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도착했는데. 어쩔까요.]
현서의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운 레오가 망설이듯 백미러를 힐긋거리며 물어왔다. 생각에 잠긴 듯, 잠든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정혁의 표정이 퍽 심란했다. 답 대신 꽤 긴 정적이 이어졌다.
밖은 아직도 빗줄기가 거셌다. 생각 같아선 이대로 어디라도 데리고 들어가 젖은 옷부터 벗기고픈 심정이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추위에 절어 새하얗게 질려 있고, 자면서도 파르르 떨어 대는 마른 몸에선 여전히 한기가 돌았다.
일하는 건 그렇게나 철저하려 기를 쓰는 여자가 왜 이렇게 제 몸은 혹사시키는 건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퇴근을 하긴 하는 건지 모르게 회사에 붙어 있는 근무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식사할 때 보면 늘 먹는 양도 새 모이 만큼이었다. 제대로 잠은 자는 건지, 두통약을 달고 살면서도 제대로 병원에 가 보지도 않는 것 같고, 달리 스스로를 위한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되레 자학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방치였다.
이 추운 날, 이렇게 흠뻑 젖을 만큼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건 또 무슨 종류의 자기 학대인 건가 싶었다. 제겐 한마디도 안 지고 맞서면서 조인호 그 하찮은 놈이 부리는 몽니에 고스란히 쥐여 흔들린 것도 미련스러웠고.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여자.
생각이 어지러워 머리가 지끈댔다.
꾸벅이며 점점 더 아래로 쏟아지는 여자의 턱을 슬쩍 받쳐 잡았다. 그 손의 온기를 느낀 미간이 느릿하게 움찔대고 눈꺼풀이 가냘프게 말려 올랐다.
“아….”
잠에서 깨 차창 밖 풍경을 확인한 그녀가 걸치고 있던 제 코트를 서둘러 벗었다. 핸드백을 꾹 움켜쥐는 손길이 얼른 도망이라도 가려는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못마땅한 마음이 치솟았다.
“병원으로 갈까 하다 말았는데. 지금 차현서 씨 상태 영 안 좋아 보여요. 알아요?”
“…….”
“괜찮아요?”
이마 위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혈색 없는 입술. 작게 떨리는 어깨까지. 처음 차에 태울 때보단 핏기가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네. 들어가서 약 먹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지금은 안 괜찮단 거네.”
“…….”
정혁은 현서의 상태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건지.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현서는 살짝 묵례를 하고 곧장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도망치듯 재빨리 우산을 펼쳐 들곤 타박타박,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무시를 하시겠다.
정혁은 기막힌 숨을 터뜨렸다.
헤드라이트 불빛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작은 뒤통수를 따라 눈동자를 가만히 움직였다. 조마조마했다. 흔들흔들, 위태롭게 걷는 여자의 뒷모습이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
[출발해.]
아무래도 더 보고 있다간 그대로 내려 쫓아갈 것만 같아 단념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정혁의 시선이 다시 차창 너머의 그녀를 향해 오뚝이처럼 되돌아갔다. 멀리, 작아진 여자의 등 뒤로 따라붙는 수상한 그림자를 본능처럼 감지한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그림자는 그녀가 들어가는 출입구까지 쫓아 들어가고 있었다.
[차 세워.]
끼익.
움직이려다 말고 급하게 멈춰 선 차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우산도 잊은 남자의 긴 다리가 급히 밖으로 튀어 나갔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가 입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반쯤 닫히는 중이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고개를 푹 떨구고 선 차현서와 그녀를 뒤따르던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육감처럼 치솟았다. 정혁은 엘리베이터 빨간 숫자의 오름이 멈출 때까지 대시 보드를 노려봤다.
6층.
멈춘 층을 확인한 그가 곧장 비상구 계단을 뛰어올랐다.
“돈만 주면 높으신 분들 골치 아픈 일들 뒤처리는 물론이고 살인자 변호라도 서슴지 않고 한답니다. 그쪽 일로 이미 꽤나 유명한 모양이던데요.”
차현서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살아왔는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엔 사무실까지 찾아올 만큼 노여워하는 이에게 뺨을 맞던 걸 직접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었고.
눈에 선했다. 아무 쥔 것도 없는 밑바닥에서부터 이 자리에 올라오려 얼마나 발버둥을 쳐 댔을지. 물불 안 가리고 돈 되는 일이면 모조리 했다는 여자였다. 그 말을 달리 하자면 타인에게 원한 살 일을 퍽도 많이 했단 거였다. 겁도 없이.
비상구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복도 끝을 향해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따라 걷는 남자의 등 뒤엔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놈의 걸음이 빨라지고,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정혁은 그대로 저벅저벅 걸으며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차현서 씨.”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흠칫 놀란 놈이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단 듯 저를 보는 정혁의 시선에, 놈은 도리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행여나 쥔 칼끝이 그대로 현서에게 향하진 않을까, 정혁은 재빠르게 놈의 앞으로 바짝 다가붙었다.
“이 씨팔…!”
당황한 남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앞을 향해 아무렇게나 칼을 휘둘렀다. 칼은 정확히 정혁의 명치 앞에서 멈춰 섰다. 눈 깜짝할 만큼의 순간이었다.
“이 칼론 사람 못 죽여.”
“…뭐, 뭐?”
“이렇게 무딘 걸로 어디 껍데기나 제대로 쑤실 수 있겠어?”
놈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노려보는 정혁의 눈동자엔 살벌한 광기가 그득했다. 손목을 끊어 놓을 듯 조여드는 강한 악력에, 후드 속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지한 거였다.
투둑투둑. 벌건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완력의 차이는 더 극명해져 갔다. 팽팽한 신경전에 시퍼런 칼날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본… 본부, 장님.”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혁이 잠시 그녀에게로 눈동자를 흘긋 돌린 사이. 놈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밀어내곤 비상구로 도망쳤다. 쨍그랑,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는 금속의 쇳소리가 귓바퀴를 쟁쟁하게 긁었다.
정혁은 곧장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붙였다.
[지금 내려가는 놈 잡아.]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줄곧 제게 다가오는 여자에게 고정돼 있었다. 휘청이며 걸어오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보기 안쓰러울 만큼.
“이게…. 지금….”
떨리는 입술만큼이나 새어 나오는 목소리도 불안정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롯이 시뻘겋게 물든 정혁의 손에 붙박여 있었다. 패닉에 질려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본부, 본부장님, 피가…. 피가 나는데, 어떡… 아, 119. 119 신고를….”
연방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모르던 그녀가 다급히 제 핸드백을 열어 뒤졌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백 속을 이리저리 휘저어 댔다. 그러나 그렇게 손끝에 간신히 걸려 나온 핸드폰은 투둑,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손에 힘이 풀려 놓친 거였다.
보다 못한 정혁이 떨어진 핸드폰을 대신 주워 올렸다.
“차현서 씨가 구급차 타려는 거면 내가 걸어 주고.”
내려다본 여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했다. 밭은 숨만 쌔액쌔액, 내뱉는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괜찮아?”
“…하아….”
“차현서 씨.”
괜찮냐는 물음에도 현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헐떡이며 간신히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칼에 손을 베일 때도 무감히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푹 우그러들었다.
“차현서.”
정혁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움켜쥐는 순간, 내 위태롭던 몸이 결국 종잇장처럼 스르륵 쓰러지고 말았다.
***
암 레스트에 팔꿈치를 괸 채 눈썹을 만지작거리는 정혁의 시선이 한 곳에 멍하니 묶였다. 침대 위, 팔뚝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잠든 여자에게로.
잠이 든 건지, 아님 여전히 무의식에서 깨어나지 못 하고 있는 건지. 오피스텔 복도에서 그렇게 쓰러진 이후 그녀는 몇 시간째,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었다.
영양실조에 과로로 인한 면역력 저하, 감기 몸살과 약한 탈수 증세까지 겹친 최악의 상태라 했다. 그녀를 진찰하고 간 의사는 이 몸으로 지금껏 정말 아무 문제도 없었느냐 연방 되묻기까지 했다. 무슨 젊은 사람 몸이 이렇게 엉망진창이냐고.
이젠 정말로 알 수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차현서에 대해서.
순진한데 앙큼했고, 독한데 물러 터졌다. 철저한데 허술했으며, 명민한데 미련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 예측을 죄 벗어나는 여자였다. 아니. 이젠 이럴 거라 예측을 하는 것조차 겁이 났다. 제게 또 어떤 엿같은 기분을 선사할지 몰라서.
정혁은 피곤한 눈을 손으로 깊이 감싸 쥐었다.
몇 시간째 미동 없는 차현서만 지켜보고 있으려니 없던 조바심이 더 이는 것 같았다. 쥐면 부서질까, 만지면 날아갈까. 흡사 눈앞에 먹지도 못할 먹잇감을 두곤 안달복달 속만 끓이는 맹수의 꼴이었다.
오죽 마음이 달았으면 제 펜트하우스에 여자를 버젓이 들여 뉘어 놓았겠는가. 비서인 레오조차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제 울타리, 제 공간에 말이었다.
“후.”
단단히 미친 거지.
붕대를 칭칭 감은 손바닥 사이로 낮은 욕지거리가 짓이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