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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세면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사정했을 땐 이미 호텔을 떠나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나 몸을 맞대 놓고도 정혁은 아쉽다는 듯 느릿하게 몸을 떼어 내며 턱을 쓸었다.
밤새 시달린 탓에 침대 위에 가만 널브러져 누운 채로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빠듯한 시간을 확인하며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셔츠 단추를 채우며 시계까지 완벽하게 손목에 걸어 차는 모습. 언제 그랬냔 듯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은 억울하리만큼 멀끔했다.
“예쁘게, 얌전히 잘 있어요. 돌아올 때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이불을 덮어 주며 퉁퉁 부은 입술을 슬며시 핥아 올렸다. 꼭 애틋한 연인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 같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기어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검고 진득한 눈동자로.
대답할 힘도 없이 피곤한 눈꺼풀이 가물가물, 무겁게 가라앉았다. 타박타박. 호텔 방을 빠져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체액으로 흠뻑 얼룩진 침구에서 풍기는 묵직한 수컷의 체향이 나른하게 온몸을 감쌌다.
낯선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
이른 아침 사무실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기척을 느낀 솔이 빠르게 최신 뉴스를 전했다.
“들으셨어요? 조인호 또 파혼했다던데요. 안성태 의원 딸이랑요.”
안타깝지만 예정된 수순이었다. 은성에서고 골드스톤에서고 양쪽에서 제대로 토사구팽당해 하등 가치 없어진 조인호를 제 딸과 그대로 결혼시킬 안성태가 아니었으므로.
“아, 내가 속이 다 시원하네. 아주 쌤통이에요. 나쁜 놈.”
솔은 저가 더 이를 갈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근데 그거…. 뭐예요?”
커피를 내리고 있던 솔이, 확인하듯 다시 고개를 돌리며 물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현서의 목덜미에 가 있다.
“아….”
역시나 많이 튀는 건가.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현서는 벌어진 블라우스 깃을 여며 목걸이를 가리곤 어색한 표정만 지었다.
“뭐냐니까요, 그 엄청나게 번쩍거리는 거?”
평소 현서의 취향을 그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비서로서, 솔은 도무지 그녀 손으로 직접 골랐을 리 없는 화려한 목걸이의 출처가 궁금했다. 머릿속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남자가 뻔히 짐작되긴 했지만.
“선물 받았어.”
“누구한테요.”
“…….”
“누구요.”
민망해 잠깐 답을 망설인 현서의 입에서 기어코 익숙한 단어가 흘렀다.
“…본부장님.”
“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은 솔이 득달같이 다가와 겉옷을 벗어 거는 그녀를 보채듯 응시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아냐, 그런 거….”
“두 분 사귀어요?”
“솔아.”
“그냥 잠만 자는 사이라면서요. 그럼 이건 뭔데요. 잠자리 대가?”
차마 부정할 수 없이 아프게 찌르는 질문이었다. 서정혁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해 대신 뱉은 말이 단순한 ‘잠자리 파트너’란 헛소리였다. 서로, 젊은 남녀가 몸이 동해 합의하에 그러기로 한 것뿐이라고.
“그래. 그런가 보지 뭐.”
애써 표정을 숨기며 담담히 읊조렸다.
“소름 끼치게 기브 앤 테이크 정확한 서정혁 본부장님께서 아무래도 매일 몸 부딪히는 여자한테 뭐라도 걸어 안기고 싶었나 보지.”
“변호사님.”
“왜. 왜 자꾸, 별일도 아닌데.”
“자꾸 거짓말하실래요?”
“거짓말을 왜 해, 내가.”
“제가 변호사님을 몰라요? 지난 몇 년간 연애는커녕 비즈니스로 스치는 남자들한테도 여지 한번 안 주고, 눈길 한번 안 주는 사람이 변호사님인 거. 근데 합의하에 그냥 몸이 동해서 섹스 파트너를 한다고요? 그것도 직장 상사랑, 아무 감정도 없이? 좀 믿을 만한 소릴 하세요.”
솔은 답답해하며 말을 이었다.
“걱정이 돼서 그래요. 아시잖아요, 본부장님은 변호사님이랑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거. 결국엔 변호사님만 상처받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요.”
“상처는 무슨. 조인호랑 끝내는 거 봤잖아. 나 쿨하다며. 근데 나 네 생각보다 더 쿨해, 솔아.”
“후. 어떻게 저보다 더.”
“…….”
“본인 마음을 모르실까요, 변호사님.”
결국, 솔이 한숨을 푹 내쉬며 걱정스러운 듯 저를 응시해 온다. 제 마음을 알아줄 것만 같은 그녀의 이야기에 어쩐지 울컥, 쌓인 감정이 치미는 기분이었다. 마주하고 있으면 괜스레 더 쓸데없는 소리만 나올 것 같아 먼저 눈을 피했다.
“안다고….”
“…….”
“안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아. 네 말대로 서정혁 본부장님,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그니까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마시라구요.”
“…….”
“더 작업해 봐야 가성비도 안 나올 거래는 첨부터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거 변호사님이 맨날 하는 말씀이시거든요.”
끝이 뻔히 보이는데 구태여 진창으로 뛰어들 이유는 없는 거라는 말도 함께하곤 했었다. 철저히 눈에 보이는 이익만 좇자고. 계산기 두드려 가며 한 치도 손해 보는 것 없이 똑소리 나게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잘도 떠들어 댔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왜 이렇게 서정혁 앞에서 바보 같은 마음으로 허우적대고 있는 건가. 혼자만 오물을 뒤집어쓰고 말 결말을 알면서도 진창으로 뛰어들길 서슴지 않는 건가. 왜.
“안 돼요, 절대.”
“…….”
“시작할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니. 시작하셨어도 여기서 그만. 스톱. 그만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솔이의 얼굴을 다시 가만 바라보았다. 저를 저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녀의 눈엔 지금 이 바보 같은 얼굴이 어떻게 읽히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못 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솔이의 미간이 슬몃 움츠러들었다.
“변호사님.”
“못 하겠어, 솔아.”
“하….”
“나 못 멈추겠어.”
반짝 걸린 목덜미의 무게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러 왔다. 주제넘은 마음이 이미 저 멀리까지 앞질러 가고 있었다.
***
커다란 회의 테이블이 있는 미팅룸으로 들어서자 먼저 들어와 서 있던 재수 없는 얼굴 하나가 저를 돌아본다. 벤야민 발터였다. 그러나 아주 잠깐, 흘긋 상대를 확인한 정혁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듯 지나쳐 걸어 지정된 제 자리로 가 앉을 뿐이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양.
[어이, 라이언. 이젠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할 작정인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한 발터가 정혁의 앞에 저벅저벅 걸어와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아시아 자문단이 결정한 부동산 펀드 투자에 대해 서정혁이 시작도 전에 태클을 걸고 재를 뿌리면서, 하마터면 자신의 경영 이사 자리마저 위태로울 뻔했다. 무엇보다 즉각적 손해에 민감한 앤더슨이었으므로 자문단의 연이은 오판이 최근 투자에서 적자만 본 자신과도 관련이 있다 판단한 거였다. 이게 다 뱀같이 교활한 라이언 서 이놈 때문이라고, 발터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우리가 살갑게 안부 인사 주고받는 사인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성난 발터의 표정과 달리, 정혁은 느긋이 의자에 기대앉으며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태블릿 화면을 두드렸다. 대놓고 하는 무시의 제스처였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만 긴장하며 살얼음판 같은 둘의 사이를 바라볼 뿐.
[뭐 하자는 거야, 너. 부동산은 네 소관 아니란 앤더슨 말 못 들었어? 네가 뭔데 감히 날…!]
[우리 마음 약한 경영 이사님께서 많이 놀라셨나 보네.]
정혁은 픽, 입꼬리를 올리며 긴 다리를 꼬았다.
[발터. 한국 속담에 이런 게 있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뭐?]
[사실 나도 한국말이 익숙질 않아서 쓰임은 잘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딱 너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더라고.]
[무슨 개소리야!]
[항상 넌 날 건드리고 자극한 대가를 너무 값비싸게 치르잖아. 안 그래?]
발터는 이미 흥분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지고 있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힘들 만큼 그의 상황이 코너에 몰렸단 뜻이기도 했다. 아마 앤더슨의 결재 서류에 벤야민 발터 경영 이사의 직무 유기 대한 징계 안건이라도 올라온 모양이겠지. 정혁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비뚜름 올려다봤다.
[그러게 왜 항상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먼저 거는 거야. 그렇게 얻어맞는 게 좋으면 차라리 날 링으로 초대하지 그래. 응?]
[이 새끼가!]
[지금 있는 자리 하나도 아등바등 겨우 지키고 있으면서, 무슨 욕심이 이렇게 많아선.]
정혁은 혀를 쯧, 차며 조롱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빌어먹을, Yellow…!]
결국 참지 못한 발터가 손을 덥석 뻗어 정혁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려 할 때였다. 한 발짝 뒤를 지키고 있던 레오가 재빠르게 발터의 몸을 막아섰다. 익숙하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는 정혁은 외려 더 깊숙이 몸을 기대어 앉으며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봐. 넌 너무 감정적이야. 이러니까 늘 실수만 연발하는 거라고.]
흥분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열을 내는 발터와 달리 정혁은 손가락만 톡톡 튕기며 무성의한 충고를 했다.
일촉즉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 살벌한 상황에 눈알을 굴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벤야민 발터와 라이언 서. 두 사람 중 어느 쪽으로 줄을 서야 할지 이미 계산기 두드리는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정혁이 일부러 보란 듯 발터를 자극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이참에 이곳 인간들에게 제 서열을 확실히 각인시켜 보이려는.
느물거리는 그의 입꼬리가 시원스레 말려 올라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때마침 커다란 문 안으로 회의의 주최자이자 앤더슨과 래리가 들어섰다. 이제 막 지루하고 긴 미팅이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