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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28화 (28/115)

♬(28)

툭.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는 그의 손길이 퍽 짜증스러웠다. 벌써 세 통째. 차현서가 제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오후 3시경 그녀가 늦은 체크 아웃을 하고 나갔단 보고는 이미 전달을 받았다. 그 길로 곧장 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는 것 또한 들었다. 그런데 왜 전화를 받지 않는가.

어젯밤 무리하게 몰아붙였던 걸 항의라도 하는 건가. 하룻밤 사이에 제게 완전히 흥미가 떨어졌단 뜻인가. 아님 결코 다신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단 노골적 의사 표현인 건가.

반대인 상황은 많았어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벙찐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벤야민 발터 따위에게 뒤통수를 후려 갈겨진 것보다도 더.

타닥. 타닥.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그의 얼굴에 다소 초조함이 배어났다.

***

“아빠, 혹시.”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현서는 말을 덧붙여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더 생길 ‘무슨 일’도 없을 터였지만 그래도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평소 바쁜 시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가 요 며칠 계속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있는 거였다. 특별한 용건도 없었다. 그저 잘 지내냐, 아픈 데는 없냐, 밥은 먹었냐, 따위의 시시콜콜한 질문 몇 개를 던질 뿐.

- 일은, 무슨.

“그럼 다행이고요. 저도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무 일.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야 했는데.

전화를 끊으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닷새가 지났다. 당일 저녁 서너 통의 전화가 걸려 왔던 걸 제외하면, 서정혁에게선 달리 사적인 연락이 더 오지 않고 있었다.

매일 아침 보고를 위해 본부장실을 들어가고, 시시때때로 소집되는 회의에서 얼굴을 마주했지만 서정혁은 아주 평온하기만 했다. 언제, 무슨 일이나 있었냐는 듯 일말의 동요도 없이 서늘한 그 얼굴은 모든 게 다 저 혼자 꾼 꿈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래서 더 확신이 섰다. 그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도리어 가슴이 더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착각했던 그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접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버림받아 혼자 남는 일에 이골이 난 저였으므로.

“제가 갈까요?”

비서실에서 요청한 자료를 들고 나서자, 문 앞에 있던 솔이 눈치 빠르게 물어왔다.

“아냐. 내가 갈게. 본부장님께 직접 설명드릴 부분도 있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아니, 오기였다.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만큼이나 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상처 따위 받은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정작 상대는 털끝만큼의 관심조차 없을 터였지만.

똑똑.

짧은 노크를 하고 들어선 사무실 안, 서정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레오에게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던 건지 짙은 눈썹 한쪽을 크게 들썩였다. 무언가 불쾌할 때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Wow, the fucking best team in the world.”

거칠게 내뱉는 영어 악센트엔 비아냥이 그득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멀뚱히 문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자, 그제야 서늘한 시선이 제게 돌아왔다.

“말씀 나누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급한 일 아니니 이따가 다시….”

“들어와요.”

짧은 한마디에 그와 마주 서 있던 레오가 고개를 갸웃하고 현서 옆을 스쳐 나갔다. 그녀는 어쩐지 심사가 좋지 않은 것 같은 남자 앞으로 또각또각 다가섰다.

“말씀하신 자료 가져왔습니다.”

태연을 가장하고 품에 안고 있던 서류철을 그 앞에 올려놓았다.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또 은성 내부에서도 꽤 오래 기밀이었던 자료인지라 보시기에 썩 편한 상태는 아니지만….”

“되게 평온하시네.”

꺼칫하게 말을 끊어 낸 목소리가 어딘지 사나웠다. 슬몃 고개를 들자 커다란 동공이 저를 매섭게 응시해 왔다. 싸늘히 굳은 얼굴에 불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리 차 팀장님, 공사 구분 너무 확실하신 거 아닌가.”

무슨 말인가 싶어 눈동자를 가만 깜빡이는데, 그가 책상 아래에 있던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툭, 위에 올려 던졌다.

오늘 아침 일찍, 자신이 비서실에 전달했던 쇼핑백이었다. 백 안에는 닷새 전 조인호의 약혼식에서 입었던 보랏빛 드레스와 구두 그리고 액세서리들을 그대로 담아 보냈었다. 어차피 사적으로 받은 물건들도 아니니 당연히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날 밤 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야겠단 내심도 없진 않았지만.

“잔뜩 싸질러 놔선 반품도 안 될 물건을, 나더러 어쩌라고.”

남자의 표정이 못 견디게 차가웠다. 쏟아지는 시선을 그대로 따갑게 맞으며 이를 꾹 물고 대꾸했다.

“깨끗이, 드라이 세탁했습니다.”

“내 취향의 패션이라고 했지, 페티쉬 있다고까진 말 안 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아. 다른 여자한테 입혀 놓고 또 떡 치라는 배려신가.”

“본부장님.”

“언제까지 시치미 떼고 뻔뻔하게 구나 지켜보려고 했는데, 허…. 이걸 도로 나한테 보낼 줄은.”

기가 막히단 듯 조소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렇게까지 짜증이 난 건지, 현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지난 며칠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했던 건 되레 그였다. 서로가 원하는 대로 깨끗이 정리하자고, 받은 옷 돌려준 게 이렇게나 비아냥댈 일이던가.

“말해요. 뭘 어쩌자는 건지.”

“…뭘 말씀이십니까?”

“기억이 안 납니까? 그날 나랑 섹스했잖아, 당신.”

필터도 없이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직설적 문장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감쳐물었다. 퇴근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났다곤 해도 사무실이었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공적인 대화만 오가야 할 공간에 울려 퍼지는 저속한 단어의 발음들이 퍽 이질적이어서.

“뭐가 이렇게 태연해?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데?”

미간을 잔뜩 조인 남자가 추궁하듯 물었다. 아주 짜증스럽다는 듯이.

현서는 애써 땀이 찬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공사 구분을 잘합니다. 그날 밤 일은 예상 못 할 만큼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마셔서 취한 상태였고, 그래서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 같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제 딴엔 최대한 수습해 보려는 것뿐입니다. 본부장님께서도 분명히 그걸 원하실 거라는 거 잘 알고요. 혹여나 옷을 돌려드린 게 제가 본부장님 성의를 무시한 거라고 판단해 불쾌하셨던 거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어조였다. 널을 뛰는 감정, 뇌리를 스치는 수만 가지 생각들을 완전히 억누른.

짧은 정적이 흘렀다. 가만, 저를 빤히 노려보던 그의 잇새에서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어이가 없네.”

“…….”

“이런 엿같은 기분은 또 처음이라.”

저야말로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입에서 그날 밤 이야기가 먼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도리어 입에 올리면 공사 구분 확실히 하잔 타박이나 들을 줄 알았었지.

“그래서. 그렇게 날 이용할 만큼 다 이용해 놓고 없던 일로 하고 싶으시다. 요약하자면. 이런 뜻.”

“이용은…. 하, 이용이 아니라…. 물론,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좋아요. 깔끔해서 좋네.”

그가 빈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제 말을 이렇게 곡해하는 건지, 그 논리의 흐름이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시 두 눈썹을 들썩인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알아들었으니까 나가 봐요.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 많은데 엿같은 소리까지 들으니까 아주 골이 터질 것 같네.”

어서 제 앞에서 꺼지라는 듯, 그가 무람없이 문을 향해 턱짓했다.

결국, 그녀는 변명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그의 공간에서 하릴없이 쫓겨나왔다.

***

“씨발….”

현서가 놔두고 간 자료의 같은 페이지만 한참 노려보던 정혁의 잇새에서 기어코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들고 있던 만년필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곤 커다란 의자에 푹 등을 기대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와 미간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꾹꾹 눌렀다. 앙큼하게 지껄이던 여자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던 갑작스러운 사고. 술에 취해 응했던 감정적 행동.

섹스는커녕 제대로 남자 손도 한 번 안 타 봤겠다 싶으리만큼 버거워했던 주제에, 이제 와 공사 구분을 깔끔히 하고 싶으시다. 허, 기가 막혔다.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 이젠 정말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는 게 아닌가.

어떤 관계든, 그 주도권은 늘 자신이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다. 늘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이 우위에 설 줄만 알았지 이런 식의 일방적 거절과 무시는 익숙지 않은 거였다.

그런데 고작 한 품도 안 될 여리여리한 여자 하나가 제 속을 죄 뒤집어 놨다. 고작 하룻밤, 몇 마디 말로.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 해갈은커녕 갈수록 모호하게 부피를 키워 가는 갈증에 더 갑갑한 기분만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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