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오늘은 좀 혼자 출근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이렇게 또 붙잡히고야 말았다. 출근 직전 다가온 그가 갑작스럽게 몸을 붙이며 사정을 하는 바람에 기껏 차려입은 옷이 엉망으로 더럽혀져 다시 싹 갈아입고 나온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식탁엔 어김없이 간단한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이곳에서 머문 지난 열흘 남짓 내내 꾸역꾸역 아침을 먹어야 했다. 정작 본인도 먹지 않으면서 꼭 제게만 먹으라 강요를 하고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 원래 아침 안 먹어요.”
아무래도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만 같은 남자가 앞에 마주 앉아 에스프레소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여전히 입으나 마나 하게 대충 걸친 배스로브 차림으로.
“아침만 안 먹는 게 아니던데요.”
“먹을 만큼은 먹는데요.”
“살 좀 쪄. 한 줌도 안 되는 여자 잡고 좆질 하는 게 얼마나 죄책감 드는 일인 줄 알아?”
“좀, 말을….”
하. 그래, 그냥 내가 말을 말자.
현서는 포기하듯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커피를 홀짝이면서도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얼마나 먹는지 매번 이렇게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젯밤엔 그렇게 무섭고 거칠게만 느껴지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원래의 느긋한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최 속을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을 사람.
커다란 손이 잔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손등은 물론이고 손바닥에도 여전히 선명할 상처 자국이 눈에 거슬렸다.
“그, 손이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뱉었다.
“아직도 아픈 거예요?”
새벽녘.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그건 서정혁의 신음 소리가 분명했다. 오른손을 움켜쥐고 일어난 그가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서 더듬더듬, 약봉지를 찾아 꺼내 침실을 나서는 장면을 실눈을 뜨고 고스란히 목격했었다.
당황스러웠다.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던 남자가, 숨을 죽여 신음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퍽 낯설고 불안해서. 그래서 더 자지 못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걱정스러워서. 모든 게 다 저 때문인 것 같단 말도 안 되는 죄책감도 없진 않았고.
“새벽에 아파서 일어나셨던 것 같아서요.”
“다 봤으면서 뭘 물어.”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히 대꾸했다.
“그렇게 아프면 계속 치료를 하셔야 하지 않아요?”
“소용이 없죠, 그 치료라는 게. 진짜 어디가 부러지고 망가져서 아픈 게 아니니까.”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빤히 봤다. 그가 천천히 제 손등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남자답게 커다랗고 마디가 굵으며 단단한 손이었다. 그러면서도 길쭉이 뻗은 손가락은 수려하다는 단어를 절로 뱉게 했다. 정말이지 발끝까지 빚은 듯 완벽한 남자의 외양에 조금은 기가 질릴 정도다.
그 조각 같은 손등 위, 상처가 이질적이리만큼 크고 선명했다.
“열한 살 때 유리창이 깨져서 손이 다 찢어졌었는데, 다행히 치료는 잘됐어. 흉터는 남아서 좀 흉측하긴 해도 사는 데 문제없이 잘 움직이고, 신경에도 큰 이상은 없는 걸로 나왔고.”
“…….”
“근데, 아까처럼 손이 잘려 나가는 것처럼 아파 자주. 한번 시작하면 너무 아파서 차라리 잘라 버리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끔찍하게.”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극심한 트라우마에 의한 환상통, 이라는 건 내 담당의 설명이고. 쉽게 말하면 정신병. 그러니까 손이 아픈 게 아니고 여기. 여기가 아픈 거.”
정혁은 툭툭,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트라우마.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 절망, 공포, 슬픔, 뭐 그런 부정적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싶을 만큼 오만한 남자가 아니던가.
“무슨 트라우마였는데요?”
어쩌자고 그런 걸 물을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가 제 약점을 개의치 않고 드러낸 만큼,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한 침대에서 뒹굴고, 한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까지 하는데 이 정도는 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남자를 향해 주책없이 나부대는 제 심장의 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드디어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다 생기셨네.”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까만 동공을 느른히 깜빡였다.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나 쓸데없는 걸 물었단 생각을 할 때쯤, 담담하면서도 무지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생이 죽었어. 나 때문에.”
뜻밖의 이야기였다. 심장이 얼어붙은 것 같은 이 남자에게도 가족이 있고, 동생이 있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곤 쉽게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식을 앓았어서 항상 흡입기가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내가 그걸 챙기질 못했거든. 결국 나 때문에 죽은 거지, 그 어린애가.”
동요 없이 말하는 남자의 눈동자 심연에서 이상한 원망이 읽혔다.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감정이라곤 일말도 드러나지 않는데 왜 그게 더 아프게 느껴지는지 또한 모를 일이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생긴 일인가요?”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동생이 죽고, 아버진 자살을 했고. 어머닌 더는 한국에서 살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는지 나를 데리고 뉴욕으로 갔지. 거기 하나뿐인 남동생, 그러니까 내 외삼촌이 있었거든. 거기가 당신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어머니도 결국 죽었단 소리였다. 불우했던 유년의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도 알려진 적 없던 라이언 서의 과거.
남 이야길 하듯,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토로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거칠 것 하나 없이 살아왔을 것 같은 그의 인생에 그런 지옥 같은 시간이 있었단 게 좀체 믿어지지 않아서.
“왜. 갑자기 내가 불쌍해?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
“어쩌면 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서요.”
“뭐가.”
“라이언 서가 왜 이렇게까지 아득바득 악을 쓰고 살아왔는지.”
남자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장족의 발전이네. 차현서 씨가 날 이해하려고까지 하시고.”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다면성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껏 날 ‘나쁜 새끼’라는 일면적 판단만 하셨구나.”
“네. 죄송하게도요.”
망설임 없이 한 솔직한 대답에 그가 큭큭거리고 눈매를 휘었다. 길게 휘어진 눈꼬리가 매력적으로 접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소감은.”
“…….”
“천하의 나쁜 새끼인 서정혁에게도 바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소감.”
안아 주고 싶었다. 세상 두려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오만한 남자를 품에 보듬어 안고 토닥여 주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버림받은 기분. 그게 얼마나 비참한 지옥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저였으므로, 주제도 모르고 눈앞의 서정혁을 위로하고 싶어진 거였다.
“반가워요. 나랑 다르지 않은 인간을 만난 것 같아서.”
“내 소감이랑 같네. 나도 차현서 씨 처음 봤을 때 무지 반가웠으니까.”
남자는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웃는다.
“그리고 힘들었겠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 쓰고 버티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까, 오늘 보니 문득 그런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데.”
그가 제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었다. 그에겐 별 의미도 없었을 그 한마디가 얼마나 제 가슴을 흔들어 놨었는지 되새김질을 하면서.
“힘들긴 하지. 그렇게 보면.”
문득, 낮게 읊조리는 남자의 시선에 또다시 지글지글한 정염이 그득 어리고 있었다.
“서잖아, 또.”
나체나 다름없는 꼴로 장난기 가득, 자유분방함을 넘어 불량스럽기 이를 데 없다. 늘 그렇듯 날뛰는 야생마처럼 제멋대로다. 언제 봐도 무람없고 재수 없다.
테이블 아래 흉흉하게 일어서고 있을 남자의 아랫도리가 떠올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니, 실은 자꾸만 빈틈없이 맞춰 오는 숲처럼 어두운 눈동자 때문이다. 마주하고 있으면 끝끝내 제 속을 다 읽어 낼 것 같은 그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욕심내지 않기로 한 마음이었다. 그저 이렇게 서로 즐기다 어느 순간 끝낼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손쉽게 끊어 낼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저를 떠나갔듯, 눈앞의 이 애틋한 남자 또한 언젠가 저를 버리고 떠나갈 것임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왜 이지와 달리 가슴은 점점 더 큰 소리로 쿵쿵거리는가. 지옥 불인 걸 알면서도 뛰어들고 있는 부나방이 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미 이 악마 같은 남자에게 마음을 장악당한 지 오래라는 걸 알았지만, 점점 더 끝 모를 수렁으로 빨려들어 가는 심정.
아무래도 적잖이 위험 수위였다. 코끝에 깊게 스민 남자의 체향처럼.
“다 먹었어요. 출근할게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한하지.”
“…….”
“차갑고 도도하고. 못되고 고집도 세고. 게다가 말은 더럽게도 안 듣고.”
길게 꼰 다리를 까딱이며 의자에 등을 푹 기댄 그의 음성이 느른했다.
“도대체가 살가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왜 자꾸 내 눈에 차현서 씨가,”
“…….”
“예쁘게 보일까.”
잘못 들었나 싶어 동그란 눈동자를 크게 떠올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진담 같은 농담을 내뱉는 남자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래도 제 마음이 죄 읽혀 또 저를 갖고 노는 건가 뭔가 싶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시선을 피하며 다시 돌아섰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고스란히 흔들리는, 만만한 상대를 자처하고 싶진 않은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