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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40화 (40/115)

♬(40)

“하…. 그래. 별일 없구나.”

현서를 마주한 차선엽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소 더 마른 것 같은 노안에 그제야 혈기가 퍼졌다. 내 초조했던 기색이 역력했다.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잦아진 안부 전화도 모자라 갑작스레 회사 앞으로 찾아온 그의 행동을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현서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말씀하세요. 무슨 일 있으시죠, 요즘.”

차선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 일 없어.”

“아빠.”

“정말로 아무 일 없다.”

“근데 갑자기 여긴 왜 오셨는데요.”

“그냥 근처 지나가다가 네 생각 나서 들렀대도.”

믿으라고 하는 말인 건가. 그 뻔한 거짓말을 모른 척해야 하는 건지, 아님 계속 추궁을 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갑자기 핸드폰 번호도 바꿨다고 하고. 여러모로 걱정돼서 들른 것뿐이야. 얼굴이나 보면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서.”

“제 걱정되면 무슨 일인지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래야 대비를 하니까. 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날벼락 맞기 싫어요, 저.”

불안에 잠식당한 차선엽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오래전 그날의 일, 그러니까 그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던 그날에 대해선 현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죽은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그녀는 그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빚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을 따름이었고. 제 부친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그래서 한 사람, 아니, 한 가족의 삶을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는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였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일을 고백하는 순간, 정말로 다시는 이렇게 딸의 얼굴을 마주할 수조차 없어질 테니까.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끝까지 몰라야만 했다.

“됐다. 얼굴 봤으니 됐어. 너 바쁠 텐데, 난 이만 가야겠구나.”

차선엽은 그길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사는 듯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긴 한숨만 뱉었다.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없었다. 어떻게 하다 그 큰 빚을 진 건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리 물어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딸에게 큰 짐을 던진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유만이 아닌 것 같단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만 더해 갈 뿐.

기껏 저녁 회식 자리도 마다하고 뛰어나왔건만.

현서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핸드폰을 들었다. 준한은 여전히 제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많이 화가 났다는 뜻이겠지.

“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신호음만 길어질 뿐, 받지 않는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선배.”

- 왜 자꾸 전화야, 나 지금 너 꼴도 보기 싫다니까.

***

“선배 무슨 말 좀 해라. 나 지금 되게 미안하고 민망하고 그런데. 응?”

벌써 30분째. 말없이 우동 면발만 들이켜는 준한을 바라보며 볼멘소리가 절로 터졌다.

“밥만 같이 먹어 달라며. 말까지 해야 해?”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맞아. 내가 나쁜 년이야. 내가 다 잘못했어.”

빈 잔에 따끈한 청주를 따라 부어 그에게 내밀었다. 흘긋, 잔을 바라보기만 할 뿐 받지 않는 그가 어려운 질문을 되던져 왔다.

“뭐를.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알아. 선배 걱정하는데 연락도 없이 그런 일 있었던 거, 말도 안 하고 걱정만 하게 하고.”

“아. 다 아는 놈이 그랬다니까 더 미우려고 그러네.”

“안 받을 거야? 안 받으면 이 술 내가 다 마신다?”

가득 찬 술잔을 흔들며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제 입술로 가져가자 준한이 커다란 손으로 휙, 잔을 채어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잘도 못 마시는 게 협박만, 맨날.”

익숙한 준한의 타박에 현서는 샐쭉이 미소를 지었다. 결국, 준한도 어이없다는 듯 핏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제야 좀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어디서 지내는데. 솔이 씨네?”

“어?”

“설마 그 집에서 그냥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언제 또 그 미친놈이 들이닥칠 줄 알고.”

“혹시 김 변호사님이랑 화해하셔도 그건 절대 말씀하지 마세요.”

불현듯 솔이가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서정혁과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알면, 준한 역시 솔이처럼 서정혁과 자신의 관계를 오해하고 판단할 게 뻔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백 프로 오해인 건 아니지만.

“설마 변호사님. 본부장님 좋아하는 건 아니시죠?”

솔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제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 정말로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어질까 봐. 도대체 언제 마음이 여기까지 온 걸까. 어쩌자고 그 위험한 남자를 마음에 품게 된 걸까.

결국엔 상처만 남을 결말임을 알면서도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처음, 제게 내밀어졌던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맞잡았던 그때부터.

“응. 솔이랑 같이.”

저도 모르게 나온 거짓말이 꽤 자연스러웠다. 이런 걸 두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는 거겠지. 괜히 기분이 이상해 맹물을 벌컥 들이켰다.

“불편하겠다. 근처에 빈 오피스텔 있는데, 거기서라도 지낼래? 크진 않아서 좀 그렇긴 하지만.”

“아냐. 괜찮아, 편해. 다른 데, 적당한 곳 알아보는 대로 금방 나갈 거야.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괜히 더 손사래를 치고 거절을 했다. 다행히 준한은 의심 없이 듣는 듯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우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둔 준한의 핸드폰이 둔탁하게 진동했다. 그는 액정 위에 뜬 ‘어머니’란 이름을 확인한 순간 가차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현서의 눈이 동그래진다.

“왜 안 받아? 어머님 전화 같은데.”

“받아 봤자.”

“받아 봤자 뭐.”

뒷말을 삼키고 술잔을 들이켜는 준한의 한숨이 깊었다.

“뭐냐니까.”

재차 물으며 답을 기다리듯 바라보았다. 망설이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선이나 보라는 거겠지.”

“선?”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결혼이나 여자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준한에게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거였다.

“어머님이 선 보라셔?”

“요즘 왜 이렇게 집요하신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누구 때문에 머리도 아파 죽겠는데.”

“보면 되지, 왜. 어머님이 만나 보라고 하는 여자면 꽤 괜찮은 여자일 거 아냐.”

준한은 그저 대답 없이 술잔을 채울 뿐이었다.

“만나 봐. 어떤 여자인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봐야 어떤 사람이 선배랑 잘 맞는지도 알 거고. 얼른 결혼해서 잘 살아야지. 어머님 걱정하신다.”

진심으로 준한이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랐다. 제게 없어 더없이 좋은 사람이니까. 행복이라는, 어쩌면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그 완벽한 상태를 대신 이뤄줄 그 누군가가 제 옆의 준한이길, 그녀는 간절히 소원했다.

“너는.”

“응?”

“너는 남자 만날 생각 없고.”

불현듯 던져진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결혼. 누군가에겐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그 단어가 제겐 너무 낯선 까닭이었다.

“됐어, 난. 조인호 하나로도 충분히 주제 파악했어.”

“네 주제가 어떤데.”

“봤잖아. 욕심부리다 큰코다치는 거. 내 주제에 무슨 남자야. 그냥 일이나 하고 돈이나 벌면서 살게.”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에 입술을 슬쩍 가져다 댔다. 뜨끈한 술의 온도가 입 안에 담뿍 스며들 때였다.

“그럼 둘이 결혼할래, 우리.”

문득 들려온 이야기에 현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를 바라보는 준한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농담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말이었다.

“우리 집이 은성만큼은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그래도 네 커리어에 꽤 도움은 될 것 같은데.”

“선배.”

“너도 어차피 남자 만날 생각 없다고 하고. 나도 누구랑 결혼할 마음 없는데 계속 부모님께 시달리느니 그냥 우리 둘이 결혼하면….”

“뭐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현서는 그냥 말을 끊고 허탈한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지만, 그녀로선 농담이어야만 하는 말이었으니까. 고작 청주 몇 잔에 취했을 리도 없었고.

“왜 말이 안 되는데?”

“선배랑 나랑, 아니. 우리가 무슨 결혼이야. 아무리 우리가 친해도 결혼은 아니지. 행여나 어머님한테 그런 소리 꺼내지도 마. 진짜 놀라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요. 차현서 씨야 뭐, 그럴 수 있다 치고. 근데, 김준한 씨도 당신 생각에 동의할까요.”

그 짧은 순간, 서정혁의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까지 떠올라 버렸다. 우습기도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확연히 헛소리였다. 준한이 제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지만.

현서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가.”

진지하게 굳어 있던 준한의 얼굴이 그제야 고개를 떨구며 핏, 쓴웃음을 뱉어 냈다.

역시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져 본 말이겠거니. 그녀도 비로소 안도하며 마주 웃었다.

입 안 가득, 씁쓸한 술만 머금은 준한의 마음은 전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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