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쏴아아.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지하철 출구에서 뛰어나왔다. 급한 대로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비닐우산과 생수를 집어 들곤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을 대로 젖어 후드득, 물을 떨구는 그녀를 향해, 계산하던 아르바이트생이 괜찮냐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색과 핏기 없는 입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현서의 모습이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진 않은 까닭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젖은 핸드백 속에서 상비하는 두통약을 꺼냈다. 두 알을 손에 털어 한꺼번에 꿀꺽 넘겨 삼켰다. 내성이라도 생긴 건지 뭔지, 분명 오전에 한 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게다가 비까지 쫄딱 맞고 나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한다. 컨디션이 영 좋지가 않았다.
“하….”
한기가 밀려들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쏟아지는 골프장 필드 위에서 우산도 없이 세 시간을 서 있었던 까닭이었다. 조인호 때문에.
약혼식장에서의 사건 이후 오늘 처음으로 직접 그를 만나야 했다. 이번 프로젝트에 중요한 키인 신약에 대한 최종 임상 보고서 자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자료를 받음으로써 골드스톤과 조인호, 안성태가 비로소 온전히 한배를 타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받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물밑 지분 확보 문제와는 별개로 그대로 모든 거래는 불발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조인호가 예고도 없이 헛소리를 했다. 일이 모두 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이 와중에 이유도 없이 돌연 고민을 더 해야겠다 변심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걸 꼭 골드스톤이랑 해야 하는 일일까, 하는. 굳이? 어차피 키는 내 손에 있는데?”
“구두 계약도 유효한 거 알고 계시죠, 조인호 이사님.”
“알지. 알아서 이렇게 망설이잖아. 아니었음 당장에 서정혁 그 새끼 멱살부터 잡았겠지.”
이유는 노골적일 만큼 선명했다. 결국 저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그날 일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한없이 감정적이고도 철없는 핑계.
“암튼 기다려 봐. 라운딩 끝날 때까지 생각해 보고 결정할게. 너 하는 거 봐서.”
일부러 이죽거리는 조인호의 얼굴이 못 견디게 역겨웠지만 참아야 했다. 어찌 됐든 저 하나 때문에 이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비록 그날의 일이 자의가 아닌 타의였고, 진실이 아닌 충동이었다 할 지라라도 이 일의 결과는 변함이 없어야 했다. 골드스톤에서의 첫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50억. 제게 매겨진, 그 말도 안 되는 금액이 가져다준 부담감 때문에라도.
“세상에, 변호사님…. 비 맞으셨어요? 우산도 있으신데 왜 이렇게 다….”
현서의 전화를 받고 급히 로비로 내려온 솔이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를 훑었다. 이상해 보이긴 할 터였다. 손에 우산까지 들고는 비 맞은 생쥐 꼴이니.
“설마, 조인호 그 개놈이 또 뭔 짓이라도 했어요?”
“못 주겠대. 보고서.”
“네? 허! 갑자기? 대체 왜요!?”
차마, 서정혁과 호텔 방에 함께 들어간 걸 직접 목격한 조인호가 꼭지가 돌아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는 설명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자식 때문에 이 꼴이신 거예요?”
“그러게. 꼴이 이래서 오늘은 그냥 바로 집으로 가야겠다. 솔이 너도 일찍 들어가.”
현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솔이 가지고 있던 USB를 슬쩍 채갈 뿐이다.
“아니, 이러고 가시게요?”
“이미 인천에서부터 이러고 왔어. 괜찮아.”
“아니, 아니…. 그래도…! 변호사님!”
당황한 솔이 말을 끝내기도 전, 현서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곤 다시 우산을 펴들었다. 받은 USB를 챙겨 넣고 로비를 나섰다.
해가 짧아진 계절.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이 시커멨다. 한 블록쯤, 대로를 따라 걸으면 나오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얼른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덜덜 떨리는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바람마저 거세 우산을 썼음에도 빗방울이 사선으로 빗발쳐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우산을 깊게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보고 걸었다.
삐.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짧은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미끈하게 빠진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제 옆에서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뒷좌석, 짙게 선팅된 차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서정혁이었다.
“타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잠시 멍해진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자, 남자는 습관처럼 헛숨을 내뱉었다.
“안 들려요? 타라고.”
쏟아지는 빗소리에 그가 한층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달카닥.
뒷좌석 문이 벌컥 열렸다. 안쪽 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그가 제 옆자리로 턱짓을 했다. 잔말 말고 타라는 소리였다.
하릴없이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히터로 뜨겁게 데워져 있던 차 안 공기에 저도 모르게 숨이 떨렸다.
“제가 옷이 다 젖어서, 차 시트도 다 젖을 것 같은데….”
“차현서 씨더러 시트값 물어내라고 안 해.”
뚫어져라 위아래로 훑어 대는 시선에 날이 섰다.
“윤솔 씨가 외근 나갔다고 하던데. 이러고 비 맞고 돌아다녔어요?”
“저…. 본부장님.”
말하기를 망설이는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조인호 이사를 만나고 왔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입이 바짝 말랐다. 조인호가 갑작스레 변덕을 부렸단 보고를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였다. 이 문제의 원흉은 결국 자신이었으므로.
“그러니까, 그날 일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말을 끊은 남자의 입술이 느긋이 움직거렸다.
“조인호 일찍 손절할 생각도 있다고.”
또 제 속을 읽은 건지, 눈치 빠르게 상황 파악을 순식간에 다 해 버린 건지.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조인호가 같잖은 몽니를 부렸단 사실을 벌써 다 알고 있는 듯싶었다.
“내가 아무 계획도 없이 그런 식으로 거래 파트너한테 빅엿을 먹였을까. 아,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조인호가 어떤 인간인진 차 팀장님보다 내가 더 잘 아는 거 같은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서정혁답다고 해야 하나. 현서는 작게 탄식하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서 미련하게 이 비를 다 쫄딱 맞고 온 거고. 조인호 때문에 일 틀어질까 봐 마음이 달아서.”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괜스레 초라해진 기분에 양 손끝을 꾹 말아 쥐었다.
“저랑 조인호 씨의 사적 관계 때문에 조금이라도 피해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본부장님 말씀대로 돈값,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영 맹추였네.”
낮게 읊조린 그가 이마를 짚었다. 왠지 모르게 저만큼이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거 벗고 이거 덮어요.”
그가 불현 벗어 뒀던 자신의 코트를 내밀며 말했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 손만 바라보고 있자 그가 슬쩍 눈썹을 추켜세웠다.
“또 두 번 말해야 들어요?”
대놓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감사합니다.”
마지못해 코트를 받아 들었다. 젖은 제 겉옷을 벗고 그의 코트를 어깨에 두르자 따뜻한 온기가 스르르, 차가운 몸을 감싸 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파르르 떨려 대던 입술이 조금씩 진정이 돼 갔다. 남자의 코트엔 묵직한 향수 냄새가 고스란히 배 있었다. 차고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그제야 가라앉는다.
참으로 간사하기도 하지. 단 한 번 남자와 몸을 섞어 봤다고 그 향기가 이렇게나 익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하룻밤, 분별없이 휩쓸린 충동의 대가가 너무 컸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엔 침묵이 흘렀다. 현서는 고개를 돌려 빗줄기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차창 밖 풍경만 멍하니 응시했다.
아니. 실상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게 시커먼 바깥 풍경인지, 아님 거기에 비친 남자의 얼굴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차창 속 서정혁은 굳은 얼굴로 태블릿 화면을 넘겨 가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늘, 언제 봐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그날 밤, 이성은 오간 데 없고 본능만이 존재하던 침대 위, 그 순간에도 그는 완전무결했으니까. 엉망으로 흐트러져 볼썽사나웠던 건 저였지, 서정혁이 아니었었다.
지금도 그랬다. 또 저 혼자만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계속해 잊으려 노력했었다. 어떤 동요도 없는 그를 따라 저 또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일을 하고,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거라고. 버림받는 일엔 이골이 난 차현서니까. 일방적으로 관계를 차단당하는 일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또한 자연스레 곧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늘 그랬듯 금세 평정을 되찾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그렇게 가증을 떨며 이 ‘사고’를 수습해 보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되레 더 버거워진 무게의 마음이었다. 더 선명해진 감정의 파도가 시시때때로, 울컥울컥 그녀를 덮쳐 왔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거친 노도처럼.
바로 지금처럼 말이었다.
맺혔다 흘러내리길 반복하는 빗물 때문에 차창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었다. 비에 젖은 눈꺼풀이 무거웠다. 두 알이나 급하게 털어 넣었던 약 기운 탓인지 머릿속이 혼몽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깨에 두른 남자의 온기 때문인 건가.
가만, 침묵을 지키며 눈동자만 끔뻑이던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 결국 까무룩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