뜨거워졌다.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진하고 묵직한 향수 냄새에 멈칫하는 사이, 품에 안고 있던 종이 다발이 통째로 빼앗겨 책상 위로 휙 던져졌다.
“아뇨. 상관없습니다. 매입 시기는 저희가 태성 쪽에 맞추겠습니다.”
태연히 대화를 이어 가던 그가 기어코 현서의 허리를 바짝 옭아매 제 앞으로 당긴다.
“자세한 건 만나서 말씀 나누시죠.”
당혹스러웠으나 행여 수화기 너머에 제 숨소리라도 섞여 들까 싶어 그녀는 다급히 입술을 앙다물었다. 방어적으로 막은 손가락은 어느새 둥글게 말려 정혁의 셔츠 자락을 바짝 움켜쥔 채였다.
“네. 좋아합니다.”
또 무슨 음흉한 장난을 하려는지, 길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불길했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으며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맛있겠네요.”
낮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없이 음험하게 들리는 건 분명,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