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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이 출장을 떠난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갔다. 그사이 은성에선 최종 합의문이 도착해 마지막 인수 절차만 앞둔 상황이었고 새로이 시작한 태성전자와의 프로젝트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장에선 골드스톤이 드디어 한국에 제대로 첫발을 내디뎠다며, 경계 반 두려움 반의 반응을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골드스톤의 라이언 서에 대한 평가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라이언 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일부 발 빠른 기업들은 이미 시장 구조의 재편에 순응하듯 먼저 손을 내밀어 오기도 했다. 태성전자를 비롯한 몇몇 굴지의 그룹에선 아예 골드스톤에 파트너십을 제안해 오기도 했으니까.
그간 돈만 잡아먹어 골머리를 앓던 비핵심 사업부를 정리하거나 계열사 재편을 하는 데 있어 골드스톤의 칼을 빌리겠단 거였다. 대가만 지불한다면 골드스톤이 그들을 대신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혀 줄 수 있을 테니. 서로 거리낄 것 없이 오로지 돈만 좇아 손을 잡는, 몹시도 노골적이고도 야만적인 거래를 하잔 속내였다.
더불어 정부의 시장 정책 기조도 사모 펀드 중심의 M&A 재편을 환영하는 쪽으로 노선을 잡은 듯했다. 아무래도 그것 역시 서정혁의 작품인 게 분명했다. 안성태를 비롯한 야당 의원들까지 한목소리로 관련 법안을 발의하겠다 말하는 걸 보면.
사모 펀드가 먹튀 자본이라는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규제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이었는데, 대체 또 언제, 어떻게 이렇게 구석구석 로비를 한 건지.
모든 게 다 라이언 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말들이 죄 그가 짜 놓은 판 위에서 그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거였다.
그게 신기하기도 무섭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겐 너무 먼 사람인 것 같아서. 퍽 힘들었을 과거를 지닌 ‘동류’로 묶기엔 손에 쥔 게 너무나 다른 기분이라.
현서는 야속하리만큼 잠잠하기만 한 제 핸드폰 액정을 가만 내려다봤다.
연락은 드물었다. 생각보다 복귀가 늦어질 것 같다는 짧은 연락을 받은 것도 사흘 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쓸데없이 먼저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솔의 말마따나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며 일상을 주고받는 일 따위를 할 수도 없잖은가, 간지럽게.
그럼에도 그가 궁금하고 마음이 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뉴욕에서의 일은 잘되어 가는 건지,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돌아온다면 언제 돌아오는지. 아니, 다시 돌아오기는 하는 건지. 부질없는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봤자, 답도 없을.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현서는 핸드폰을 손에 꼭 움켜쥔 채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꼭대기 층, 이제 막 퇴근 준비를 하는 듯 분주히 움직이던 비서 몇 명이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 묵례를 했다.
“이 자료만 책상에 올려만 놓고 나올게요. 본부장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볼 수 있게 원본 그대로 올려놔 달라고 말씀하셔서요. 저 신경 쓰지 말고 퇴근들 하세요.”
잠시 곤욕스러운 표정을 짓던 비서들의 표정이 다시 편안해졌다. 현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본부장실 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섰다.
서정혁의 공간. 그의 사무실엔 그가 남기고 간 향기가 가득했다.
또각또각, 발끝을 움직여 들고 온 서류를 커다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가만히 빈 의자를 바라봤다. 그가 늘 몸을 푹 기대어 앉던 의자의 크기가 생각보다 거대했다. 불현듯, 이 의자에 앉아 느른한 표정으로 제게 얄미운 말만 골라 하던 그의 표정까지 눈앞에 생생해져 어쩐지 가슴이 뜨끈거렸다.
일할 땐 완전히 바뀌는 서늘한 눈매로 저를 바라보던 시선은 또 어떠했던가. 그 새카맣고 깊은, 블랙홀 같은 눈동자와 한 번 마주치고 나면 결박당한 듯 굳은 몸이 저릿저릿 울어 대던 건 분명 퍽이나 당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매혹적이고 우아한 눈빛에 홀리지 않을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던 게 원죄였다. 솔의 말처럼, 처음 시작을 했던 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발을 디디질 말았어야 했다. 서정혁의 지옥에.
천천히 소파에 피곤한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러곤 방 주인을 닮아 서늘한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 곳곳을 살핀다.
가만히,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반짝거리는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을 배경 삼아 서 있던 남자를 떠올리고 있노라니 내 위태롭던 마음이 더 삐걱이는 것만 같았다. 가장 높은 이곳, 꼭대기 층에서 모든 걸 제 발밑에 두고 내려다봤을 서정혁이 몹시도 그리운 밤이라. 그 오만하고도 얄미운 조소마저도 간절해지는 것만 같은 착각에 시달리며 입술을 물었다.
그립다. 많이도 그리웠다.
실상 서류는 핑계였고, 그냥 그가 그리워 주인도 없는 빈 사무실에 들어온 거였다. 고작 안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그리운 건지. 낯선 그리움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언제까지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지울 수 있을는지. 생각과 달리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마음의 무게가 짐처럼 느껴졌다.
정적은 무심하리만큼 고요했다. 늘 그가 만지작거리던 암레스트 위에 손가락을 올려 얹고 눈을 감았다. 종일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여린 몸이 나른한 온기에 스르륵 잠식당하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꿈을 꾸길 바랐다. 상냥했던 감촉과 부드러운 온기. 안락한 안도감. 서정혁이 아니었다면 아주 몰랐을, 그 따뜻한 꿈을 다시 한번 더 꿀 수 있기를.
고적하고 간절한 어느 겨울의 밤이었다.
***
오래도록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쩐지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게 느껴져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소파에 쪼그려 누운 제 몸 위, 커다란 담요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 따뜻한 그것에선 낯설지 않은 묵직한 향수 냄새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홍빛 빛이 새는 쪽을 바라보았다. 비어 있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제가 올려다 놓은 서류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반짝한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앉은 남자의 모습이 한 폭의 명화처럼 고아했다.
아직 꿈인 건가 싶을 만큼 비현실적이어서, 현서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꿈이라면 부디 깨지 않기를.
“차 팀장님 나 없는 동안 일 무지 열심히 하셨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세워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서류에 눈동자를 붙박은 채였다.
“트집 잡고 싶어도 잡을 게 좀체 없어서 아쉬울 지경이야.”
그간 메일로만 검토하고 결재받았던 서류를 다시 하나하나 검토하는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다. 어려운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언제… 오셨어요?”
그의 공간에서 그를 그리워하느라 정신을 깜빡 잃고 잠들었단 사실이 부끄러워 흐트러진 머리칼과 차림새를 괜스레 매만져 댔다.
“오셨으면 깨우시지.”
“사람이 들어와도 모르게 아주 푹 주무시길래. 잠꼬대까지 하면서.”
그가 그제야 새카만 눈동자를 치켜올리며 저를 바라본다. 매끈하던 이마에 슬쩍 주름이 생겼다. 그마저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지만.
“몰랐네. 나 없는 틈에 차현서 씨가 이렇게 내 방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을 줄은.”
“죄송합니다. 잠깐 앉아 있다 나간다는 게 그만 깜빡 잠이 들어서.”
그가 보고 있던 종이를 손끝으로 톡, 튕기며 덮고는 커다란 의자에 느른히 등을 기대 몸을 묻었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요?”
착각인 건가. 왜 별것 아닌 그 목소리가 그렇게나 다정하게 들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부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야. 되게 안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차현서.”
피식하며,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남자의 입꼬리가 매끈히 말려 올라갔다. 당황해 굳은 제 얼굴이 아마도 그의 눈에 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하나도 안 궁금한 얼굴이라 단언하는 건지도.
그래도 오랜만에 매끈히 웃는 서정혁의 얼굴을 보니 한숨이 놓였다. 뉴욕까지 직접 가서 해결해야 한다던 일을 잘 끝낸 것 같아서. 물론, 저따위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게 뭐든 완벽하게 해내고야 말 그이지만.
“어쨌든 일 잘 마치고 오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말씀하셨던 예정보다 일정이 길어지시는 것 같아서 걱정했었거든요. 통 연락도 없으시고 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뒷말을 삼키듯 흐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행여나 그의 연락을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걸 들키진 않으려나, 심장이 작게 콩닥댔다.
“먼저 연락할 생각은 왜 안 하고.”
느긋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설마, 타박은 결코 아닐 질문이므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태연한 척 답을 했다. 제발 이 눈치 빠른 남자에게 아무것도 들키지 않기를. 어둠을 핑계 삼아 떨리는 표정을 애써 감춰 본다.
“바쁘실까 봐요. 일 방해하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그랬지. 싫어했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과거형의 어미를 낮게 곱씹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블랙홀처럼 깊은 남자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제게 맞닿았다. 시선만으로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그는 알까. 늘 이렇게 그 앞에 서면 가릴 것 하나 없이 발가벗겨지는 듯해 어지러웠다.
“이리 와요.”
가만히 저를 응시하던 그가 제 앞으로 턱짓을 하며 짧게 말했다. 나른히 풀어진 표정의 남자는 어딘가 위험한 구석이 있었다. 거부할 수도 없게 위압적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얼른.”
요지부동으로 굳어 앉은 그녀를 보며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지막이 채근했다.
결국, 현서는 그 눈빛에 홀린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또각또각. 한걸음, 한걸음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옅은 플로어 스탠드 조명의 빛을 받은 남자의 얼굴이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잘 깎은 조각처럼 매끈하고 날렵한 얼굴선. 눈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또렷하고 짙은 이목구비들.
짧은 시간, 내내 그리워했던 남자. 서정혁이 코앞에 앉아 저를 응시했다.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리고, 더 짙어진 그의 눈매가 더없이 집요하게 느껴져서, 얼굴 전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맥동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어려울 만큼.
“좀 괘씸해지려고 하는데.”
낮은 혼잣말을 읊조린 그가 느긋이 손을 뻗어 제 허리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남자의 허벅지 사이로 빨려 들어가 섰다. 느껴진 묵직한 스킨 향에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가, 요?”
“이거 나 없다고 너무 신난 얼굴 아냐.”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며 허리를 꺾었다. 제게 쏟아지는 정염 가득한 그 시선에 포박되어 제대로 피할 수조차 없는 기분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제 끝났어.”
“또 뭐가요.”
“자유 시간.”
매끈하게 뻗은 남자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