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현서는 거울을 멍하니 응시했다.
채도 높은 보랏빛 드레스였다. 어깨와 가슴 굴곡이 훤히 다 드러나는 오프숄더에 잘록한 허리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이어지는 타이트한 핏감까지. 평소 무채색의 무난한 오피스 룩만 입던 제 취향과는 확연 거리가 멀었다.
정말 이런 게 어울릴 거라 생각한 건가.
제 눈엔 영 태없고 어색하기 짝없는 꼴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차림새에 오히려 웃음거리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만큼.
한참을 머뭇거리다 탈의실을 나섰다. 마음 같아선 다시 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으나 그래도 여기까지 저를 데려온 그 성의를 생각해 일단은 그대로 나갔다.
지나치게 번쩍이는 쇼퍼 룸 조명에 눈이 다 부셨다. 소파에 기대앉아 태블릿 피시를 응시하던 정혁이 그대로 눈동자만 치켜뜨며 그녀를 훑었다.
“이런 스타일은, 저랑은 좀….”
부담스러우리만큼 집요한 시선에 겨우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데, 남자의 진한 스킨 향이 성큼 제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쇼퍼가 미리 가져다 놓은 액세서리 진열대에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 화려한 게 잘 받으시네.”
귀걸이 몇 개를 번갈아 들며 허공에 올린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네킹처럼 선 그녀 위에, 어떤 액세서리가 더 잘 어울릴지 이것저것 가늠해 보는 거였다. 꼭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괜스레 열이 올랐다.
“이걸로 합시다. 나머지 액세서리는 더 필요 없을 것 같고.”
결국, 볼드한 디자인의 금빛 귀걸이를 고른 그가 옆에 서 있던 쇼퍼에게 넘기며 말했다.
“힐은 저거.”
느긋한 눈짓 한 번에 쇼퍼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의 주문 대로 액세서리와 구두를 챙긴 쇼퍼가 멋쩍게 선 현서 앞에 그것들을 내밀었다. 역시나, 제 손으론 절대 고르지 않을 디자인의 것들이었다.
“본부장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작정하고 그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을 것 같습니다.”
“뭐가요.”
“좀 과한 것 같아서요. 말씀드렸다시피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일하러 가는 거잖습니까. 본부장님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하는 행사인데 아무래도 너무 튀는 차림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차현서 씨도 따로 초대장 받았잖아요.”
“…그건….”
“그리고 애당초 그 자리에 희희낙락 놀러만 가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다들 각자 비즈니스 하러 가는 거지.”
“그래도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도 아니구요.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감사하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하죠. 난 내 수행원이 후줄근한 것보단 과하게 튀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알다시피 내가 좀 관종이라.”
그는 헛소리 같은 농담을 하며 날카로운 턱선을 쓸었다. 기다란 손가락 마디에 걸린 반지들이 조명에 반사돼 번쩍였다.
가만 보면, 저와는 참 달라도 많이 다른 취향의 남자였다. 무난하고 심플한, 그의 말에 따르면, ‘수녀 같고 후줄근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저와 달리, 서정혁은 빈틈없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취향을 지녔다. 또 그게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다소 과해 보일 수 있는 헤링본 스리피스 슈트를 자연스레 소화하고, 무난하기 그지없는 블랙 타이를 세련돼 보이게 했다. 알 굵은 시계와 커프스 같은 액세서리들이 끊임없이 눈을 현혹시키는 와중에도 타이 아래 끼워진 칼라 핀은 이 맹수 같은 남자를 금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하여튼, 희한한 남자.
하릴없이 쇼퍼가 내민 액세서리와 구두를 받아 착용했다. 역시나 불편했다.
어색해 뻣뻣하게 굳어 서 있는데, 거울 속 저를 빤히 뜯어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 스타일도 좀 바꿔 보는 건 어때요. 지금 무지 잘 어울리는데. 노출이 다소 과하다 싶은 것만 빼면, 뭐.”
등 뒤,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퍽 여유롭게 지껄였다.
“아쉽게도 제 취향은 아닙니다.”
“다행히도 내 취향이라 괜찮아요.”
“제가 입을 옷인데 제 취향이 너무 묵살되는 것 같단 느낌인데요.”
“앞으로도 계속 묵살하고 싶어지는 취향이네요.”
이 남자가, 진짜.
“단언하는데 내 안목이 차현서 씨 안목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진 않을 겁니다. 내가 심미안 하나는 타고난 편이라.”
대화의 끝이 결국 또 기막힌 자기애로 귀결되고 있었다. 서정혁다웠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사람 여럿 홀릴 미모인데 말이죠.”
“놀리시는 거죠?”
“내가 왜요.”
눈꺼풀을 느긋이 깜빡이는 얼굴엔 타협의 기미조차 없다. 좀 더 무난하고 적당한 디자인의 옷으로 바꿔 입고 싶단 제 의견이 씨알도 안 먹힐 거란 뜻이었다.
결국, 체념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길 수도 없을 싸움을 시작한 자신이 바보였다.
***
예상했던 바, 행사의 주인공은 단연 조인호와 그의 약혼녀 안세영이었다. 애당초 자선 행사는 두 사람의 간소한 약혼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초대 손님들의 차림들이 죄다 화려했다. 서정혁의 말대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입고 왔으면 되레 눈에 띌 뻔했겠다 싶었다. 골드스톤 라이언 서의 수행원이라는 사람이 TPO에 맞지도 않는 꼴로 나타났단 뒷담화에 시달렸을 게 분명했다.
고맙다 인사라도 해야 할지. 현서는 제 옆에 선 정혁의 얼굴을 빤히 봤다. 아직 포섭되지 않은 채권자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더없이 능청스럽고 능란했다. 덕분에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저 그의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뿐.
“이게 누구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네.”
어디선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재숙이었다. 반갑지 않은 그녀의 등장에 표정을 감추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이렇게 입으니까 차 변 완전 딴 사람이네.”
진심일 리 없는 칭찬에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 열없는 미소만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양 이사님.”
다행인지, 정혁이 말을 자르며 잠깐이나마 양재숙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한국 와서 너무 일만 하는 거 아냐, 서 본?”
“일하러 왔으니 일해야죠.”
“쉬엄쉬엄해, 좀. 서 본 때문에 지금 긴장하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럴 리가요. 제가 뭐라고.”
정혁의 능청에 양재숙이 피식 웃는다. 다시 그녀의 시선이 현서에게로 돌아갔다.
“서 본이 무지 잘해 주나 봐? 얼굴도 좋아 보이고.”
“아직은 본부장님께 많이 배우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운하네. 어째 나보다 서 본이랑 일하는 게 더 낫단 말로 들려서.”
현서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더는 당신과 거래하지 않겠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 발부터 저린 거였다.
“며칠 전에 우리 기용이 만났었다며?”
양재숙이 불쑥 장기용의 이름을 꺼냈다. 착각인 건지, 옆에 선 정혁의 시선이 느껴져 정수리가 따끔댔다. 잘못한 것도 없이 또 괜스레 심장이 조였다.
“‘차현서 변호사’님한테 어찌나 큰 관심을 보이던지. 그 성격 까탈스러운 놈이 웬일로 사람 칭찬을 다 하고. 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잠깐 인사만 드렸습니다. 별다른 일 없었는데, 전무님께서 좋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이래서 차 변이 좋아. 아부도 아부 같지 않게 담백하게 한다니까. 뭐든 요란 떨지 않고 티 안 나게, 깔끔히 조용조용.”
칭찬을 가장한 빛 좋은 모욕이란 걸 누가 모르겠는가.
현서는 애써 표정을 지우며 입술을 다물었다.
“아무튼 서 본은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야 돼. 나 아니었음 이런 변호살 어디서 스카우트해? 일 잘하지, 성격 좋지.”
샴페인 잔을 뱅그르르 돌리던 정혁의 한쪽 입매가 비뚜름히 말려 올라갔다.
“그러게요. 이사님 덕분에 제가 차현서 변호사랑 같이 일하는 영광을 누리네요.”
“능청은. 나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조심해. 나 지금 차 변, 서 본한테 소개한 거 무지 후회하거든.”
웃고 있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다. 양재숙이 어디 농담 한마디라도 허투루 내뱉을 사람이던가.
“후회하셔도 늦었죠. 이미 제 사람 된 지 오랜데.”
정혁이 태연한 얼굴로 양재숙의 뒷말을 차단했다. JK와 거래를 끊으라 종용했던 게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젠 이사님이 제 허락 없인 차현서 씨한테 뒷일 의뢰 못 하십니다. 저희 일이 좀 많아서요.”
노골적인 경고였다. 다신 차현서에게 제 집 개 노릇 시키지 말라는.
현서는 불안한 눈동자로 정혁을 올려다봤다. 그 서늘한 눈동자는 일말 동요도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JK의 양재숙에게 이렇게 내놓고 시건방진 경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흡사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한 최상위 포식자 같았다. 도대체 이 남자가 고개를 숙일 누군가가 존재하긴 하는 건가.
“아주 잡아먹겠다. 누가 보면 자기 애인 뺏어가는 줄 알겠어.”
좀체 자신의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양재숙이 핏,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듯싶었다. 서정혁이 얼마나 건방지고 오만무도한 인간인지.
“아무튼, 언제 한 번 저녁이나 같이해. 이번 일 깔끔하게 마무리해 준 것도 고맙고 같이 식사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고. 그건 괜찮지?”
양재숙은 더 들으란 듯 정혁을 향해 물었다. 그는 답 대신 입매를 길게 늘이며 샴페인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