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49화 (4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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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차 씨!”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에, 차선엽은 지게차의 작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돌아보니 같이 일하던 사람들 모두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됐구나.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차에서 내려왔다. 온몸에 땀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실종선고 취소 절차가 완료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중장비 면허를 따는 거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면허증을 받아 들고 곧장 일자리를 찾았다.

아직 일이 서툴러 몸은 더 고되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더없이 편안했다. 오랜 세월 죽은 사람으로 살아왔던 그에겐 자신의 이름으로 정당히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기에. 산 사람으로 마음껏 숨 쉬고 살아가는 기분. 이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거였다.

타박타박. 장갑을 벗으며 서둘러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자, 깐깐한 작업 반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반장은 처음부터 나이 많고 경력 없는 초짜 신입인 차선엽을 몹시도 아니꼽게 여겼었다.

“거 점심시간 얼마나 된다고, 빨리빨리 좀 움직이시지. 나이가 많으셔서 그러신가, 뭔 놈의 행동이 이렇게 굼떠요?”

“죄송합니다.”

멋쩍게 웃으며 저보다 한참 나이 어린 반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차선엽을 안쓰럽게 본 동료가 말없이 툭, 어깨를 친다. 괜찮냐는 듯이.

그러나 정작 차선엽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더 열심히 일해서 더는 딸에게 신세 지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마련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어떤 고생도, 어떤 멸시도 다 상관없었다. 그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현실에 감사할 뿐.

현장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우르르 근처 함바집으로 향했다. 맛은 좀 형편없어도 가격이 워낙 저렴해 인기가 많은 식당이라 조금만 늦어도 한참을 줄 서 먹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걸음을 옮기던 그가 불현 멍하니, 자리에 멈춰 섰다.

“뭐해, 얼른 안 오고?”

함께 걷던 동료가 휙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차선엽의 불안한 시선은 온통 저 너머의 어딘가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봐! 차 씨!”

동료가 다시 차선엽을 부르며 다가가려 하자, 차선엽이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머, 먼저 가서 먹고 있게. 나는 잠깐 어딜 갈 데가 있어서.”

“뭐? 어딜….”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차선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님이 찾아오셨나.

저 멀리, 차선엽이 향하는 곳에는 차선엽과 매우 닮은 얼굴의 초췌한 사내가 서 있었다.

***

차선엽은 낚아채듯 차문엽의 손목을 이끌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온 힘을 다해 동생 차문엽의 멱살을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어떻게…!”

“형님! 이거 좀, 놓고!”

목을 바짝 움켜쥐는 차선엽의 아귀힘에 차문엽이 숨을 컥컥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차선엽은 치밀어 오른 분노에 어쩔 줄을 모르며 이를 바득 갈았다. 하나뿐인 형제이자 그렇게 찾아 헤매던 철천지원수.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제 손으로 동생의 목을 조여 죽이고 싶었다. 동생 차문엽이 바로 제 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또 다른 장본인이었으므로.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네가 살아 있어!”

차문엽은 형 차선엽이 도망을 간 사이 미성년자였던 현서의 후견인을 자처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차선엽의 재산을 되팔아 처분한 뒤 해외로 도망을 갔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었다.

그간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동생의 등장이 불길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불쑥 제 앞에 나타난 건가. 얼마 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서 호흡기가 든 택배를 받은 뒤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으니 더욱 초조한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동생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크흑! 이거 좀! 놓고 말합…! 큭!”

“이 개새끼! 천하의 호래자식!”

거친 욕지거리가 쉴새 없이 터졌다. 이성이 나간 듯 눈이 시뻘게져 있던 차선엽은 급기야 제 동생의 몸을 몰아붙여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무렇게나 나뒹군 차문엽이 쿨럭쿨럭,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야비한 눈을 거들떴다.

“아, 형님! 오랜만에 본 동생한테 인사가 너무 과격한 거 아니요?”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죽여 없애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으나, 간신히 마음을 누르는 중이었다. 또다시 현서에게 제 짐을 대신 지게 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 짓을 해 놓고도 네놈이 감히!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나! 어떻게…!”

“너무 그렇게 죽일 듯 보지 마쇼. 나도 그동안 죗값 치를 만큼 치렀으니까.”

“뭐?!”

“지금 내 거지 같은 꼴을 보라고요. 이게 사람 꼴인가.”

스스로를 자조하듯 읊조리며, 차문엽은 툭툭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초췌하게 깡마른 차문엽의 꼴이 꼭 도망자나 다름없었다.

“형님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나도 그간 고생 많이 했수다. 괜히 말도 안 통하는 외국 나갔다가 할 일 못 할 일 다 해 가며 바닥을 기었다고. 목숨이 질겨서 살아 있는 거지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그래! 차라리 뒈지지 그랬냐!”

“그러게. 지금이라두 형님이 나 좀 죽여 주면 고맙구.”

차선엽은 뻔뻔하게 이죽거리는 동생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그래도 형님은 잘사는 것 같아 보기 좋수. 진짜 어디서 죽었으면 불쌍해서 어쩌나 걱정 많이 했는데요.”

“너 무슨 수작이야!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뭐냐고!”

남보다 못한 사이인, 원수 같은 놈이 갑자기 나타난 건 필시 꿍꿍이가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중국으로 러시아로, 여기저기 쫓겨 다니다 한국 들어온 지는 한 석 달쯤 됐수. 나이가 들었는지 이상하게 자꾸 고향 생각이 나더라고. 거지꼴로 죽더라도 타지에서 객사하는 것보단 고국에서 죽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아예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더없이 꺼림칙하게 들렸다. 건들건들 묘한 웃음을 짓는 차문엽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댄다.

“한국 땅에 내가 의지할 사람이 형님 말고 또 누가 있겠수. 그래서 내가 여러모로 형님을 찾아다녔지.”

“난 너 같은 놈 모른다! 그러니 행여나 나한테 빨대 꽂을 생각일랑이거든 기대도 말고 그만…!”

“거, 현서가 꽤 잘나가는 변호사가 됐던데요.”

불현듯 그의 입에서 나온 딸의 이름에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이 뱀 같은 놈이 대체 무슨 협박을 하려는 건가.

“어디, 현서한테 접근하기만 해! 그럼 네 원대로 네놈 모가지를 당장에 비틀어줄 테니까.”

차선엽은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무서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눈빛엔 정말로 섬뜩한 살의가 그득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차문엽은 그저 킬킬거리며 제 형을 비웃을 뿐이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데 진짜 너무하시네, 형님.”

“다신 눈앞에 나타나지 마!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으니!”

차선엽은 동생을 당장에 죽여 버리고 싶은 증오심을 억누르며 외면해 돌아섰다. 더 얼굴을 맞대고 있다간 정말로 큰일을 칠 것 같아서.

“형님.”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저벅저벅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몇 걸음이나 더 떼어 걸었을까.

“현서도 알고 있수? 자기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거.”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적인 이야기에, 차선엽은 몸을 휙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본 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거렸다.

***

팡, 팡!

불현듯 요란한 굉음과 시끄러운 함성 소리, 그리고 나팔처럼 연주하는 클랙슨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제야 오랫동안 태블릿 화면 속에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있던 정혁의 턱이 천천히 치켜 들린다. 윈드실드 너머, 차창 밖 밤하늘엔 현란한 색색의 폭죽이 쏘아져 터지는 참이었다.

“Happy new year.”

운전대를 쥐고 있던 레오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혁은 느긋이 손목을 걷어 올렸다. 이제 막 자정이 지나는 시간. 12월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새해가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차가 왜 이렇게 막히나 했다.]

그제야 주차장이나 다름없이 꽉 막힌 도로의 사정도 눈에 들어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사무실에서 일이나 더 보다 나오는 거였는데. 그는 늦은 후회에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레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답잖은 질문 하나를 던진다.

[한국은 지금 몇 시지?]

[아마 오후 한 시쯤 됐겠죠. 이미 한국에선 열세 시간 전에 새해가 밝았겠고요.]

레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비된 답을 했다. 지금 라이언 서의 모든 사고가 죄 차현서에게로 귀결되고 있음을 잘 아는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 속 정혁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발신자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이런 날들이 뭐라고 의미를 부여해 가며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독설을 날리던 라이언 서의 모습이 꼭 꿈처럼 아득했다.

지이잉.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정혁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액정 속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네, 앤더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녹은 아이스크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얼음장처럼 냉랭히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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