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난 저녁 무렵. 거리의 가로등 불이 환하게 빛을 내고, 카페의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는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하나둘 늘어나는 시간이었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불현듯 말을 끊은 준한의 목소리가 더없이 사나웠다. 다른 손님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격한 반응의 놀란 현서의 눈동자도 둥글게 부풀었다.
“선배….”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했었어야지, 넌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하.”
준한은 화를 억누르듯 잠시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흥분하는 건 분명 평소 한없이 차분한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아? 너랑 연락은 안 되지, 솔이 씨 연락처도 없어졌지, 당장 일 다 팽개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고. 혹시 또 무슨 나쁜 일 생긴 건 아닌가, 어디 아픈 건가 다친 건가. 무슨 일이 났나. 일주일 내내 마음 졸여 가면서 오만 가지 상상을 다 했어. 알아, 너?”
이렇게까지 무섭게 화가 난 김준한의 얼굴은 처음이라, 현서도 조금 당황해 입술을 씹었다.
준한은 몇 시간 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하필이면 그는 현서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던 그날 일본으로 출장을 떠났었다. 현서와 연락이 닿지 않는, 그녀를 떠나 있던 그 짧은 일주일이, 준한에겐 더없이 긴 지옥이었다.
“미안해, 선배. 상황이 좀 정신이 없었어.”
현서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제가 보기에도 준한이 얼마나 걱정을 했었던 건지가 눈에 선했다. 저보다 더 수척하고 까칠해진 얼굴이 그 마음을 방증했다.
“너한테 나는, 도대체 뭐냐?”
준한이 불현듯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따뜻하고 다정한 선배. 소중하고 가족 같은 동료. 저도 모르게 의지하게 되는 친구.
준한의 질문에 현서는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인생과는 퍽 어울리지 않을 그런 단어들을 유일하게 선물해 준 사람이 준한이었으므로.
그러나 선뜻 답이 나오질 않았다. 마주한 준한의 눈빛이 부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너. 진짜 이기적이야, 차현서.”
“…….”
“못돼도 너무 못돼 처먹었어.”
드르륵. 의자를 거칠게 밀고 일어난 준한이 그대로 성큼성큼 나가 버린다. 당황한 현서는 황급히 그를 따라 나갔다.
“선배.”
다급한 부름에도 준한은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 늘 현서의 뒤를 지키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차가웠다. 결국 그녀가 뛰다시피 쫓아가 그의 팔을 잡아 세운다.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용서해 주라. 응?”
이렇게 냉랭한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 현서는 저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잘 알았다. 준한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저를 많이 걱정해서라는 걸. 입장이 바뀌었어도, 저라도 이렇게 화를 냈겠다 싶었다.
“이렇게 화내는 거 이해해. 나라도 아마 선배만큼….”
“이해?”
말을 끊는 준한의 목소리가 차디찼다.
“네가 날 이해한다고?”
“…….”
“아니. 너 몰라. 네가 내 마음 조금이라도 알면 나한테 이렇게 안 해. 아니, 못 해, 절대로.”
“…….”
“내가 맨날 네 옆에서 등신, 천치처럼 허허실실 웃고만 있으니까 너 내가 우습지.”
“선배.”
“그래. 내가 오죽 우습게 굴었으면 그랬을까 싶다.”
준한이 자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런 거.”
“미안한데 차현서. 나 도저히 지금 네 얼굴 못 보겠다. 먼저 갈게.”
준한이 다시 발을 디뎠고, 그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은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지난 10년간 유일하게 제 옆에 변함없이 있어 준 사람. 그림자처럼 늘 함께였던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 외로이 혼자였다 생각했던 순간에도, 떠올려 보면 제 곁엔 항상 준한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결국은 핑계를 대고 저를 떠났어도 김준한이란 사람만은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던 거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나 무례하게도.
낯선 준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현서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씹으며, 솔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놨던 현서로서는 그녀의 미지근한 반응이 영 마뜩잖아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진짜 심각한 상황이라니까.”
“심각하죠. 그 천사 같은 김준한 변호사님이 그렇게 심한 말까지 해 가면서 화를 내셨다는데.”
“근데 반응이 왜 이래. 자업자득이다, 뭐 이런 거야?”
“자업자득이라기보단, 터질 게 터졌다는 말이 맞겠죠.”
“…뭐?”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듯한 현서의 표정에, 솔은 저도 모르게 혀끝을 끌끌 밀어 찼다.
“에휴. 그렇게 똑똑하고 눈치 빠르신 분이 왜, 본인 일엔….”
“솔이 너까지 나한테 이럴래?”
현서는 커피 잔을 툭,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잖아도 속 시끄러운 일이 끊이질 않는데 준한과의 관계까지 뒤틀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어쨌든, 준한이 답답해 저를 먼저 찾아오게 한 건 제 불찰이고 실수였다.
“그래서 본부장님 집에서 계속 그렇게 지내기로 하신 거예요?”
솔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현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요?”
“모르겠어. 지금은 일도 너무 바쁘고, 정신도 없고, 좀 무서운 것도 사실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김 변호사님한테 이 얘기까지 했어요, 설마? 본부장님 집에서 같이 지낸다고?”
“아니. 그건 아직.”
자신이 정혁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현재 솔뿐이었다.
“와, 다행이다.”
솔은 정말 다행이라는 듯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혹시 김 변호사님이랑 화해하셔도 그건 절대 말씀하지 마세요. 네?”
“왜?”
“또 칼부림 경험하고 싶으세요?”
“뭐?”
“변호사님 혹시 본부장님이랑 뭔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불현 날카로워지는 솔의 눈빛에 추궁의 의미가 담겼다. 현서의 눈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괜스레 제 발이 저리는 기분에 가느다란 눈꺼풀이 연방 깜빡댔다.
“무슨 일?”
“젊은 남녀가 한집에 단둘이 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 같은 거?”
“야, 무슨, 그런….”
솔이 완벽한 정곡을 찌르자 저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터뜨린 현서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다. 누가 보아도 무슨 일이 있었단 대답이었다. 솔의 미간이 불안하게 일그러졌다.
“잤어요, 두 분?”
쿨럭, 쿨럭. 실토하듯 현서의 터진 사레에 솔은 경악했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진짜로 일어났을 줄이야. 솔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징조가 있었던가를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방심해 상황이 이렇게 된 것 같았다. 늘 마주하면 서로를 비아냥대고 으르렁대지 못해 안달이었던 두 사람이, 도대체 언제 이렇게….
“아니, 아니. 설마 변호사님,”
솔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질문을 달리해 물었다.
“본부장님 좋아하는 건 아니시죠?”
***
공식적인 인수 합병 절차로 들어서고 나니 오히려 상황은 훨씬 더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골드스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조인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일이나 기다려야 했을 테니, 조 회장이나 조성호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인 일이었을지 몰랐겠지만.
“다음.”
정혁의 말 한마디에, 회의의 주제는 신오그룹과 단기간 진행했던 프로젝트 결과 보고로 넘어가고 있었다.
모니터를 응시하는 정혁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 있다. 평소보다 다소 여유 있는 표정의 사람들 속, 차현서 홀로 멍하니 넋이 빠져 있는 게 여간 거슬린 까닭이었다.
저 조그마한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잔뜩인 건지 알고 싶었다. 엊그제,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김준한이, 오자마자 그녀를 만나고 갔다는 레오의 보고도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고.
“법무 팀장님 의견은요?”
불현듯 정혁의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히 어렸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회의 집중 안 합니까.”
정혁의 날 선 목소리에 다시금 회의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현서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설명을 하던 파트너가 다시 브리핑을 이어 갔다. 이후,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법률적 검토 의견을 내놓았지만 정혁의 진짜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차현서 머릿속에 지금 뭐가 들어 있나.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넋이 빠져선.
몸을 맞대고 섞을수록 더 알 수 없어진 여자의 진심이 궁금했다. 왜 자꾸 이렇게 혼자만 더 안달이 나고 조급해지는 건지.
“오늘 저녁 식사, 불참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긴 회의가 끝나고, 비서실 직원이 회의에 참석한 모두를 향해 확인 질문을 던졌다. 모처럼 만에 예정된 회식이었다. 그녀가 불쑥 작은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요.”
양해를 구하듯 정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녀가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그 작은 뒤통수를 응시하는 남자의 눈썹이 불쾌한 듯 크게 들썩였다.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감히 제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인지.
“그럼 본부장님, 지금 바로 식당으로 이동….”
“아뇨.”
“네?”
“식사는 다음에 합시다.”
거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얼굴이 퍽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