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34화 (34/115)

♬(34)

정혁은 피곤한 미간 사이를 꾹, 길게 누르며 레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어쨌든 최초 신고자 입에서 장기용 이름이 나왔으니, 경찰도 명목상 참고인 동행 요구를 하긴 한 모양입니다. 장기용 쪽에선 당연히 거부했고요.]

[JK 법무팀에 빵빵한 변호사들 널렸으니 알아서 해결은 잘 보시겠고.]

JK에서 이 정도 사건을 수습할 힘이 없어 차현서를 찾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확실한 증거도 하나 없는 목격자 증언만으로 장기용의 유죄가 쉽게 입증될 리도 없었고.

그들이 필요한 건 장기용의 변호사가 아니라, 그가 싼 똥을 흔적도 없이 치워 줄 심부름꾼일 뿐이었다. 계속해 장기용의 발목을 붙잡을 이유진, 그 여자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을 테니.

JK와 차현서 사이 이어진 길고 질긴 관계에 골이 지끈댔다. 뭘 어디서부터 끊어 놔야 속이 시원해질는지.

[아참. 스탠리한테서 연락 왔었는데요.]

[허. 꼭 뒷북을 치는 타입이지, 그 새낀.]

정혁이 코웃음을 쳤다. 스탠리는 발터와 모종의 뒷거래를 하고 제 뒤통수를 거하게 때린 인물이었다. 이제 와 다시 분위기가 라이언 서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걸 눈치챈 그가 반지빠르게 또 입을 놀리려는 모양이었다.

[씹자고. 씹힌 만큼.]

더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하는 목소리에 피곤한 한숨이 뒤섞여 있었다. 제 상사의 표정을 찰떡같이 읽어 낸 레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의 라이언은 분명 퍽 제정신으로 보이지가 않으니 말이었다.

20년 가까이 알았고, 10년을 함께 일했던 사이였다. 표정의 변화와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쯤은 훤히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 라이언이 최근엔 도통 알 수 없는 짓을 골라 하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낯설고 당황스럽게도.

그 원인으로 차현서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다 그 여자를 만나고 곁에 둔 이후로 생긴 변화들이었으니까.

비가 많이 내리던 그 밤. 실신해 쓰러진 차현서를 들쳐 안고 제집에 들이겠다 했을 때, 레오의 심증은 비로소 확증이 됐다. 그저 비뚤어진 관심. 혹은 일시적 호기심일 거라 생각했던 차현서에 대한 ‘과한’ 반응들이 결코 그런 명료한 이유가 아니었음을.

눈꺼풀을 내리깔며 슬몃 손목을 들추는 라이언의 표정이 다소 초조했다. 백미러에 비친, 제 상사이자 오랜 친구의 낯선 얼굴에 레오는 제 짙은 눈썹만 한껏 들썩였다 내릴 뿐이었다. 누가 알면 기함할 일이다. 천하의 라이언 서가 일이고 뭐고 다 제쳐둔 채 초조한 얼굴로 여자의 퇴근 시간이나 카운트하는 꼴이라니.

[계속 집에 둘 생각이세요?]

그제야 백미러 속 시선을 느낀 정혁이 레오를 응시했다.

[차현서 씨 말이에요. 무슨 일 생길까 봐 불안한 거면 차라리 경호를 붙이는 편이 덜 불편하실 텐데요.]

레오는 실상 라이언의 변화가 썩 달갑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잘 알기에 그랬다.

옆에서 생생히 목격한 월가는 상상 이상으로 비정하고 잔인한 곳이었다. 그게 누구라도 잠시 잠깐 한눈을 팔고 딴생각을 하는 순간 곧바로 칼에 베이고 썰려 나가고야 마는 그야말로 야생의 전쟁터 같은 곳. 그러니 이렇게 라이언의 정신이 온통 다른 데 팔려 있는 게 그로선 꽤나 불안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상대는 차현서였다. 따지고 들자면 라이언 서의 인생을 진창을 처박은 차선엽. 그 원인 제공자의 딸. 분명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너무 컸다.

[워낙에 내 말만 골라 가며 안 듣는 분이시라. 시야 안에 있어야 안 불편하지, 내가.]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인 라이언은 영 느긋해 보인다. 상황 파악, 자기 객관화가 누구보다 빠른 라이언 서는 다 어디 가고….

[희한하네요. 옆에서 누가 숨만 쉬어도 불편해하시는 분이.]

[그러게. 불편하다, 너. 숨 쉬지 말고 얼른 퇴근이나 해.]

정혁은 차창 밖을 향해 귀찮다는 듯 툭, 무신경한 턱짓을 했다.

[저 요즘 집에 게임기 설치한 거 아세요?]

[축하해. 드디어 꿈을 이뤘네.]

[덕분에요.]

[그래. 내 덕에. 그럼 좋은 게임 즐기시길.]

이제 그만, 잔말 말고 썩 꺼지라는 소리였다.

이건 완전히 정상이 아니군.

레오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에서 내렸다.

달카닥.

레오가 사라지고, 정혁도 뒷좌석 문을 열고 나왔다. 빌딩 숲 사이로 부는 칼바람이 퍽 차가웠다. 한국의 겨울도 뉴욕의 그것 못지않단 생각을 하며 코트 깃을 깊게 세웠다.

지내다 보니 한국 땅도 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다신 쳐다도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기억뿐인 이곳에 이렇게 쉽게 적응할 줄이야. 그새 정이라도 든 건가, 고작 두 달 만에. 저를 연방 황당해하는 레오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이곳에 온 뒤로 당최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감정들뿐이라.

매끈한 세단의 차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습관처럼 담배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슬몃, 고개를 들어 로비를 확인하는 그의 눈동자가 자못 가늘어졌다.

또각또각. 차현서가 쇄골 아래까지 내려오는 다갈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제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정하기 짝이 없는 베이지색 코트에 심플한 숄더백. 높지 않은 굽의 스틸레토 힐. 주는 대로 얌전히 입기는커녕, 이 수수하다 못해 촌스러워 보이는 패션을 고수하는 차현서의 고집도 인정은 해 줘야겠다 싶다.

특히나, 목에 둘둘 감은 이 오트밀 색 머플러가 여간 거슬렸다. 말할 때마다 붉게 벙긋거리는 입술이 도통 보이지도 않게 가려선.

“메시지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현서가 새하얀 미간을 움찔거리며 대뜸 물어왔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시라고 보냈었는데….”

“봤어요.”

“근데 왜…. 기다리셨어요?”

“그러는 차현서 씨는, 먼저 들어가라고 해 놓고 왜 벌써 나와. 나 따돌리고 어디로 튀시려고.

“튀기는 무슨, 하.”

현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먼저 가시라고 한 거였구, 하다 보니 어차피 식약처에서 답변이 와야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라 그냥 나온 건데요.”

저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남자가 피식 짧게 웃는다.

벌써 일주일째. 그녀는 서정혁의 집에서 그와 함께 출근했다 퇴근하는, 이 기막힌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서정혁에게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감시당해야만 하는지 아직도 이해는 안 갔지만,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이건 보호라 했다. 행여 돈값도 하기 전에 어디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죽을까 봐서 하는.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법정 관리인 지정 검토 보고서는 비서실 통해서 책상에 올려다 놨습니다. 오늘 계속 외부 일정 있으셨던 것 같아서요. 아침에 확인해 보시고 결재해 주세요.”

현서는 무감하게 담배를 무는 정혁의 얼굴을 일부러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이 서늘한 눈만 마주쳐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새카만 블랙홀 같은, 이 형형하고 억실억실한 눈동자가 저를 안을 땐 어떻게 완벽하게 돌변하는지 잘 알아서.

“사는 데 미련 없단 사람 치고 일에 너무 열정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막말로 내 돈이야 먹고 튀면 그만인데.”

불도 붙지 않은 필터를 잘근대며, 그가 불량하게 뇌까렸다. 일부러 회사 밖에서 일 얘기를 늘어놓는 제 의도를 빤히 알아챈 건지도 몰랐다.

“그럴까 봐 이렇게 저 감시하고 계신 거잖아요.”

고개를 모로 기울여 불을 댕기는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참지 못한 남자의 키득거림에 찬 공기 속으로 희뿌연 연기가 몽글몽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감시가 아니라 보호. 이왕이면 긍정적인 단어 씁시다.”

보호 같은 소리. 보호하는 사람이 그렇게 저를 괴롭히고….

또 떠오른 야릇한 기억에 현서는 괜스레 어색한 헛숨을 터뜨리며 머리칼만 길게 쓸어 넘겼다.

“소주 마시러 갈래요?”

“네?”

맥락 없는 제안에 새카만 눈동자가 댕글, 부풀었다.

“지난번 거기. 혼자 가기엔 좀 어색할 것 같아서요.”

“…….”

“아니면 다른 데도 상관은 없고. 밥이 아니라 술이 당기는 거니까.”

그가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놓은 담배를 느긋이 입가에 가져가며 재차 말했다. 진심인 건지, 또 장난인 건지. 현서는 가만히 그 느물거리는 얼굴을 올려봤다.

“뭘 봐요, 또 대답 안 하고.”

도통 속을 알 수가 있어야 뭘 추측이라도 할 텐데, 싶어서.

“혹시 알코올 의존증 있으신 건, 아니시죠?”

묻는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밤 잠들기 전 습관처럼 술을 들이켜는 남자를 얼핏얼핏 목격한 까닭이었다.

“아닌 사람도 있나?”

진지한 그녀의 질문과 달리 돌아오는 그의 반응은 자못 진지하지 못했다. 말을 말아야지. 현서는 입술을 앙다물며 조수석 문을 달카닥, 젖혀 열었다.

“가요. 술 마시러.”

짙게 선팅된 차창 안, 작고 앙증맞은 실루엣 하나가 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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