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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27화 (2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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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잉, 지이이잉.

현서는 집요하게 이어지는 진동 소리에야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천근만근, 납덩이처럼 무거워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도 남아 있질 않았다. 어둡게 처진 암막 커튼과 낮은 조도의 스탠드 불빛.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지이잉.

계속 이어지는 진동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사이드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쥐었다. 액정에 뜬 이름은 ‘준한 선배’였다.

“응…. 선배.”

잠겨 있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핑그르르, 눈앞이 돌아 다시 시트에 고개를 푹 파묻어야 했다.

-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어제 술을 좀 마셨더니.”

- 술은 왜 또. 누가 또 시비 걸었어?

밤새도록, 아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상사와 미친 짓을 하느라 죽을 것 같단 대답을 솔직히 할 순 없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근데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 음. 나 지금 점심 먹고 나오는 길에 저녁에 시간 되냐고 전화한 건데.

그제야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그나마 토요일이라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아….”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샜다. 얼마나 세상모르고 잤으면 시간이 이렇게 되도록 몰랐던 건지.

- 상태 보니 저녁에 시간 안 되겠네. 괜찮아? 대체 얼마나 마신 건데.

“하…. 별로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 많이 안 좋은 거면 약이라도 사다 주고. 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정말.”

준한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흘리곤 전화를 끊었다. 괴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길게 쓸어올렸다. 어젯밤, 그 난잡했던 사건의 흔적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드레스와 구두. 체액으로 척척하게 젖은 침대와 소파 시트. 아직까지도 진하게 남은 남자 특유의 향수 냄새까지.

현서는 불시에 밀려든 자괴감에 두 손으로 깊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 미쳤지.”

숙취 탓인지 골이 댕댕 울렸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술 때문은 아니었다.

손을 떼어 내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의 제 몸을 내려다봤다. 이렇게 난잡할 데가. 온몸 구석구석, 꼼꼼히도 남겨 놓은 남자의 흔적들을 훑으며 입술을 꾹 눌러 긁었다.

목덜미와 젖가슴, 아랫배를 따라 이어지는 울긋불긋한 열꽃과 허벅지 사이에 잔뜩 말라붙은 체액의 흔적까지. 또렷한 증표에, 어젯밤 그 말도 못 하게 음탕했던 순간들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밤새 남자의 목덜미에 매달려 그 저속한 신음만 흘렸던 걸 생각하면 제 혓바닥이라도 깨물고 싶을 수치스러운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어쩌자고 이런 말도 안 될 짓을 한 건가.

조인호 때문에. 술기운에.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 잠깐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아무리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려 봐도 구차하기만 했다. 팩트는 명확했다. 어젯밤 차현서는 거부 못 할 서정혁의 유혹에 넘어갔고,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끌린 것뿐이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침대 위에서의 서정혁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거침없고 매정했다. 딱 한 번만,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끝날 줄 알았던 남자와의 섹스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정신 못 차리게 진득한 애무와 격렬한 삽입, 길고 깊었던 오르가슴은 한 번만으로도 충분히 녹초가 됐다. 그런데 남자는 그 진 빠지는 행위를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밤이 새도록 지치지도 않고 저를 안아 오는 그의 흉포함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결국, 마지막 서정엔 눈꺼풀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자포자기한 상태로 엉엉 울기만 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서정혁이란 수컷과의 섹스를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는 걸 뒤에야 깨달은 거였다.

온몸이 엉망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남자의 정액에 절어 있는 기분이었다.

이를 꾹 깨물고 샤워실로 향했다. 물줄기에 무거운 몸을 밀어 넣고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몸을 문질렀다. 지울 수 있다면 모조리 다 지우고픈 흔적이었다. 그저 하룻밤. 철없는 충동에서 비롯된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정사의 흔적이 가득한 이 호텔 룸에 저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밤새 굶주린 짐승처럼 저를 탐하던 남자는 한마디 인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마치 혼자 꿈이라도 꾼 것처럼, 홀연히.

안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서정혁에겐 이런 섹스가 얼마나 쉽고 가벼운 일일지, 충분히 짐작했고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저 하룻밤, 서로 즐기고 욕구를 채웠던 것뿐. 촌스럽고 구차하게 지난 일을 곱씹을 이유도, 없는 의미를 부여해 가며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그러니 모조리 다 잊고 지울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감정을 누르고 다독여 흔들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길 원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현서는 몇 번이고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

기다란 복도를 따라 빠르게 내딛는 정혁의 발걸음엔 짜증과 신경질이 가득했다.

이른 아침, 생경했던 욕망의 여운을 곱씹을 새도 없이 레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아시아 본부를 총괄하는 본부장인 자신도 모르는 아시아 자문단이 새로 구성됐단 엿같은 소식이었다.

[회의 끝난 지는 20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언론 보도 나올 것 같고요. 배포한 보도 자료상으론 특별히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내용은 없어 보입니다. 상해 S타운 부동산 투자 건 제외하곤 구체적인 안건도 딱히 없었던 것 같고요.]

[우리 두 이사님들께선?]

[웨이 홍 타오, 스탠리 쪽은 여전히 연락 두절입니다.]

[허.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진짜.]

사무실 문을 거칠게 젖히고 들어서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신자는 칼 앤더슨. 골드스톤의 창립자이자 최대 주주. 저를 이 자리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었다.

[접니다, 회장님.]

- 그래, 라이언. 알고 있네.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할 담력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지.

[지금 막 제 비서한테 아시아 자문단 회의가 막 끝났단 보고를 받았습니다. 전 제가 언제 새 자문단 구성을 컨펌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혹시 회장님은 기억이 나시나 해서요.]

강강한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메아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라이언 서의 라이벌로 꼽지만, 또 한편 상대조차 되지 않을 한 수 아래의 인물로 꼽는 게 ‘벤야민 발터’ 골드스톤 경영 이사였다.

10여 년 전, 정혁이 앤더슨의 눈에 띄기 전까지만 해도 발터를 그의 후계자로 꼽는 분위기가 꽤 공공연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월가에 혜성처럼 등장한 라이언 서 덕에 발터는 한순간에 쌓아 둔 자신의 입지를 잃어야만 했다.

그들만의 리그였던 곳에 당당히 발을 들인 ‘검은 머리 이방인’ 서정혁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특히나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도산 위기의 J호텔그룹을 고작 200억 달러에 인수해 2년 만에 800억 달러로 매각했고, 현재 중국 최대 규모의 항공사의 지분을 헐값에 사들여 천문학적인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골드스톤 창립 이래 최대의 실적들이 모두 다 라이언 서의 작품이었단 거다.

그러니 이후, 자연스레 앤더슨의 신임은 오롯이 라이언 서의 차지였고 명실공히 유일한 후계자로 지명되는 것 또한 그뿐이었다. 발터 벤야민 따위, 그에겐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잠시 방심을 했다. 그가 얼마나 야심 크고 비열한 인간인지 잊고 있었다. 놈은 언제든 판을 뒤집을 복수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는 걸.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았다.

- 이거, 라이언 자네답지 않게 흥분을 했구먼.

[회장님답지 않게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신 것도 사실이죠.]

비아냥조로 받아치는 정혁의 눈매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뒤를 지키고 있던 레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마를 짚었다. 골드스톤의 차기 후계자 지명에 칼자루를 쥔 앤더슨에게 납작 엎드려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항의라니. 퍽 라이언다운 처사였지만 그래서 더 걱정스러웠다. 아부는커녕 제발 뱉는 단어라도 공손했으면.

- 부동산 투자 쪽은 라이언 자네보단 발터가 더 베테랑이지. 레오 그 친구가 아직 자문단 첫 안건에 대한 보고는 안 했나?

[그럴 리가요. 워낙 뛰어난 능력의 비서를 둔 덕에 벌써 비공개 회의록까지 가져다 읽었습니다. 읽어 보니 회장님께서 언제 그렇게 친구분과의 우정이 두터워지신 건지 싶던데요.]

친구라 함은 ‘래리 브라운’을 말하는 거였다. 블랙스톤의 공동 창업자 명함만 달고 있던 래리 브라운이 산하 부동산 펀드에 손을 대면서부터 사내 정치적 흐름이 묘하게 바뀌었다는 걸 분명 느끼고는 있었다. 발터가 그 밑으로 줄을 댈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하긴 했지만.

- 하여튼, 욕심하고는. 한국 일만으로도 힘들까 봐 일부러 배려해 줬더니. 생각해 주고도 되레 비난만 얻어 먹는구먼, 거참.

[아. 이러려고 절 여기 짱박아 두신 겁니까?]

- 먼저 한국엘 가겠다고 나선 건 자네야. 불필요한 의미 부여 말게. 라이언 자네는 당분간 한국 시장 선점하는 데나 집중하란 뜻이니까.

[이거 새삼스럽네요. 아시잖습니까, 제가 멀티태스킹이 끝내주게 잘 됩니다. 지난 10년간 회장님께서 뭘 시키시든 이 일 저 일 동시에, 빈틈없이, 아주 완•벽•하게 처리했었죠. 그 일 다 하면서도 짬까지 내서 여자도 만나고요.]

아. 그래서 이렇게 더 과도하게 짜증이 났군.

그제야 레오는 알 것 같았다. 지금 제 상사가 유독 심기가 불편한 까닭을. 오늘 아침, 자신의 펜트하우스가 아닌 J호텔로 저를 불렀던 이유를.

레오는 여지없이 그 여자, 차현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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