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지나다니는 차들만 간간이 보이는 한적한 공원이었다. 차를 세운 정혁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곤 어딘가로 사라졌던 현서는 잠시 후, 손에 봉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곤 그에게 차에서 나오라는 듯 손짓을 하며 먼저 벤치에 앉았다.
들고 온 봉지 안에서 캔 맥주와 소주병을 꺼낸 그녀가 별안간 제 핸드백을 뒤적여 텀블러까지 꺼내 놨다.
“뭐 하는 겁니까, 지금.”
가만히 그녀의 하는 양만 지켜보고 있던 정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한국 전통 칵테일은 먹어 보셨어요?”
“뭐?”
현서는 빈 텀블러에 맥주를 칠 할쯤 붓고, 그 위에 소주를 마저 채웠다. 그러곤 옆에 앉은 정혁에게 텀블러를 내밀며 말했다.
“소맥.”
정혁은 허, 헛웃음을 터뜨리며 텀블러를 받아 들었다.
“텀블러의 용도가 아주 신선하시네.”
“마셔 보면 본부장님도 내일부터 챙겨 다니고 싶어지실걸요.”
텀블러 속으로 스며드는 남자의 큭큭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맛있네.”
잔을 내려놓으며 내뱉는 그의 소감에 현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안 드셔 봤을 것 같아서요.”
“여기도 차현서 씨 단골집인가.”
“여긴 술 마시고 싶은데 같이 마실 사람 없을 때. 그럴 때 오는 곳요.”
경사진 언덕 너머로, 불이 반짝반짝 들어온 한강 다리가 보였다. 조용하고 아늑해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드는 곳이었다.
학교 졸업 후, 이 근처 편의점에서 알바하며 고시 공부를 하던 때부터였으니 벌써 꽤 오래된 일이었다.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이 자리에 앉아 울기도 많이 울고, 혼자 청승도 많이 떨었다.
갑자기 왜 이 남자를 여기에 데리고 오고 싶어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준한에게도 알려 준 적 없는 저만의 이 아지트를 왜.
이유를 떠올리려니 괜히 목이 타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못지않은 알코올 의존증이셨구만.”
놀림 아닌 놀림에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술 없인 몇 날 며칠 밤을 잠들지 못한 적도 있었으니까. 매일 밤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꿈, 어딘가로 도망치다 잡혀 목이 졸리는 꿈,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악몽을 꾸며 숨도 못 쉬고 바짝바짝 말라 가던 때도 있었으니까.
“하긴. 맨정신엔 하긴 힘들 일을 많이도 했지.”
모호한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가. 자조인가, 힐난인가. 헷갈렸다.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저도 모르게 무모한 궁금증이 일었다. 남자는 얼마든지 여쭈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저한테 뭘 원하세요?”
아주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더러운 일 처리를 도맡아 줄 개가 필요해 저를 처음 골랐단 건 대강 알겠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란다는 건 이해했다. 그런데 그에 더해진 남자의 행동들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조인호를 핑계 삼아 불필요한 관계를 맺은 것도, 굳이 뒤따라 올라와 대신 칼을 맞아 가면서까지 저를 구해 준 것도, 감시, 아니, 보호라는 명목으로 더더욱 저를 옭아매는 것도.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더 헷갈렸다. 대체 제게 무슨 목적인 건지. 그 목적이라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제 마음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본부장님께서 저한테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진심이었다.
“딱히.”
“…….”
“딱히 뭘 원하는 건 없는데요, 차현서 씨한테.”
진심인 걸까.
“근데 왜….”
“섹스했냐고.”
그가 노골적으로 말을 가로챘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입술을 꾹 맞물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공사 구분 잘한다고 그 잘난 척을 하시더니. 이제 와서 왜 갑자기 궁금해지셨을까, 그런 게.”
다리를 길게 꼰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처음이라, 그냥…. 일시적이었고, 충동적인 사고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근데.”
“근데 또…. 어쨌든 또, 했고,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웬일로 마음에 쏙 드는 말을 다 하시고.”
그가 픽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말해요?”
우주처럼 시커먼 남자의 검은자위는 확연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크고 또렷했다. 현서는 제게로 향한 시선에 포박된 듯이 그를 마주 봤다.
“나는 차현서 씨랑 하는 섹스가 꽤 만족스럽고 꼴려. 당신은 ‘갑작스러운 사고. 감정적인 행동’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은데, 나는 분명히 아니었거든. 처음부터 지금껏 줄곧 차현서 씨한테 꼴려 왔고, 꽤 이성적으로 판단해 내린 결론이었으니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제 몸에 동했고 자신과 나누는 성적 행위가 만족스러웠으며 그걸 계속 이어 가고 싶다는. 뭐 그런 뻔한 이야기.
무슨 대단한 의미를 기대했던 것도 아닌데 씁쓸함에 마른 입이 썼다.
“어때요. 차현서 씨 생각에도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것 같단 예감이 들죠.”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남자의 욕망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신도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 더 즐기고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은데. 내 말 틀려?”
“그래서 지금 저한테 잠자리 파트너, 뭐 그런 걸 말씀 하시는 겁니까?”
“관계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겠다면.”
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간 돈을 쥐여 주며 하룻밤 잠자리 상대를 제안한 개자식들은 많았어도, 이런 종류의 당당한 파트너 요구는 또 처음이었다. 내뱉는 개소리도 너무 서정혁다워 실소가 났다.
“제가 맨정신엔 하긴 힘들 일을 많이 하긴 했는데요, 본부장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궁해도 몸을 함부로 굴리진 않았거든요.”
“네. 잘했어요.”
남자는 무감히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수절을 칭찬합니다, 뭐 그런 도장이라도 있으면 기꺼이 찍어 주겠다는 듯이.
“하.”
진지한 답을 바란 저가 바보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데 툭, 손목이 쥐어 몸이 돌아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 앞으로 끌어당기고, 순식간에 그의 허벅지 사이로 작은 몸이 빨려들었다.
“이번에도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요.”
“…….”
“마음먹으면 날 밀어낼 기회도 많았었고.”
“…….”
“근데 차현서 씨 못 했잖아. 안 하셨고.”
맞는 말이었다. 마음이 있었다면, 그를 밀어낼 기회와 시간은 충분했다. 그 악마 같은 쾌락을 떨쳐 내지 못했던 건 분명 자신이었다. 시작은 늘 그였어도, 종국에 더 흥분해 헐떡였던 건 저였으니.
분명 다 알면서 묻는 남자의 표정에 오만한 비웃음이 걸렸다. 네까짓 게 감히 거부할 수 있겠냐는 듯. 이미 또, 제 목줄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키스해요.”
느른히 들려오는 그 명령에,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다.
***
“엉덩이 더 들고.”
“흣! 아흐…!”
쑤걱 빠져나갔다 불시에 짓쳐드는 흉기의 이물감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시트를 까드득 긁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흘긋, 뒤를 돌아보는 새카만 눈동자에 원망이 그득했다. 이럴 때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떠는 남자가 얄미웠다.
“잘 보이게 손으로 벌려요.”
“흐으!”
“구멍이 작기도 오죽이나 작아야지. 안 그래도 어두운데 내가 애먼 구멍에 쑤셔 넣으면 어쩌려고.”
눈 하나 깜짝 않고 저질스러운 말들을 쏟아 내는 천잡함에 다리 사이가 저릿저릿 울었다.
그렇잖아도 충분히 굴욕적이고 야만적인 자세였다. 가슴을 시트에 뭉갠 채 엎드려선 스타킹과 팬티만 무릎까지 내리고, 엉덩이만 치켜든 채 그의 성기를 받고 있는. 흡사 본능만 남아 교미하는 짐승이 된 것 같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거였다.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듯 정숙히 갖춰 입었던 옷은 되레 난잡한 아랫도리의 사정과 대비되어 음탕한 기분만 더하고 있었다. 혹여 누가 지나갈지도 모르는 야외에서, 교미하듯 성기만 맞추며 헐떡이고 있는 꼴은, 정말이지….
“하으, 앙!”
현서는 도리질을 쳤다. 제발, 하더라도 집에 가서 하자는 애원은 애초에 통하지도 않았다. 되레 차 뒷좌석에 태워져 팬티 끈이나 내려졌을 뿐.
그는 이리저리, 갈 곳을 잃고 헤매는 그녀의 손을 쥐어다 양쪽 엉덩이 위에 올렸다.
“말을 들어. 좀.”
그 위압적인 목소리에, 그녀는 하릴없이 자신의 엉덩이를 잡아 양옆으로 벌렸다. 그러나 거기가 아니라는 듯 곧바로 손가락 위치는 질구 바로 옆으로 정정되었다.
미끄덩하게 젖은 애액이 손끝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너무 흘려서 오줌이라도 싼 줄 알았다며 빈정대던 그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거다. 수치심에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더. 안에 박힌 내 자지 대가리까지 잘 보이게.”
“하으, 으으….”
“더 벌려.”
명령은 폭압적이었다. 좁아터진 입구를 애써 벌리느라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연방 미끄러지고 파들댔다.
“흐으, 으응. 더 못, 해, 흐으!”
“해.”
“하으! 윽!”
“한다고, 차현서 씨.”
굵다란 귀두 대가리가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랬던 페니스가, 몇 번의 얕은 피스톤질로 터질 듯 부피를 더 키워 갔다. 어떻게 이 크기에서 더 커질 수가 있는 건지. 그악스러워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미 한계까지 입을 벌린 그녀의 질구가 버겁게 떨려 댄다. 거대한 그림자가 등 뒤를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