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하….”
얼굴을 감싸 쥔 두 손바닥 새로 긴 한숨이 퍼져 나갔다. 비어 있던 스위트룸의 조도가 낮았으나 구태여 불을 찾아 켜지는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어둠 속에 영영 숨어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체 못 할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서정혁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애당초 여길 오는 게 아니었다.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제 마음만 정리됐다고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될 거란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 그런 짓을 해 놓고도 뻔뻔히 바람을 피우잔 소리까지 할 수 있는 놈인 줄은….
아니.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치심의 근원은 조인호가 아니었다.
모든 건 다 서정혁 때문이다. 하필 그 사람 앞에서 제 실책과 치부를 내보였다는 게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도와줘요?”
제대로 도망칠 곳도 찾지 못해 허우적대는 제 처지가 얼마나 너절해 보였으면 요청한 적도 없는 도움을 먼저 권한 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카드 키를 받아 쥐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조인호의 패악과 몰상식함이 꼭 제 위에 덧붙여진 것만 같았다. 자신과 조인호를 동류의 인간으로 묶어 보는 건 아닐지. 저를 얼마나 한심하고 판단력이 없다 생각할지.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꼭대기 층에 내려 이 방에 들어오는 내내 그런 생각들만 잔뜩이었다. 다른 건 안중에도 없고 사고의 흐름이 오로지 서정혁 그 남자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언제,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자꾸 그에게로 쏠리는 마음을 막을 수가 없어졌다. 흔들렸다. 매혹적인 외모, 여유 넘치는 미소,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 누구든 착각하게 만들고야 마는 매끈한 매너. 그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울 일상일 뿐, 그 어느 것 하나 진심일 리 없단 걸 알면서도 하릴없이 흔들렸다.
어쩌다 마음이 여기까지 온 걸까.
스스로도 한심하기 짝없는 꼴에 부질없는 자책만 이어졌다.
문득 삐, 하고 들려온 또렷한 전자음이 복잡한 상념을 끊어 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서정혁이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얼어 있는 현서를 힐끗 확인한 그가 태연히 미니바로 걸어갔다. 의자 위,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지고 술을 고른 그가 그녀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현서는 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제 유리잔을 채우는, 그의 너른 등을 보며 말했다. 수치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조인호, 아직 밖에 있는데.”
그의 한마디에 발끝이 맥없이 묶였다.
“실컷 혼자 의심해 놓곤, 정작 인정하니 거짓말이라고 안 믿던데요.”
“…….”
“차현서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하찮다는 듯 읊조리는 남자의 입술이 못 견디게 얄미웠다. 굳이 이렇게 조인호의 추태를 일일이 보고해야만 하는가 싶었다. 분명 일부러였다. 일부러 사람을 들쑤시고 관찰하며 즐기는 못된 버릇.
애써 가라앉힌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거예요?”
“당신 예쁘게 하고 왔다고, 침 질질 흘리면서 구접 떨 때부터?”
처음부터 다 들었단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꾹 말아쥐었다.
달그닥, 얼음을 굴린 그가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주륵, 매끄럽게 흘러들었다. 흡사 렘브란트의 그림 같았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깊게 움직거리는 것조차 우아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날것처럼 거칠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데, 보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으로 고결했다.
“한잔해요. 많이 심란해 보이는데.”
남자는 상대의 의사 따위, 상관없다는 듯 또 다른 컵 하나를 가득 채웠다.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제 몫의 브랜디를 가만 응시하다, 또각또각 다가가 잔을 집어 들었다. 오기처럼 고개를 젖혀 한 잔을 다 털어 마시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가 웃기세요?”
그를 쏘아보며 날을 세웠다. 무안함과 수치스러움이 결국 한계에 이른 거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꼴 좋다, 뭐 이래서 웃으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을 쪽팔리게 만드세요? 지나가다 우연히 들으셨음, 그냥 못 들은 척 지나가시면 될 일이지 왜 쓸데없이 도와주겠단 소릴 하셔선….”
“그럼 받지 말지 그랬어요.”
말을 자른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시계를 풀었다. 이어 갑갑하단 듯 미간을 찡긋이며 넥타이를 풀어냈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의 존재가 고스란했다. 바 테이블에 불량히 기대서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퍽 무례하다.
“여기 왜 왔어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질문이 이어졌다.
“차현서 씨야말로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는데, 왜 굳이 왔느냐고. 쪽팔리게.”
절대 그 인간을 돌아보지 않겠단 의지와 당장 도망칠 곳이 필요했던 절박함. 그 두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데가 있었다.
왜였을까. 현서는 답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지이잉.
들고 있던 클러치 백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회피하듯 꺼내든 핸드폰 액정엔 ‘조인호’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발작처럼 수신 거부 버튼을 꾹 눌렀다.
지켜본 그가 또 피식, 웃었다. 흡사 제가 쳐 놓은 덫에 걸린 먹이를 감상하는 표정이었다. 서정혁은 분명히 알았다. 자신이 결코 이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걸.
취기가 오른 것인가. 얼굴에 낯선 열감이 오르고 목이 탔다. 빈 잔을 다시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저히 맨정신으론 버틸 수 없을 기분이라.
“내가 먼저 답할까요. 그냥 못 지나치고 쓸데없이 참견한 이유.”
불쑥 가까이 다가선 정혁이 그녀의 빈 잔을 빼앗아 내려놨다. 부지불식간 핸드폰도 빼앗겼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위험스러웠지만, 테이블에 등이 막혀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었다. 은은한 플로어 조명 빛을 받아 음영이 선명해진 얼굴이 바로 앞에 다가붙었다. 들숨 가득 들어차는 남자의 체향이 버거웠다. 귓가에 경보음이 울었다.
“당신 손에 쥐여 준 게 하필 이 룸의 키였던 이유.”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제발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이 불온하고 불길한 예감이 부디 저만의 착각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로 붙박은 시선이 내포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짙어진 눈매, 이채를 띠는 눈동자. 성애를 갈망하는 남자의 욕망 어린 얼굴. 그 원색적 의사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모른 척 의뭉을 떨 수도 없었다.
지이이잉.
테이블 위, 경고 같은 진동이 다시 울었다. 그 시선에 포박되어 확인할 순 없었으나 발신자는 뻔했다.
“이런 거…. 재밌으세요?”
입술이 떨려 목소리가 삐끗 샜다.
“흥미 없는 짓까지 하고 있을 여윤 없는데요.”
“염문설도 무지 화려하고요. 할리우드 여배우부터 모델, 대학교수, 정치인, 기업인, 심지어 유부녀였던 하원 의원하고까지 스캔들이 났었어요. 아주, 화려하다 못해 스펙터클하던데요. 직종, 인종, 나이, 성별 싹 다 불문.”
저를 놀리고 있단 생각밖엔 할 수 없었다. 그 잘나고 화려한 여자들도 만족하지 못해 수없는 염문설을 뿌렸던 그가 돌연 제게 진지한 마음일 리 없었다. 지금 이 남자에겐 그저 하룻밤 놀고 즐길 새로운 상대가 필요한 것뿐. 그간 쌓인 피로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놀이, 혹은 게임 같은 것 말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그 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이었을 뿐이었다. 쓸데없이 멍청하고, 더없이 쉬운 차현서가.
지이잉.
끊이지도 않고 울리는 진동 소리에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매일 얼굴을 보고 일을 해야 하는 직장 상사와 몸을 맞댄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 남자에겐 아무 일도 아닐지 몰랐다. 몸이 동할 때 한 번 관계를 맺고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태연히 함께 일을 하는. 소름 끼치게 공사 구분 확실할 그에겐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을 확률이 컸다.
지잉, 지이이잉.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 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면, 애써 외면하고 억누르던 감정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 것인가. 행여나 더 커질지 모를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지이잉.
아니. 아니다. 어차피 하룻밤이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차라리 지금 한 번 그와 자고 나면 되레 모든 게 명확해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애매한 이 감정이 진심이라면 미련 없이 정리할 수 있을 기회고, 착각이라면 더 다행한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서정혁이었다. 고작 이깟 하룻밤의 일을 복잡하게 여길 리도, 사적인 관계에 흔들려 결코 일을 그르칠 리도 없는 남자.
“늘 생각이 지나치게 많으시네.”
남자가 느긋이 타박하며 엄지와 검지, 손가락 두 개로 그녀의 턱을 살짝 쥐어 올렸다. 칠흑같이 새까만 그의 시선이 빽빽이 쏟아졌다. 늘 서늘하던 눈동자엔 나른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답도 너무 늦고.”
지이이잉.
취한 게 분명했다. 코앞에서 울리는 낮은 음성에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아득한 호기심이 일었다. 더 짙은 열에 잠식된 남자의 모습이 막연히 그려졌다. 이 노골적인 유혹을 거절할 방법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간신히 누르고 있던 불온한 갈망이 지글지글 끓어 올랐다.
“제가 여기 온 이유. 그러니까….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무슨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같은 이유, 예요. 본부장님이랑.”
토로하듯 단숨에 쏟아 냈다. 열에 잠식된 두 뺨이 들썩이고, 가슴은 높은 파고를 맞은 듯 울렁댔다.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내뱉던 숨이 숫제 그의 입술 새로 집어 삼켜진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