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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신호등으로 바뀐 걸 확인하고 액셀로 발끝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세워 봐.]
레오는 정혁의 한마디에 다시 브레이크를 꾹 밟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흘긋, 백미러를 확인하기 무섭게 정혁은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명품 주얼리 숍이 줄지어 늘어선 신사동 대로 한복판이었다.
레오는 당황해 하릴없이 핸들을 꺾어 차를 세우곤 그를 따라 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자, 걱정과 달리 세상 여유로운 표정의 서정혁이 느긋이 고개를 돌리며 한가로운 질문을 던져 왔다.
[이런 디자인은 너무 화려해서 부담스러울까.]
커다란 손에 걸린 다이아 목걸이가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분명히도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여자.
[또 본인 취향 아니라고 내던지지나 않음 다행이겠지.]
맙소사. 레오는 우려했던 상황에 이마를 짚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우리 변호사님께서 워낙 수수하고 단정하셔야지. 이런 거라도 두르면 좀 보기 나을까 싶어서.]
[본부장님 설마 지금, 차현서 씨 크리스마스 선물 사는 건 아니시죠?]
[아. 크리스마스였나.]
정혁은 능청을 떨며 목걸이를 점원 앞에 내밀었다. 모를 리 없다. 크리스마스에 출장 가 일이나 하게 생겼다고 자신이 입을 삐죽였던 게 불과 30분 전 대화였으니까. 레오는 기막힌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이걸로 계산 부탁해요.”
정교하게 커팅된 다이아가 번쩍이는 화려한 목걸이였다. 점원은 별 고민도 없이 카드를 내미는 정혁이 놀라우면서도 반가운지, 묻지도 않은 물건에 대한 부연 설명을 늘어놨다. 이번 시즌 한정 수량으로 제작된 프랑스 주얼리 디자이너의 작품이며 한국엔 딱 두 점만 들어왔을 뿐이라고.
“나머지 하나는요. 그건 팔렸습니까?”
“네? 아, 아뇨. 아직이긴 합니다만, 구매 의사를 밝히신 분이 계셔서 홀딩해 놓았는데….”
“그럼 그것도 같이 계산해 줘요.”
“…두 개를 다, 말씀이십니까?”
“네.”
“먼저 예약하신 분이 계셔서 두 개 다는 어렵고요….”
“예약한 분이 누군데요.”
“그게, 고객 정보는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는 사항이라….”
“잘됐네요. 그럼 그냥 어떤 미친놈이 두 개 다 사 갔다고 대충 둘러대죠. 그래도 클레임 걸면 여기, 나한테 전화 돌려 주시고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받아든 정혁의 명함을 눈으로 읽어 내리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좀 곤란한데….”
느물느물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능청이 그득했다. 이런 남자에게 이런 선물을 받는 여자는 대체 누구인 건가. 정혁을 마주한 점원의 양 뺨이 당황으로 발그레 상기되고 있었다.
결국, 점원은 숍 매니저의 호출에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나머지 물건 하나도 마저 가지러 창고로 향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률적이고 흔한 물건, 같은 디자인이 수도 없이 많은 기성 제품을 지극히도 혐오하는 서정혁다운 처사였다. 오죽하실까. 아마 제 여자 목에 걸린 목걸이조차도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게 싫으시겠지.
[아무리 봐도 차현서 씨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게, 내가 봐도 그러네.]
[진짜 내던지면 어쩌시려고요.]
[그러진 않을걸. 차라리 어디 갖다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 쓸 여자지.]
가격을 들으면 기함을 할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큭, 웃음이 터졌다. 미쳤냐고, 이걸 왜 제게 주냐며 부담스럽다고 선이나 안 그으면 다행일 거고.
[진짜.]
레오는 결국 목걸이 두 개를 손에 쥐고 숍을 나서는 정혁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단단히 미치셨어요, 보스.]
[동의하는 바야.]
[차현서 씨랑 정말 연애라도 하시는 거예요?]
연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짙은 눈썹이 들썩였다.
“잠자리 파트너, 뭐 그런 걸 말씀 하시는 겁니까?”
도끼눈을 뜨고 흘기며 묻던 여자의 말을 기억했다. 관계의 이름이 뭐든 그게 뭐 대수냐 싶기도 했었다. 그저 입으로 뭐라 정의하느냐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기도 했었고.
그런데 왜인가. 뜻밖의 단어를 듣고 나니 심기가 동했다.
연인 혹은 애인.
확실히 ‘잠자리 파트너’란 그 이름보다는 낫게 느껴졌다. 정신 못 차리게 혼란스럽고, 휘몰아치는 이 감정을 정의하며 깔끔히 갈무리할 수 있는 표현으로는 아주 제격인 것 같아서.
희한한 일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필요하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건만, 같잖고 귀찮게만 여겨지던 그 관계의 이름이 왜 이렇게 간질간질하게 가슴을 찌르는 건가.
다시 차에 올라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푹 기대 눈을 감았다. 타박하는 레오의 목소리가 계속해 이어졌다.
[잊으신 거 아니죠, 차현서가 누구인지.]
[잊을 리가.]
[근데 어쩌려고 이러세요.]
[거야 나도 모르지.]
완전히 고삐가 풀린 감정은 이미 제어할 수도 없이 커져 버렸다.
어쩌려고 이러는 건가.
지난 시간, 차현서를 안고 품으며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여전히 답은 내리지 못했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되레 점점 더 선명해지는 건 마음뿐이라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징그러워하던 인간 부류가 되고야 만 것 같은.
[아니, 답도 없이 어쩌자고 이런….]
[너나 내가 입만 안 열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일부러 차현서한테 접근했는지.]
[뭐라고요?]
[나만 눈 감고 귀 막고 입 틀어막으면 아무 문제 없단 소리야. 내 결론은 그래.]
[그래서 계속 차현서랑 이 간지러운 짓을 하실 작정이시라고요? 괜찮으시겠어요? 차선엽 얼굴만 봐도 살의 느끼는 분이, 그 딸이랑요?]
[안 괜찮겠지, 전혀.]
[근데 왜 이러십니까, 대체.]
[늦었어.]
[네?]
[같잖은 엑시트 전략 다 실패했단 소리야.]
[수습해보려는 시도는 해 보셨고요?]
[안타깝게도 워낙에 피해가 막심해서. 얼만지 손해액 추산도 제대로 안 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발 빼시면 되잖….]
[늦었다니까.]
[라이언.]
스르륵, 천천히 눈꺼풀을 떠올리는 남자의 눈동자에 전에 없던 감정이 어리고 있었다.
[이제 안 되겠다고, 그 여자 아니면.]
결국, 레오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 싶어서.
침묵 속에서, 레오는 상사의 낯선 눈동자를 마주했다. 제 앞엔 골드스톤 라이언 서가 아닌 웬, 완벽히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만 형형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차현서 씨가 본부장님 화려한 이력에 다시 없을 스크래치를 남기겠군요.]
[그러게. 이렇게 인간미까지 추가되네.]
그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다시 운전대를 잡은 레오가 포기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툭툭.
책상을 두드려 누르는 둔탁한 소리에 현서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 낯익은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있나 했더니만.”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 넣은 채 비스듬히 선 정혁이 타박하듯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동그란 눈동자가 의문을 품고 깜빡거렸다. 무슨 일이냔 듯이.
“전화는 왜 안 받아.”
“찾으셨어요?”
의아하게 되묻자 그가 기막힌 표정으로 제 핸드폰 액정을 돌려 보였다. 저녁 8시 36분. 그제야 아차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떠 올렸다. 서정혁과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8시였으니 30분이 훌쩍 지나 있는 셈이었다.
“보여, 몇 신지?”
“죄송해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6시에 이미 미팅이 끝난 회의실에서 혼자 앉아 계속 자료 정리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여기저기 널린 서류들을 주섬주섬 모아 정리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마른 손길에 후드득, 종이들이 아래로 굴러떨어지고야 말았다. 허리를 굽혀 쪼그리고 앉으려는데, 커다란 손이 저보다 먼저 종이들을 긁어 쥔다.
“나보다 더한 워커홀릭은 처음 보는데, 아주 못 쓰겠네. 이거.”
서류 뭉치를 모조리 주워 책상 위에 올린 그가 낮게 읊조렸다.
“연락 안 되면 그냥 먼저 가시지 그러셨어요.”
미안함이 가중되는 것 같아 괜스레 더 퉁명스럽게 대꾸를 했다.
“갈수록 정 없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도 나보다 더하고.”
“본부장님 내일 출장 가셔야 하니까요.”
“그러니까요. 가면 꽤 오래 못 볼 건데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려고요.”
남자가 제 말꼬리의 어조를 따라 하며 빈정거린다. 다시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그가 얼른 나오라는 듯 턱짓을 하며 뒤돌아섰고, 하릴없이 서류를 챙겨 그를 따라나섰다.
“아닌 것 같은데 참 손 많이 가.”
멍하니 조수석에 올라앉아 있는데 우람한 그의 상체가 제 앞으로 기울어졌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어깨를 물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또렷한 남자의 이목구비가 코웃음을 치며 느릿하게 지나갔다. 머리 위에서부터 주욱, 당겨져 나온 안전벨트가 달카닥, 왼쪽 엉덩이 아래에서 채워졌다. 짧은 스킨십에도 손끝이 찌르르 운다.
“특별히 원하는 메뉴는.”
“…없습니다. 그냥 본부장님 드시고 싶으신 걸로 하시죠.”
정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핏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금세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아스팔트 위를 부드럽게 내달렸다.
한 손으로 느긋이 운전대를 쥔 그를 흘긋흘긋 훔쳐봤다. 그렇게나 몸을 섞어 댔음에도 여전히 단둘이, 이렇게나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을 때면 긴장이 되어 숨이 턱턱 막혔다. 아닌 척, 평연한 척을 해도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콩알만 하게 오그라붙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써 봤자 제가 을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까만 차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리에 설핏 비친 남자의 옆모습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버거운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