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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54화 (5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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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치 아픈 숫자만 시퍼렇게 나열된 간밤의 미국 시장 차트를 빠르게 훑다 말고 힐끔 시선이 돌아갔다. 책상 한 귀퉁이에 쌓인, 푹 젖었던 자국이 선명한 서류 더미로. 어젯밤, 뜨거웠던 정사의 흔적이었다.

여자에 미쳐선 일이고 뭐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7천 마일의 거리를 한달음에 내달려 온 것도 어이가 없는데, 보자마자 안고 싶단 욕정부터 치솟은 건 더 기막힌 일이었다. 성스러운 사무실에서 섹스라니.

정혁은 자조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대로 돌았네.”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짚으며 불룩거리는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제게 매달려 신음하던 그 예쁜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만 같아서.

똑똑.

“네.”

대답이 무섭게 문이 열리고, 레오의 뒤로 초췌한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챈 정혁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곤 일어나 응대용 소파로 향했다.

“차문엽 씨.”

이름을 불린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의 규모와 고급스러움에 눈이 휘둥그레진 차문엽은 여기저기를 살피며 정혁의 앞자리에 마주 앉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본인이 왜 여기까지 불려 온 건지는 전혀, 예측도, 상상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차문엽. 그러니까 차현서의 작은아버지. 그녀의 인생을 지옥으로 등 떠민 장본인. 고작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한 몰골로 다시 돌아올 거였으면서,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한 건가. 피가 섞였다곤 하나 차현서와는 털끝 하나 닮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입 안이 썼다.

차선엽 뒤에 마킹 붙였던 이에게서 그의 동생 차문엽이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돌아왔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더 캐 보지 않아도 차문엽의 의도는 뻔할 뻔 자였다. 이제 막 다시 일어서 보려는 차선엽과 차현서를 협박해 어떻게든 벼룩의 간까지 털어먹겠단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면 어떻게 두 부녀 앞에 나타날 생각을 하겠는가.

차문엽이 어떤 인간인지 익히 알았다. 제 능력으로 뭘 해 보려는 의지보단 누군가에게 기생해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거머리. 저보다 강한 이 앞에선 자존심도 없이 고개를 처박고, 저보다 약한 타인은 수시로 짓밟고 뭉개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족속. 결국엔 그렇게 제가 디딘 진창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답 없는 인생.

이런 종류의 인간이라면 뉴욕 가장 어두웠던 공간인 할렘에서 질리도록 봐 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또한 잘 알았고.

이런 질 낮은 인간 상대하는 게 구질구질하긴 해도 무엇보다 손쉬운 방법이긴 하니까.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보자고 하셨는지?”

차문엽은 말없이 한참을 자신을 응시하고만 있는 정혁을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눈빛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라 그로서도 썩 편하지만은 않은 까닭이었다.

“차현서 씨 아시죠.”

천천히 운을 띄운 정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차문엽의 얼굴을 느른히 관찰했다. 차현서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안도하며 풀어지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게 퍽이나 역겨웠다. 자신은 그 이름에 아무런 부채 의식도 갖고 있지 않다는 듯 뻔뻔히 구는 꼴이라니.

“아아, 역시. 현서, 우리 조카 일로 부르셨구나?”

“조카가 여기서 일하는 걸 이미 알고 계셨나 봅니다. 한국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셨다고 들었는데.”

“아유, 그럼요. 하나밖에 없는 조카인데요. 우리 형님 돌아가시고 어릴 때부터 내 손으로 키운 애라 사실상 걔 아버지나 다름없어요, 내가.”

아버지.

기가 막혀 픽,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크흠! 근데, 현서 직장 상사분께서 무슨 일로 저를?”

대놓고 하는 조소에 머쓱해진 차문엽이 괜스레 뒷머리를 긁으며 불쾌한 목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다리를 꼬고 앉아 거만하고 건방지게 사람을 훑어나 본다는 게 영 처음부터 마뜩잖았던 까닭이었다.

“차현서 씨 일로 뵙자고 한 건 아니고요.”

“네? 그럼 왜….”

“차선엽 씨 일입니다.”

다시금 차문엽의 눈이 터질 듯 둥그레졌다.

“그쪽이 우리 형님을 어떻게 알고?”

“잘 압니다. 제가 차선엽 씨한테 받아야 할 빚이 좀 많아서요.”

“아니, 현서가 빚 다 갚아서 사망 신고 들어간 것도 다 취소됐다고 들었는데?”

차문엽은 조금 전 형님이 죽었다고 떠들었던 자신의 말실수가 떠올랐는지 말끝에 괜스레 헛기침을 크게 했다.

“그거 말고. 안타깝게도 아주 개인적인 빚이라서요.”

“도대체 또 뭘 얼마나 빚을 졌길래, 원.”

아니. 어쩌면 제 형이 갚아야 할 빚을 제게 대신 요구할까 싶어 경계하는 건지도 몰랐다.

“뭐. 우리 형님 사정도, 내 사정도 이미 다 알고 부른 것 같은데. 설마하니 나한테 그 돈 대신 갚으라고 부른 건 아니겠지. 조사해 봤으면 다 알겠지만 난 다 털어먹고 죽으려 해도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외다. 이 꼴을 보슈.”

“네. 저도 차문엽 씨한테 빚 받아 낼 생각은 없습니다.”

“근데 왜 날 보자고….”

“차문엽 씨한테 꽤 괜찮은 거래 하나를 제안할까 해서요.”

“거래… 라니?”

거래라는 말에 차문엽의 눈동자가 일순 탐욕으로 번득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돈이라면 여지없이 걸려들고야 마는 인간. 천박하기 짝이 없는 역겨운 얼굴을 바라보며, 정혁은 느긋하게 읊조렸다.

“별로 어렵지는 않은 일입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일을 해 주시면 대가는 넉넉히 챙겨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줄 수 있길래? 내가 부르는 만큼 다 줄 수 있나?”

차문엽은 무슨 일인지는 들어 보지도 않고 액수부터 따지고 들었다. 얼마인지, 액수를 들어 보지도 않고 제 제안을 거절하던 차현서와 참 달라도 너무 다른 결이었다.

원하는 액수를 얘기해 보라는 듯 느긋이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그래도 아직 사지 육신 하나는 멀쩡해서 막노동판에 나가도 일당은 제일 많이 챙겨 받는다고. 어디 가서도 밥을 빌어먹진 않는데, 내가….”

멀찌감치에서 말없이 서 있던 레오가 다가와 차문엽 앞에 봉투를 툭, 내려놓았다. 망설임 없이 곧바로 봉투를 집어 든 그가 안에 든 현금의 액수를 확인하곤 입을 틀어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말대로 막노동판에서 한 달 내내 쉬지도 못하고 일해도 결코 손에 쥐지 못할 액수의 금액이었다.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만큼 한 푼이 아쉬운 제 상황에 이런 제안은 다신 또 없을 로또였다.

“그 정도면 만족스러우실까요.”

정혁은 비뚜름히 기대어 턱짓을 했다.

“뭐어, 이 정도면 월급으로….”

“주급인데.”

말문이 막힌 차문엽이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퍽 구미가 당긴 얼굴로 애써 아닌 척 허풍을 떨고 있는 꼴이 하찮기 그지없었다. 역시나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인간이라.

“무, 무슨 일인지 들어는 봐야겠지. 무슨 일인데 그러슈?”

“앞으로 형님 차선엽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게 빠짐없이 보고해 주시면 됩니다.”

“뭐?”

“간단하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시에 놀란 차문엽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알을 굴린다.

“대체 그런 일을 왜….”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냐고 되묻는 듯한 정혁의 위압적인 눈빛에 말끝이 작게 흩어졌다. 행여 정혁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꽉 눌러 쥐고 말을 바꿨다.

“아니, 그런 일이라면 별거 아닌 일이긴 합니다만.”

“사소한 일이라도 최대한 상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고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고 뭘 먹고 언제 화장실을 가는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요. 부탁드리는 일 잘만 해 주시면, 또 제가 원하는 정보까지 캐치해 주신다면 지금 드린 돈 이외에도 성과금 차원에서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의아한 눈을 하면서도 차문엽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의 의도를 잘 알겠다는 뜻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내가 이래 봬도 맡은 일 하나는 끝내 주게 잘하는 책임감 있는 성격이라 뭘 해도 대충대충 허투루 하는 법이 없어요. 본부장님 나한테 이 일 시킨 거 후회하지 않게 하리다.”

돈을 손에 쥐곤 입이 귀에 걸린 차문엽은 ‘그쪽’이라 칭하던 호칭마저도 ‘본부장’이라 단번에 바꿔 부르며 같잖은 허세를 떨었다.

“다행이네요. 혹시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을 좀 했었는데.”

저를 조롱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손사래를 친다. 이런 덜떨어지고 하찮은 인간에게 인생을 짓밟힌 차현서가 안쓰러웠다. 한 줌 돈뭉치에 뭐든 팔아넘기고야 마는 인간쓰레기.

“한 가지 덧붙여 부탁을 드리자면 차현서 씬 이 거래에 대해서 몰랐으면 합니다만.”

“아유 당연하죠, 말이라고.”

“차문엽 씨랑 오늘 전 이 자리에서 만났던 적 없습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고요.”

알겠다 대답을 한 차문엽이 연방 히죽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믿을 만한 인간이 절대 아닌데요, 차문엽.]

침묵을 지키던 레오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알잖아. 다루긴 쉬워, 저런 인간들이.]

[네. 알죠. 저 인간이 차현서 씨한테 접근 못 하게 일부러 묶어 두신 거라는 것도.]

레오가 어깨를 들썩이며 능청을 떨었다.

[것도 모르고 전 또, 뭐 엄청난 계획이 있으셔서 차문엽 데려오라는 줄 알았네요.]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굳이 안 써도 될 돈까지 써가며 차문엽을 옭아맨 까닭이 차현서 때문이라는 걸 왜 모를까. 행여나 돈이 궁한 차문엽이 차선엽의 과거를 들쑤시고 차현서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한 거였다.

[하여튼 쓸데없는 눈치만 빠르지. 맘에 안 들게.]

정혁은 몸을 일으켜 주머니에서 꺼내 든 자동차 키를 레오에게로 툭 집어 던지며 타박했다.

[네가 운전해.]

[어디 가시게요? 오늘 외부 스케줄 없으시던데.]

[양재숙. 이제야 발에 불이 떨어지셨는지 자꾸 만나자네, 귀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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