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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레스토랑 홀이 가득, 만석이었다. 서정혁이 어쩐 일로 레스토랑을 통째로 전세 내는 짓을 하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다. 언제, 어디에서고 타인과 복잡하게 뒤섞이는 걸 질색하는 그가.
“크리스마스이브라 이미 예약받은 손님이 많다길래.”
눈빛만으로 질문을 읽어 낸 그가 먼저 입을 뗐다.
아. 크리스마스이브였지.
그제야 상실했던 날짜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겐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날들 중 하나임엔 분명했지만.
북적이는 소음과 낮게 흐르는 클래식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레드와인을 반쯤 채워 내민 그의 잔을 받아 들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온정을 베푸셨네요.”
“그러게. 내가 이렇게나 따뜻한 사람인데.”
뻔뻔한 그의 능청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픽, 터졌다.
“뉴욕엔 얼마나 있다 돌아오실 예정이세요?”
골드스톤 뉴욕 본사에서 주요 임원들의 회의와 연말 송년회가 있어 떠나는 출장이었다. 유력한 후계로까지 점쳐지는 아시아본부장 라이언 서가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고.
“예정은 일주일인데, 상황 봐서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잠깐 자리 비운 틈에 까부는 놈들이 많아져서.”
요즈음 골드스톤 내부의 알력 싸움이 격렬해지고 있다는 건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워낙 압도적으로 유능했던 라이언 서가 한국이라는 다소 작은 시장에 집중하는 의외의 행보를 보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주변인들이 그를 대놓고 공동의 적으로 삼은 듯했다.
평생을 발버둥 치고 악을 쓰며 살았어도 여전히 외줄을 타는 듯 위태로운 그의 모습이 퍽 측은했다.
“왜. 얼마나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을 건가 궁금해?”
“아뇨. 저도 업무 스케줄 짜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느긋이 입술을 붙인 그의 유리잔에 하얀 콧김이 피식 서렸다.
“은성에서 최종 결재된 합의서는 도착하는 대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뉴욕에서도 바로 확인하실 수 있게.”
“출장 가서도 놀지 말고 일이나 하라는 뜻이네.”
“어차피 안 놀고 일만 하다 오실 거잖습니까.”
“차현서 씨가 어떻게 알고. 내가 가서 줄창 일만 할지, 아님 실컷 놀다 올지.”
떠보듯 묻는 남자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모르죠. 혹시 뉴욕에 숨겨 둔 여자라도 있을지. 워낙 소문이 화려하신 분이시잖아요.”
무심히, 경고하듯 말하던 솔이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그런 소문들이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리는 사람. 어딘가 숨겨 둔 여자 하나 없다면 외려 이상할 남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작 일주일, 길어야 열흘 남짓일 이별에 가슴 한구석, 벌써부터 그리움이 이는 저와 달리 일말의 감정 동요도 없을 남자인 게 뻔해서. 제어하지 못한 제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어 절뚝이는데 서정혁 혼자만 꼿꼿이 서 있는 꼴이 문득 억울해져서.
잔을 들어 한 모금 꿀꺽 삼켜 넘겼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씁쓸한 와인 향이 입 안 가득 맴돈다.
“차현서 씨야말로 안 놀고 일만 할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가 있는 동안엔 뒤에 경호는 붙여 놓을게. 안심해요.”
“그럴 필요까진 없으신데요.”
“왜 없어, 지금껏 들인 돈이 얼만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느물대며 하는 남자의 말은 도무지 어디까지가 진심인 건지 알 수 없게 모호하다.
애피타이저 코스가 끝나고, 육질 좋은 메인 스테이크가 제 앞에 놓였다. 포식자처럼 육식을 즐기는 남자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메뉴였다. 맛도 좋았다. 입이 짧아 금세 포크를 놓는 제게도 적은 양이 아쉬울 정도인 걸 보면. 덕분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배를 가득 채웠다.
기분 좋은 포만감과 함께 약간의 취기가 올라 하얀 뺨에 핑크빛 홍조가 돈다. 제게 쏟아지는 서정혁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애써 식사에 집중을 했다. 자그마한 정수리가 버겁게 따끔거렸다.
“이게, 뭐… 예요?”
디저트가 나올 무렵, 와인 잔을 내려놓은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작은 박스 하나를 올려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벨벳 겉감의 케이스였다. 그는 말없이 열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자,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가 융단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뭐예요?”
재차 물으며 그를 가만 마주 보았다. 짙고 까만 눈동자가 저를 향해 느른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우리 수수한 차현서 변호사님 목에 걸리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나한테 주는 건가.
“걸어 봐. 어울리나 보게.”
“왜 이런 걸 주시는데요?”
“말했잖아. 내 옆에 붙는 거, 그게 뭐든 후줄근한 꼴은 못 본다고.”
아무래도 서정혁은 저를 제 주변을 채우는 물건, 혹은 값비싼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제 취향이 아닌 걸 부러 가져다 내밀 리 없었다.
“너무 비싼 물건 같은데요.”
케이스를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가의 다이아 같아 보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간 정재계 상위 계급의 인사들을 상대하며 이런 사치품의 가격이 제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제 몫도 아닐 이런 물건 따위.
“맞아, 비싸. 비싸니까 내가 샀지. 당신 손으론 평생 못 사 볼 물건이니까.”
뻔뻔하게도 부정조차 않는 그가 고개를 젖혀 와인을 들이켠다. 벌어진 잇새를 따라 주르륵, 빨려들어 가는 붉은색 액체가 기막히게 뇌쇄적이다.
“제가 입는 옷들이랑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요.”
“그럼 이참에 입는 옷들을 싹 갈아 보든지.”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걸어 줘?”
말꼬리를 서걱 자른 남자가 길게 꼰 다리를 까딱이며 협박을 했다. 적당히 고집부리고 제 말에 복종하란 뜻이었다.
서정혁을 어찌 이기겠는가. 하릴없이 목걸이를 집어 들어 목에 걸었다. 평범하고 심플하기 짝이 없는 블라우스에 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예쁘네. 당신 얼굴엔 화려한 게 더 잘 어울린다니까.”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예쁘단,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의 뜻이 분명 자신이 아는 것과는 다른 의미임을 알면서도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오롯이 저를 향한 뜨거운 시선과 달콤한 말을 내뱉는 나른한 목소리. 각인이라도 된 듯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묵직한 향수 냄새까지.
그의 시선이 닿은 목덜미가 화끈거려 연방 와인만 들이켰다. 시간이 유독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애원해 잠시라도 더 오래 붙잡고 싶을 만큼.
식사를 마무리하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새카만 밤하늘에 하얀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새 취기가 오르기라도 한 건지, 그게 꼭 안개꽃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캐럴 소리와 어딘가 모르게 들뜬 밤공기. 익숙하지만 낯선, 그 예쁜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 문득 그녀는 저도 모를 이상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좀, 안 걸으실래요?”
고개를 돌려 제 옆의 남자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턱밑까지 코트 깃을 세워 올린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설핏 미소를 짓는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거리는 제법 복작거렸다. 자연스레 나란히 걷는 남자와의 거리가 퍽 가까워졌다. 평소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보폭이 넓고 빠르게 걷는다고 생각했던 그의 발걸음이 꽤 느릿했다. 일부러 제게 맞춰 걷는 것인지 아님 그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뿐인지. 여전히 아리송했으나 뭐든 상관없었다. 그와 이렇게 나란히 걷고 있다는, 이 별것 아닌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한 기분이었으니까.
“안 추워?”
제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묻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네. 안 추워요. 좀 걷고 싶어서요. 눈 오는 것도 오랜만이고요.”
“역시 감상적이야.”
“제가 눈 맞는 걸 좋아해요.”
“응. 역시 나랑 안 맞는다고.”
“그러게 왜 굳이 안 맞는 저를 옆에 두세요? 피차 괴롭게.”
“난 괴로운 적 없는데. 남 괴롭히는 게 인생 최대의 즐거움인 사람한테 무슨.”
“혹시 사디스트세요?”
“참 빨리도 아셨어요.”
남자는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괴롭히는 게 즐거워 죽겠단 표정으로. 불현 억울한 마음이 욱 치밀어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선 그를 쏘아보았다.
“전 준비 못 했어요. 본부장님한테 드릴 거.”
제 발이 저려 던진 말이었다. 목덜미에 달라붙은 값비싼 광석의 무게가 지나치게 묵직해서.
“이런 거 저한테 주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왜 고맙단 말을 이상하게 하는데.”
속을 읽듯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에 입 안이 말랐다.
“네. 감사해요. 선물 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한 줄 알면 말 좀 들어. 진짜 힘든 타입인 거 알지, 당신”
기다란 손가락이 슬며시 목덜미 위에 내려앉았다. 목걸이 줄을 매만지며 함께 살갗에 닿은 그의 체온에 데인 듯 열이 올랐다. 단단하고 새카만 눈동자에 시선을 맞춰 올려다봤다. 취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마주 오던 술에 취한 한 무리가 비틀대며 코앞까지 다가왔다. 미처 피하지 못해 그대로 부딪히려던 찰나였다.
뒤에서부터 어깨를 감아쥔 커다란 손이 가녀린 몸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남자의 품으로 빨려들듯 몸이 안겼다. 묵직하고도 진한 그 향기가 그대로 코끝에 스며든다.
“앞 좀 보고 걷자.”
심장이 발등에 툭 내려앉았다. 저를 품에 안은 채 계속해 천천히 걸어 나가는 남자를 따라 멍하니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 무섭게 뛰어 대는 제 심장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숨을 참느라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보는 사람 불안하게 좀 하지 말고.”
이마 위에서 흩어지는 얕은 웃음소리와 델 듯 뜨거운 체온이 정신을 더 혼미하게 만드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마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밤거리를 걸으며 데이트를 하는 평범한 연인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푹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더없이 행복한 연인들.
이상한 기분이었다. 꼭 마치 서정혁과 연애라도 하는 것 같은, 이 남자의 애인이라도 된 것 같은 황홀한 착각이 마음을 끝 간 데 없이 붕붕 띄워 댔다.
우습지만 그 착각과 오해들이 조금 더 길게 이어지길 바랐다.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사랑.
이 철옹성 같은 남자와 그런 판타지 같은 행위가 결코 가능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꾸는 꿈임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느낀 설렘이 너무 황홀해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영원히 끊지 못할 마약처럼, 함부로 애정을 욕망하고 있는 거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간절하게.
눈앞에 흩날리는 새하얀 눈발이 비현실적으로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