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46화 (4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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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발자국이나 더 걸었을까. 낯선 마음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아무래도 제겐 전연 어울리지 않는 따사로움이다. 불현듯 가슴이 무지근하게 내려앉아 몸을 바로 세우곤 한 걸음,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장 달콤한 순간, 씁쓸한 끝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한 탓이다.

“안 춥긴. 손이 이렇게 얼음장인 주제에.”

다시 떨어져 걸으려는데 뜨겁고 커다란 손이 작고 흰 손 전체를 꾹, 감싸듯 쥐어 당겼다. 몸 전체가 끌려가듯 그의 옆에 다시 바짝 다가붙었다. 쥐인 손이 그대로 그의 코트 주머니 속에 푹 파묻혔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겹쳐 깍지를 끼는 단단한 그 촉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저 차가운 입술을 꾹 눌러 긁으며 발걸음을 옮길 뿐.

“그렇게 물면 다 터져요. 나도 아까워서 제대로 못 빠는 입술을.”

계속 저를 보고 있었던 걸까. 나지막한 음성으로 타박을 하는 그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짧게 마주친 시선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차가운 날씨와 퍽 잘 어울리는 서늘하고 매끈한 얼굴이 저를 향해 있었으므로.

“이, 손 좀.”

기회를 타 슬쩍 빼내려는 손을 결코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가 제 손을 더 꽉 쥐어 잡는다.

“놓고 걸으면 안 될까요?”

“싫은데요.”

“왜요?”

“놓으면 도망이라도 가시게.”

“무슨….”

“기회만 되면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거 내가 몰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또 속을 들켜 당혹스러워진 마음이 벌게진 두 뺨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제가, 언제요?”

“시시때때로요.”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오해. 근데 왜 아직도 짐은 다 안 푸셨을까. 언제들 들고 튀겠다는 거야 뭐야.”

“그거야, 잠시만, 임시로 본부장님 댁에 머물기로 한 거니까….”

“아. 사무실도 임시 사용으로 정했나 봐?”

제 사무실은 또 언제 이렇게 샅샅이 살폈나.

짐을 다 풀지 않은 건 마지막 남은 방어 기제 같은 거였다. 이 자리가 제 자리가 아님을, 언제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걸지도.

현서는 마른침만 꿀꺽 삼키며 그에게 쥐인 손에 꾹, 힘을 줬다.

“가만히 좀 붙어 있어.”

붙어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곁에 머문다고 마음이 닿을 수 있나.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지금 제가 자신을 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지. 얼마나 부질없는 꿈을 꾸는지. 이 남자는 과연 알고나 있는 걸까.

아니. 안다 해도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다. 어차피 서정혁에게 있어 저란 존재는 그저 비싸게 들여온 물건, 돈 값하려 애쓰는 기특한 대리인. 혹은 나쁘지 않은 잠자리 파트너일 뿐 더도 덜도 의미 없을 사람이니까. 그저 반짝이는 별 주변을 스치는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일 테니.

“눈 맞는 게 왜 좋아, 이렇게 춥고 다 젖기나 하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톡톡 털어 내듯 쓸어 넘긴다. 구김 하나 없이 완벽하던 그의 착장이 눈에 젖어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어쩐지 제 탓인 것 같아 슬쩍 미안해졌다.

“그래서요.”

작게 답하자 의문을 품은 그의 시선이 비스듬히 쏟아졌다.

“본부장님은 가끔 한계까지 망가지고 싶을 때 없으세요? 근데 그게 초라하고 비참해지고 싶단 마음은 또 아닌. 뭐 그런 설명하기 힘든 감정 들 때요.”

“…….”

“그럴 때. 내리는 눈 맞으면서 좋아라, 신나게 웃고 떠들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틈에 껴서 위장할 수 있어서요. 초라하고 비참한 마음은 죄 다 숨겨 가면서. 그럼 아무도 내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잘 모르니까. 그래서 동정도, 위로도 아무것도 안 받을 수 있으니까.”

타박. 느리게 걷던 서정혁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완전히 몸을 틀어 마주 선 그가 단단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요, 눈 맞는 게.”

“그래서.”

“…….”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깍지를 낀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왜 망가지고 싶은데, 지금은.”

지금은 그런 이유가 아니란 답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저 당신과 나란히 걷는 길이어서, 함께 맞는 눈이어서 황홀하게 좋은 것뿐이란 솔직한 감정을 완벽히 드러낼 수가 없다.

“하나 묻자.”

“…….”

“차현서 씨한테는, 여전히 사는 게 지옥이야?”

소리도 없이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서늘한 열기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네.”

당신 덕에 평생을 시달렸던 지옥에서 벗어났으나, 신기루 같은, 부질없는 희망만 가득한 사막 위를 걷는 또 다른 지옥에 들어온 것 같다고.

작은 목소리로 짧게 답을 하자, 서정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의미 모를, 낮은 한숨이 길게 섞여 흘렀다.

“와. 생각보다 나를 많이 미워하는구나, 차현서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그저 올려다만 보고 있자, 남자의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다. 알만 하다는 듯 조소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표정이 돌연 차게 식는다.

“그래도 어쩌겠어. 당신 스스로 걸어 들어온 지옥인데.”

“…….”

“받아들이셔야지.”

반대편 주머니에 찔러 들어가 있던 남자의 다른 손이 차가운 뺨에 와 닿았다. 닿는 체온이 지나치게 뜨거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난 말이야, 차현서 씨.”

“…….”

“차갑게 젖은 차현서를 계속 이렇게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볼 작정이야. 뭐 하나 숨길 수도 없이 다 까발려 놓을 생각이고.”

그의 손이 눈발이 스치고 지나 젖은 뺨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며 닦아 냈다.

“그러니까 여기. 내 옆에 붙어서 계속 이렇게 살려 달라고 울고 애원해 봐. 혹시 알아? 어쩌면 나한테도 조금의 아량 같은 게 남아 있을지.”

예의 그 악마 같은 웃음을 짓는 남자의 얼굴이 차갑고 시렸다. 주머니 속 제 손을 꾹 움켜쥔 그 끓는 체온과는 온전히 별개라는 듯이.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본성이 더없이 잔인하다.

나쁜 놈. 이 남자는 정말이지 답이 없다. 이 나쁜 놈에게 마음이 저당 잡혀 주체도 못 하고 잔뜩 흔들리는 저 또한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뺨을 쓸고, 턱선으로 미끄러져 내려간 남자의 기다란 손끝이 목 끝에 걸린 목걸이와 쇄골을 동시에 쓸어 매만졌다.

“지옥도 지옥 나름인 거니까.”

안개꽃 같은 싸락눈이 눈꺼풀 위에서 빼곡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

거친 삽입에 간신히 버티고 선 두 다리가 흐느적거리듯 무너졌다.

“아응…!”

벽을 짚은 두 손이 파들거리며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지만, 엉덩잇살을 아득 쥐곤 제 앞섶에 갖다 붙이는 남자의 손길은 더 집요해지고만 있었다. 탁탁, 고환이 젖은 음순을 뭉개는 박자에 맞춰 센서 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귀두가 자궁 입구를 찌걱찌걱 찧을 때마다 눈앞이 아뜩아뜩 흐려졌다.

교접은 성말랐다. 힐도 벗지 못하고, 스타킹과 팬티만 내린 채 문 앞에 서서 다급히 엉덩이만 흔들고 있는 건 역시나 천박하고 야만적이다.

함께 눈을 맞으며 걷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오랜 키스를 했다. 장난스레 시작한 남자의 입맞춤은 어느새 입술을 뜯고 숨을 흡 빨리는 격렬한 애무로 쉽게 변해 갔다. 결국, 태우던 담배를 내던진 그의 손에 이끌려 근처 호텔까지 정신없이 걸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빈방이 없다던 말은 서정혁의 얼굴을 알아본 호텔 매니저의 등장에 의해 금세 번복되었다.

꼭대기 층의 스위트룸까지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남자는 들끓는 성애를 숨기지 않았다. 거친 섹스의 전조 같은 진득한 키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누구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가정 따윈 이미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은 듯했다. 거대한 육욕의 불씨가 또 예고 없이 댕겨진 거였다.

그러므로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돌려세워지고, 팬티가 내려가고. 흉악하게 솟은 페니스가 음전히 붙은 음순 사이를 무자비하게 가르며 박혀 든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찬 바람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몸이 순식간에 불덩이처럼 데워진 건 당연했고.

“하으, 응! 천천, 히!”

“싫은데요.”

등 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서정혁의 움직임이 고스란했다. 단호하고 뻔뻔한 손가락이 그녀의 치마를 허리춤까지 길게 말아 올렸다. 붉은 센서 등 아래 새하얀 엉덩이가 반들반들 젖어 빛났다.

“미안한데 내가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아요. 공항 가야 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푹푹, 찔러 박는 대로 흔들리고 떨리는 유약한 몸인 걸 알면서도 쑤셔 박는 남자의 추삽질이 제법 거칠었다. 이러려고 잔뜩 먹여 배를 채우고 마음을 풀어 놓았겠지. 다시 한번 깨닫는 바였지만 저를 먹여 살찌우고 잡아먹기를 반복하는 그는 분명 짐승에 가까운 본성을 지녔다.

“흐으, 응!”

찔꺽, 깊숙이 성기를 끼워 놓은 그가 잘록한 허리를 쥐고 턱선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미끄덩거리는 살덩어리가 잇새로 꿀렁이며 휘감겼다.

“우, 음…!”

혀뿌리를 끊어 놓을 듯 휘젓고 감빨며 키스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허리를 길게 쳐올리는 걸 잊지 않는다. 질척하게 엉기고 섞이는 감각이 혓바닥인지 성기인지 모호해질 만큼의 쾌감이 스멀대고 올라왔다. 그의 말대로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호흡이 모자랐다. 현서는 남자의 팔을 힘겹게 부여잡으며 숨을 구걸하고 버둥거렸다.

“후우, 우웁!”

“왜 울어. 밑구멍은 좋다고 이 난리가 났는데.”

눈꼬리에 맺힌 생리적 눈물을 혀로 핥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가 핥고 지난 눈꺼풀과 속눈썹에 거미줄처럼 진득한 타액이 길게 늘어져 뚝뚝 흘렀다. 확연히 더 묵직해진 수컷의 체향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제 곧 더한 위협이, 그리고 그보다 더 아득한 쾌락이 들이닥칠 거라는 걸 감지한 생존 본능이었다.

“아니, 흐읏, 아니, 흐응.”

“아니긴 뭐가 아냐, 또.”

부정하듯 연방 도리질을 치는 그녀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등을 맞잡아 끌었다. 그러곤 페니스를 슬쩍 빼내어 기둥의 뿌리를 작은 손가락 사이에 잡아 주었다. 네 스스로 상황을 확인해 보라는 듯이.

“자. 만져 봐.”

“하으, 으응.”

금방이라도 물기를 흘릴 것 같은 사슴 같은 눈망울이 그를 돌아보며 몸을 떨었다. 진득하게 젖은 기둥이 빠듯하게 벌어진 제 속살을 뚫고 푹, 안으로 짓쳐드는 감각이 제 손끝에 생경히 느껴진 까닭이었다.

더 벌어질 수도 없을 만큼 꽉 맞물린 교합지가 얼얼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 좁은 구멍이 핏줄이 바득 불거진 남자의 기둥이 밀고 들어오자 쩌억, 쩍 소리를 내며 악착스레 입을 벌려 댄단 거였다.

손끝에 고스란한 성기의 교합이 야릇했다. 묘한 흥분감이 저릿저릿 온몸을 관통한다. 땀과 눈물에 전 머리칼을 부드럽게 떼어 넘기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몸을 떨었다.

“이래도 아니야?”

여지없이 무기력했다. 빙긋 웃는 그 미소에 또다시 굴복하는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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