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약혼식은 매끄럽게 진행이 됐다. 약혼 서약을 낭독하고, 반지를 교환하고, 커다란 케이크를 절단한 뒤 두 사람이 함께 촛불을 불어 끄자 여기저기에서 축하의 박수 소리가 터졌다.
현서는 무감한 얼굴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한때는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제 앞에서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하고 있으니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긴 했다.
그러나 그냥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미련은커녕 원망의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분노도 원망도 상대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드는 감정이란 걸 깨달았다.
도리어, 진즉에 결혼이 깨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조인호 옆에 서 있었을 여자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진저리까지 쳐졌다. 한순간 오판으로 평생을 후회 속에 살 뻔한 걸 떠올리면 끔찍하기만 할 뿐.
식순의 마지막, 조 회장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모두가 축배를 들고 축복의 말들을 쏟아 냈다. 조인호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정혁과 현서에게도 다가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상상도 못 할 만큼 평연했다.
그래서 조인호의 마음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그렇게 쉽게 방심을 했던 건지도 몰랐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꽤 무르익어 가고 있을 무렵. 오늘 이 자리에서 눈도장을 찍어야 했던 주요 인사들도 다 만났고, 목표했던 일들을 어느 정도 다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혼자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각. 북적이는 안과 달리 복도는 한산했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부러 제일 먼 파우더 룸까지 걸었다. 안에서 자신을 힐끗대며 보던 그 시선들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얼굴에 철판을 깐 것도 아니고 어떻게 파혼한 남자 약혼식엘 나타날 수 있느냐던 누군가의 수군덕거림도 똑똑히 들었다.
“당사자들은 괜찮을 수 있어도 주변에서 들쑤시고 괴롭힐 텐데? 대한민국에서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들 다 모이는 자리잖아, 거기가.”
얄미운 서정혁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단 게 분했다.
괜찮다, 상관없다, 신경 안 쓴다, 주문처럼 생각하고 되뇄지만 내심 긴장을 하고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들어서자 긴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옷차림을 거울에 비춰 보며, 살짝 번진 메이크업을 정돈하고 손을 씻었다. 이제 길어야 한두 시간만 더 버티면 될 거라 생각하고 다시 복도로 걸어 나갔을 때였다.
“차현서.”
등 뒤에서 소름 돋는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조인호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불안이 그득했다.
“예쁘게 하고 왔네? 잘 어울린다. 이런 스타일, 의외네.”
위아래로 스캔하며 다가서는 얼굴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안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와 줘서 고맙다.”
“일 때문에 온 거야. 인호 씨 보러 온 게 아니라.”
“어쨌든. 왔으니까 고맙다고.”
치솟는 불길한 예감에, 현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섰다. 계속 상대해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 계속 만날까?”
예고도 없는 미친 소리가 날아들었다. 기막혀 그 자리에서 헛숨을 터뜨리는데, 또다시 조인호가 제 앞에 와 섰다. 그는 어이없으리만큼 진지한 표정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난 그러고 싶은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냥 계속 만나자, 우리.”
“조인호 씨.”
“너도 알잖아. 이 결혼 나도 좋아서 하는 거 아니라는 거. 그냥 힘이 돼 줄 수 있는 배경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 거. 누누이 말했지만 나 너한테 진심이었어. 진심으로 너 사랑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미련 많이 남았고. 우리 좋았잖아. 잘 맞는 것도 많았고.”
“미안한데. 난 당신 사랑한 적도 없고, 이제 다신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도 않거든?”
“그래. 그렇다고 믿고 싶겠지. 그래야 너도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 이해는 해 줄게.”
황당해 헛웃음이 터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조인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인간이었는지. 타인의 말, 타인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제 감정, 제 기분만 우선인 인간이었다는 걸.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마지막 끝내는 그 순간까지도 모조리 다 제멋대로였단 걸 말이었다.
“여기 온 거, 너도 미련 남아서잖아. 안 오려고 했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안 올 수 있었던 거 아니야?”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짜증스러움에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겼다.
“아무 미련도 안 남아서 쿨하게 올 수 있었단 생각은 안 들어?”
“정말 나한테 아무 미련도 없다고?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응. 없어, 전혀.”
단호한 대답에 평정을 잃은 조인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미 끝난 지 오래야. 그렇게 끝낸 거, 나 아니고 인호 씨였고.”
“현서야.”
“헛소리 그만하고 들어가. 가서 당신 약혼녀 옆자리나 지켜.”
“내가 후회스러워서 그래! 내가 너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그래.”
흥분한 조인호의 데시벨이 버럭 높아졌다. 뭐든 제 뜻대로 안 되면 못 참는 성미의 그다웠다. 자신이 무려 먼저 다시 만나 주겠다고 말하는데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그녀에게 오기가 난 것도 같았다. 답답하단 듯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돌연 어조를 바꿔왔다.
“다시 시작하자. 내가 잘할게, 현서야. 그동안 너 상처 받았던 만큼 내가 더 노력하고 잘하면….”
“뭐를 다시 시작해, 뭐를 잘해. 결혼은 그 여자랑 하고, 연애는 나랑 하겠단 거야, 지금?”
“결혼이 아니라 비즈니스라니까? 다 알잖아. 차현서 너 이런 거 이해 못 하는 갑갑한 타입 아니잖아.”
불과 몇 시간 전 약혼녀가 끼워 준 약혼반지가 조인호의 약지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바닥이었던가 싶었다. 새삼 밀려오는 실망과 후회에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더 마주하고 있기도 역겨워 그대로 돌아섰다. 몇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뒤에서 손목을 훅 당기는 힘에 몸이 절로 돌아갔다.
“너 혹시 그새 딴 놈 생겼냐?”
“왜 이래. 놔, 이거.”
“그래. 내가 안 그래도 의심스럽긴 했다. 설마 했는데.”
이죽이는 입매가 볼썽사납게 비틀리고 있었다.
“너 서정혁 그 새끼랑 뭔 사이냐?”
“…뭐?”
“이상했어. 멀쩡히 잘 다니던 로펌 갑자기 때려치운 것도 이상하고, 그 돈 밝히는 새끼가 굳이 더 잘난 변호사들 놔두고 너 같은 초짜를 스카우트했단 것도 이상하고.”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에 그녀의 미간이 한껏 좁아져 들었다.
“뭐, 그 새끼랑 붙어먹기라도 했어? 하기야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놈일 테니 여자 하나 따먹는 건 식은 죽 먹기였겠지. 특히나 차현서 넌 돈 주면 몸이라도 팔 애잖아.”
“미친…. 미친 새끼.”
욕이 아니라 침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있는 대로 손을 비틀어 쥐인 손목을 뿌리쳤다. 그대로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조인호에게 또 붙잡히기라도 할까 소름이 끼쳐서였다. 그 역겨운 얼굴을 더 마주하고 있다간 정말이지 폭발하고야 말 것 같았다.
최악이었다. 참지 못할 모멸감에 입술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가물거렸다. 그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서 이 공간,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단 생각뿐.
위태롭게 내딛던 발끝이 겨우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익숙지 않은 구두의 높이에 여린 발목이 맥없이 밖으로 꺾였다. 몸이 기우뚱 기울어 그대로 넘어지는가 싶었는데, 단단한 힘의 무언가가 그녀의 팔과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세웠다.
묵직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한 현서의 눈자위가 이미 새빨갰다.
“그러게 감당도 못 할 걸, 또.”
남자의 음성이 코앞에서 흩어졌다. 저에게만 들릴 낮고 은밀한 목소리였다.
“도와줘요?”
또, 악마 같은 얼굴로 물어 오는 그에게 시선이 포박됐다. 이성과 달리 제멋대로 울렁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입술 속 여린 살만 연방 질근거렸다.
쪽팔리고 화나고. 수치스럽고, 쓰라렸다. 뭘 도와주겠다는 건지, 말뜻을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그냥 그래 달라는 애원이 하고 싶어졌다. 그가 내밀어 온 손을 덥석 잡고 싶어진 거였다.
“그래요, 그럼.”
또 멋대로 속을 읽어 낸 그가 불쑥 검은색 카드 키를 내밀어 왔다.
“피곤해 보이는데 먼저 올라가서 쉬어요.”
“…….”
“나도 정리하고 금방 따라갈 테니까.”
꼭 누구에게 들으란 듯, 살짝 볼륨이 높아진 목소리였다. 불현듯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졌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도와주겠단 그 말의 의미를. 제 등 뒤에, 뒤쫓아 온 조인호가 버젓이 서 있단 사실도.
“자.”
카드 키가 가슴 앞에서 흔들렸다. 그게 꼭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키 같았다. 아니.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지러운 감정이 이미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라.
결국, 느긋이 채근하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홀린 듯 카드 키를 받아 들었다. 찰나에 스친 체온에 손끝이 저릿저릿 울었다.
또각또각. 현서는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