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저도 모르게 터진 진심에 현서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굳어 입술만 아프게 꾹 깨물었다.
“말을 똑바로 하셔야지.”
달뜬 열기에 젖은 남자의 가슴이 낮게 울렸다.
“내 얼굴이 보고 싶었을 린 없고, 내 몸이 그리웠단 소리야?”
제 가슴에 이마를 처박고 있는 그녀의 작은 턱을 슬쩍 잡아 올리며 되물었다. 별 박은 듯 반짝거리는 까만 눈동자가 동그랗게 부딪혀 왔다.
“뭐….”
무어라 답을 해야 하나, 잔뜩 빨려 붉게 부은 입술이 망설이듯 달싹거렸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죠.”
겨우 떠올린 궁색한 변명에, 그가 그럴 줄 알았단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덕분에 가랑이 사이, 여전히 깊게 들어박힌 남자의 살갗이 더불어 낮게 진동했다. 젖은 내벽이 찌르르 야릇한 소리를 냈다.
“싫진 않단 소리네.”
“제 기분 같은 거 안 중요하시잖아요. 어차피.”
그녀의 둥근 이마와 삐죽거리는 입술까지,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그간의 그리움을 곱씹었다. 발갛게 익은 두 뺨과는 대조적으로 저를 살짝 흘기는 눈동자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말갰다.
이런 눈으로 함부로 보고 싶었단 말이나 지껄여 놓고는.
“이제….”
꿰뚫을 듯 집요한 남자의 시선이 버거워, 현서는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내려 주세요.”
아직도 제 안에서 뜨거운 기둥을 그만 빼내 달란 소리이기도 했다. 자꾸만 꺼떡이며 예민해진 점막을 건드리는 감각이 다시금 위험하게 느껴져서.
“난 아직 덜 뺐는데.”
“어쨌든 끝났잖아요. 이제 그만….”
“이제 그만 꺼지라고. 볼 장 다 보셨다?”
“그런 말이 아니고요.”
“온 앤 오프 한번 명확하기도 하시지.”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에 불쑥 힘이 들어갔다. 순간 통로를 꾹 막고 있던 그의 페니스가 단번에 뽑혀 나가자 주르륵, 허벅지를 타고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체액의 감각이 선연했다.
여전히 곧추선 기둥에도 희멀거니 푹 젖은 액체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울릴 만큼 음란한 광경에 현서는 저도 모르게 말려 올라간 스커트를 황급히 내리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부탁 하나 드릴게요.”
“뭐를.”
“다른 건 몰라도 회사에서는 안 이러셨으면 좋겠어요.”
“고려는 해 보죠. 가능할지 여부는 별개지만.”
“본부장님.”
기막혀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시 그를 올려다보는데 성큼, 남자의 몸이 다시금 바짝 다가와 붙었다. 도망갈 틈도 없이 통유리창을 등진 채 그에게 갇혀 버렸다.
“태성전자에서 이번 프로젝트 결과에 썩 만족한 모양이던데. 특히나 차현서 팀장님 일 처리가 아주 깔끔했다고. 금 회장님이 나한테 전화까지 걸어왔어요, 뉴욕으로 직접.”
지극히 사적인 상황에서 내뱉는 지극히 공적인 영역의 대화였다. 아직 발기해 있는 아랫도리를 느긋이 배꼽 아래에 붙여 누르며 입술을 훑는 남자의 손길이 못 견디게 뜨거웠다.
“태성에서 리테일 계열사 통합하려는 거 알고 있죠.”
“…네. 압니다.”
“우리가 투자하는 조건으로 컨소시엄을 좀 구성할까 싶어 먼저 제안을 했는데, 흔쾌히 오케이를 하더라고. 물론 차 팀장님이 TF팀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태성그룹의 리테일 계열사 통합이라면 규모가 꽤 큰 프로젝트였다. 자신을 굳이 TF팀에 합류시키겠단 건 이번에도 역시 제게 큰 자리를 맡기겠단 의미일 터였고.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문득 궁금해졌다. 공사 구분이라는 게, 일과 사생활의 온 앤 오프라는 게 정말 이 남자에겐 가능한 영역인 건지. 행여나 사적 영역의 관계가 공적인 부분까지 침범해 제게 자꾸 이런 기회들이 생기는 건지가.
물론, 서정혁이라는 인간이 인정과 친분에 휘둘려 무작정 일을 그르칠 사람이 결코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단순히 금 회장님 요구 때문인가요?”
“무슨 뜻이야.”
“늘 제가 가진 능력보다 과한 대우를 해 주시는 것 같아서요.”
“아. 내가 깜냥도 안 되는 차 팀장님을 이유도 없이 조 단위 투자금이 걸린 프로젝트에 막 꽂아 넣는 것 같아. 나랑 틈만 나면 이러고 박고 싸는 사이라 내가 공사 구분 못 하고 헛짓거리를 한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 위, 그의 비웃음 섞인 한숨이 흩어져 내렸다.
“아니요. 누구보다도 합리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본부장님이시라는 건 잘 압니다.”
“아는데.”
“다만….”
“알면 하던 대로 해. 습관적으로 건방 떨 땐 언제고 왜 갑자기 겸손인데, 차현서 답지 않게.”
“걱정스러워서요.”
“뭐가요.”
“본부장님 기준에 제가 하는 일들이 눈에 찰지. 제 일 처리 방식을 만족스러워하실지. 전부 다요.”
사실이었다. 걱정. 지금껏 제가 하는 일에 의문을 품고 망설여 본 적 없던 그녀에겐 꽤나 어색하고 생소한 감정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더 멈칫하는 거였다. 저를 믿고 일을 맡긴 서정혁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단 이상한 욕심이 자꾸 치밀어서.
“걱정 마.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잘하고 있어, 당신.”
그랬다. 세상을 손익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만 보는 남자에겐 이 모든 게 다 합리적 계산일 뿐일 터. 좋아하는 이에게 더 잘 보이고 싶고 마음에 들고 싶은 감정 따윈 그에게 관심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단 걸 잠시 망각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깊게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서정혁에겐 어떤 감정적 요소도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을 테니.
“50억. 본부장님은 제가 그 값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직까진.”
서정혁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보람차. 차현서가 내 옆에서 하루가 다르게 경제적 인간으로 착실히 성장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럼 앞으로 혹여나 제가 본부장님 실망시키는 일이 생기면요.”
“지금 내 걱정해?”
“아뇨. 제 걱정이요.”
저를 비웃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감정 없는 이 남자와의 이런 관계가 과연 무슨 의미인 걸까. 그저 찰나의 쾌락과 본능만을 좇는 이 모래성 같은 관계가 과연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나. 솔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엔 저만 상처받고 말 거란 그녀의 불길한 예감이 여지없이 적중해 가는 중이었다.
“혹시 겁이라도 먹었어? 내가 차현서 씨 앞으로 구상권이라도 청구할까 봐서.”
“네. 제가 정말 파렴치한이면요. 진짜로 에라 모르겠다, 못 버티고 도망이라도 가면요. 그땐 어쩌실 건데요.”
“진짜 도망치고 싶어 죽겠나 본데.”
가능만 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도망쳐 버리고 싶은 제 마음을 알까. 속을 읽어 내듯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낮았다.
“그래서 미리미리 목줄 채워 놨잖아.”
톡톡. 그가 그녀의 목걸이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아시겠지만 태성그룹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권은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태성 금동준 회장은 늘 건재했어요.”
“골드스톤은 만만하고.”
만만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자꾸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위축되어 가는 건지도 몰랐고.
“JK는 만만해, 그럼?”
“…….”
“태성 리테일 계열사를 JK에서 꽤 오랫동안 눈독 들이고 있었단 거,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인데. 그걸 우리한테 맡기는 숨은 의도가 뭘까요, 차 팀장님.”
“…….”
“하필이면 JK 일이라면 앞일 뒷일 안 가리고 다 해 온 차현서 씨를 콕 집어 지명해 가면서 칭찬을 가장한 음흉한 조건을 내건 의도는 또 뭐고.”
결국 골드스톤은 대기업들의 알력 싸움 판에 끼어들게 될 운명이었다. 물론 서정혁도 그걸 굳이 피하진 않는 눈치였다. 그들 사이에서 제대로 한몫 챙기겠단 그 야심 또한 선명했고.
“물론 누가 이기든 우리랑은 상관없어. 목표는 심플해. 골드스톤이,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돈인 거고 난 차현서 씨를 그 돈을 벌어다 줄 적임자로 판단했고.”
불현듯 그의 말이 이상한 뜻으로 해석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말했지. 모든 판단 기준은 내가 정한다고. 지금 내가 정한 기준이 차현서 당신이란 뜻이야. 알아들어?”
마치 저를 끔찍이 믿는단 소리처럼 들려서. 지독하게 합리적인 그 판단에 감정 한 톨 섞였을 리 없는 그의 눈빛이 지나치게 뜨거워서. 애꿎은 심장만 빠르게 박동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지금껏 서정혁의 판단은 늘 같았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기가 막힐 만큼 높은 값을 매겼던 남자. 본인이 그 정도 본전도 못 뽑을 사람인 것처럼 보이냐 묻던 남자의 오만함의 이면엔, 자신이 선택한 차현서의 능력을 그 값만큼 인정하겠단 의도도 함의된 거였다.
그래서 늘 의아하고 낯설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분에 넘치는 대우라.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이렇게 가슴이 뛰나. 이 남자가 아니었음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었던 사치를 황홀하게 누리고 있어서.
“아주 건방진데도 가끔 보면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당신.”
우습기도 했다. 헷갈릴 것도 없는 그 건조한 목소리마저 헷갈릴 만큼 다정히 들린다는 게.
아무래도 단단히 미쳤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마주했다. 새삼 잘난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이목구비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럼, 구체적인 컨소시엄 구성은 언제부터로 생각을….”
불쑥 고개를 깊숙이 숙여 입술을 가깝게 붙인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를 뒤덮는다.
“서둘러야겠지. 우선 하던 일부터 끝내고.”
질문을 끝내기도 전, 다시 입술이 빨려 들어갔다. 현서는 제 허리를 더욱 바짝 옭아맨 그의 목에 매달려 안기며 눈을 감았다. 달큼한 타액이 뒤섞이며 또다시 황홀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웠던 시간만큼이나 이 밤이 느리게 흐르길. 자신이 발 디딘 이 지옥이 영원하길,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심장 소리가 터질 듯 증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