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꿈을 꾸는 내내 느꼈던 상냥한 감촉과 부드러운 온기. 안락한 안도감. 분명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비록 눈 뜨면 사라져 버릴, 한순간 꿈이었다 할지라도.
현서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푹신하고 드넓은 침대 위에 저 홀로 누워 있었다. 낯선 공간이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제 손등을 인지하며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병원이라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호텔이라기엔 지나치게 휑했다. 사이드 테이블과 리클라이너, 플로어 조명 하나를 제외하곤 이 드넓은 공간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없는. 도무지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침실이었다.
몸을 뒤척이자, 문득 시트에서 풍겨 나오는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진하고 묵직한 누군가의 향수 냄새.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가만히 굳어졌다. 회색 벽 한가운데 걸린 액자를 바라보며, 막연했던 추측은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무채색의 마크 로스코 그림이었다.
서정혁의 공간.
현서는 마른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이 뇌리를 함께 스쳤다. 칼을 든 괴한으로부터 서정혁이 저를 구해 줬던 것과 저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 그리고 손에서부터 뚝뚝 흘러내리던 붉은 핏방울까지. 모조리 다, 선명하게.
섬광처럼 되살아난 기억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손등의 꽂힌 링거 바늘을 뽑고, 침실 밖으로 하얀 발을 내디뎠다. 대책 없이 정신을 잃은 사이, 행여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서였다. 몸집을 불린 초조함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반대편 복도 끝,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 발을 옮겼다. 살짝 열린 문을 천천히 밀어 열자 애타게 찾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서늘하고 무감한 표정의 서정혁이.
“…하.”
잡은 문고리를 내려놓는 그녀의 잇새에서 안도의 숨이 짧게 새어 나왔다.
“드디어 깨셨네.”
남자는 들춰 보던 서류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낮게 읊조렸다. 종이를 넘기는 그의 오른손엔 아니나 다를까, 흰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눌러 깨물었다.
“들어오든지, 다시 가서 눕든지.”
저음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느긋이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가, 여전히 문밖에 멍하니 선 그녀를 응시하며 채근했다.
“귀신처럼 계속 그렇게 거기 서 있을 겁니까?”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이 떨어졌다. 서재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눈엔 오로지 붕대 감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만 보였다. 저를 도와주려다, 저 때문에 다친 거였다. 원래도 존재했던 손등 위 커다란 상처까지도 마음에 걸렸다. 한번 상처 났었던 손을, 하필이면 왜 또.
“괜찮으세요?”
남자의 손만 응시하는 말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해야 할 질문 같은데.”
그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 아침까지 안 일어나면 의사 또 부르려고 했어. 압니까?”
성큼성큼, 제 앞에 다가와 이마를 짚는 그의 손길에 현서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작은 이마를 다 감싸고도 남는 뜨거운 온기였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게 아쉽게 느껴질 만큼.
“괜찮아요?”
빗발치는 시선을 마주한 채, 어지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답 좀 하죠.”
그가 주머니에 푹, 손을 찔러 넣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달싹이던 입술이 그제야 슬며시 벌어졌다.
“…죄송합니다.”
허. 남자의 잇새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단 듯이.
“본의 아니게 본부장님께 폐를 끼친 것 같아서, 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동문서답이시네.”
그는 영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양실조. 감기 몸살. 탈수. 과로로 인한 면역력 저하로 갑자기 쓰러져서는, 당신 지금 정확히….”
그가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스물아홉 시간 만에 일어난 건데. 괜찮냐고 물었습니다.”
“…….”
“그 답이요.”
채근하는 목소리에 자못 짜증이 묻어났다. 스물아홉 시간 동안 내내 시끄러웠던 속사정도 모르고 영 딴소리만 늘어놓는 그녀가 얄미워서였다.
“괜찮… 습니다.”
괜찮다는 대답 한마디 듣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이제 안 아파요.”
정혁은 피곤한 눈가를 길게 쓸었다.
“본부장님은 괜찮으세요?”
어느새 현서의 눈이 다시 그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손이요.”
새카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흘긋, 손을 내려다본 남자가 느른히 눈을 맞춰 왔다.
“괜찮을 리가.”
“…….”
“없겠죠. 당연히.”
“죄송합니다.”
먼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단 말 이외 다른 말은 더 생각나지도 않았다.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못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저 때문에 본부장님까지 다치신 거….”
“안 무서워요?”
말을 끊는 그 눈매에 날이 섰다.
“내 손이 아니라 당신 여기에 그 칼이 스쳤을 수도 있었는데.”
마디가 툭 불거진 남자의 손가락이 톡톡, 현서의 명치 아래를 두드렸다. 일순 말아쥐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당신은 목숨이 두 개야?”
“…….”
“애초에 원한 살 짓을 하지 말고 살든가. 지은 죄가 있으면 몸을 좀 사리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막 삽니까.”
“…….”
“겁도 없이.”
고저도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들린다면 지독한 착각인 건가.
현서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괜스레 억울한 감정이 치솟았다. 왜 막 사는지, 아니, 왜 죽지 못해 사는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힐난만 하는 그가 미웠다.
“몸 안 사리고 원한 살 짓 하면서 사는 건 본부장님이나 저나, 피차 같지 않나요.”
발끈한 말대꾸에도 그는 핏, 한쪽 입꼬리를 올려 조소했다.
“아. 내가 물불 안 가리고 쓰레기 짓 하면서 사는 건 맞는데, 멍청하게 넋 놓고 있다 갑자기 칼 맞고 총 맞고, 그러진 않아. 난 차현서 씨 당신이랑 달리 사는 데 미련이 아주 많아서. 힘들게 번 돈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못 감을 것 같거든.”
“…….”
“근데 차현서 씬 아니잖아. 찾아와서 뺨을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고. 그렇게 앞에 와서 칼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얌전히 맞아 줄 거였고. 안 그래요?”
차마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죽고 싶어했는지를.
가끔 상상하곤 했다. 불시에, 제가 상처 줬던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차라리 홀가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지은 죗값의 일부나마 치를 수 있다면 도리어 다행한 일일 성싶어서.
“전 누구처럼 뻔뻔하지는 못해서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대꾸했다.
“본부장님 덕분에 빚도 다 갚았고, 저 하나 죽는다고 손해 볼 사람 이제 없으니까요. 오히려 그 나쁜 년, 잘 죽었다고 손뼉이라도 쳤으면 쳤지.”
“아. 사는 데 미련이 없으시다.”
느긋한 목소리와 달리 사나운 시선이 빗발쳤다. 아픈 곳만 골라 가며 쿡쿡 찔러 대는 그가 얄미워 피하지 않고 같이 노려봤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한 손에 움켜쥐어 바짝 조였다. 갑작스러운 질식감이 덜컥 들이닥쳤다. 몸이 뒤로 밀리며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생존을 위한 본능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만 칠 뿐이었다.
“미련 없다며.”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목을 조여 왔다. 결국, 막다른 벽에 등이 탁 막혔다.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잡아 밀어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도리어 옥죄는 악력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점점 희박해지는 공기의 양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문득 목을 움켜쥔 손의 힘이 슬쩍 풀렸다.
“하아, 으….”
그녀는 그 틈을 타 있는 대로 숨을 들이켜며 발버둥을 쳤다. 자비를 베풀어 일말의 숨통이나 열어 주겠다는 듯, 그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미련 없단 사람치곤 너무 절박한 표정 같은데.”
마음만 먹으면 제 목을 그대로 꺾어 버릴 수도 있을 남자임을 모르지 않는다.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비웃고 싶은 거였다. 제 입에서 원하는 답을 얻어 낼 때까지 괴롭혀 보겠단 못된 심술이었다.
“말해 봐요, 살려 달라고.”
“…….”
“살고 싶다고.”
나쁜 새끼.
“애원해 보라고.”
입술을 긁어 누르며 쏘아보는 그녀의 눈꼬리에 생리적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살겠다고 이렇게나 버둥대는 주제에 어디서 같잖은 고집이야.”
그는 끝까지 오기를 부리는 게 가소롭다는 듯 불량하게 뇌까렸다.
“흐, 읍…!”
그때였다. 현서의 목을 바득 꺾어 올린 남자가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순간 또다른 종류의 질식감이 밀려들었다. 밭은 숨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그가 더 깊숙이 고개를 기울여 왔다. 꽉 맞물린 잇새로 미끄덩한 살덩이가 밀려들었다. 이리저리 빠져나갈 틈만 찾아 도망치는 그녀의 혀를 집요하게 옭아매 휘감으며 자극했다. 기껏 애써 봤자 퇴로는 없단 걸 똑똑이 알려 주려는 듯이.
턱은 더 높이 치켜 들렸고, 꼼짝없이 붙잡힌 혀는 자비 없이 흡 빨렸다. 쯔읍, 쯥. 혓바닥이 엉망으로 비벼질 때마다 밍밍한 타액이 껄떡이며 넘어왔다. 호흡을 구걸하듯 그의 가슴께를 바득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서. 눈앞이 어지럽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박동이 빨라져서. 혹여나 터질 듯 뛰는 심장 소리를 그에게 들키진 않을까. 그래서 또 속을 읽히고 우스워져 버리는 건 아닐까. 초라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스물아홉 시간을 정신없이 앓았던 탓일까. 온몸의 힘이 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혼몽했다. 손끝에 힘이 풀렸다. 겨우 버티고 선 다리마저 볼품없이 후들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꾸 아래로 무너져 내리려는 허벅지 사이로, 돌연 남자의 하체가 바짝 맞붙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