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차선엽은 대문 앞에 놓여 있던 의문의 택배 상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분명 택배로 받아 볼 물건이 없는데 상자엔 버젓이 이 집의 주소와 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딘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별일이야 있겠냐 싶어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이젠 더 이상 죽은 사람도 아니고, 빚쟁이들에게 쫓길 일도 없으니.
지이익.
상자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떼어 내고 닫혀 있던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확인했을 때, 차선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대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투둑.
바닥으로 떨어진 상자 속에서 굴러나온 물건은 다름 아닌 천식 환자들이 쓰는 흡입기였다. 24년 전, 자신이 납치했던 아이가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물건.
“아저씨, 제발요. 그거 없으면, 제 동생… 정말로, 큰일 나요. 네?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한 번만….”
제게 애원하던 남자아이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했다.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차선엽의 얼굴이 시허옇게 질려 갔다. 지금 어딘가에서, 그 끔찍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단 소리였다. 소름이 끼쳤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넋 놓고 있던 그가 문득 벌떡 일어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곤 핸드폰을 꺼내 정신없이 버튼을 눌렀다.
- 네, 아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현서의 평온한 목소리에,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졌다. 다행히 딸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였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여보세요? 아빠?
“그래. 현서야.”
모든 게 다 제 탓이었다. 못나고 어리석은 자신의 업보란 걸 잘 알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어린 딸의 인생 또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나락에서, 못난 아버지 때문에 홀로 고군분투해야 했던 딸에게 수십 억 빚을 안겨 준 것도 모자라 이젠 이런 위협까지 받게 할 순 없었다. 절대로.
“별일 없이 잘 지내나, 걱정돼서 전화했다.”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흡입기를 집어 들어 곧바로 쓰레기 봉지에 쑤셔 넣어 버렸다.
***
“보시다시피 지분 확보 문제는 이제 더 걱정 안 해도 될 수준입니다만, 안성태 의원 쪽에선 계속 적극적으로 움직일 계획인 듯합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긴장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혹시나 조 회장이나 조성호 쪽에서 움직임 눈치채지 않도록, 이 부분 문제 생기지 않게 잘 관리할 생각입니다.”
네이비색의 포멀한 정장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작은 스크린 앞에 서 있었다. 차림새는 단아하고 우아했지만, 딱 맞는 디자인 탓인지 가느다란 몸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작고 마른 줄로만 알았던 몸엔 제법 굴곡이 있었다. 여리여리한 목선과 그 아래 조금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풍만해 보이는 가슴선 그리고 잘록하게 휘어진 허리와 엉덩이로 이어지는 커다란 곡선까지. 하얗고 청초한 이미지의 얼굴과도 퍽 조화로웠다.
“다음은 지난주 선물 거래 현황입니다.”
늘 격식 차린 오피스 룩 차림에 얼굴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칭칭 감은 목도리, 속살을 감추듯 걸쳐 입은 코트와 재킷 탓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몸매였다. 아니. 늘 얼굴에서 멈춰 더는 시선이 내려가지 못했던 게 문제였던가.
정혁은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가관이었다. 넋 놓고 여자나 훔쳐보고 있다니.
문득 자신에게 향한 노골적인 관찰의 시선을 감지한 그녀가 잠시 하던 브리핑을 멈췄다. 혹여 또, 지난번처럼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건 아닌지. 그래서 정혁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닌지, 살피는 거였다.
예민한 지적 대신 느긋한 질문이 던져졌다.
“조성호 쪽에서 제시한 조건은 좀 검토해 봤습니까?”
“네. 현재 시총으로만 환산하자면 꽤 괜찮은 조건이긴 합니다만, 여러 가지 변수들과 얻을 수 있는 추가 이익들을 따져 보면 그래도 역시 기존 계획으로 저희가 예상하는 수익률엔 미치지 못합니다.”
“뭐. 그건 아직 우리가 무슨 패를 쥐고 있는지 잘 모르니까 아무렇게나 한 소리일 테고.”
그는 충분히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조성호에게 가진 패를 까고 목에 칼을 들이밀어야 할지 그 시기의 문제란 뜻이었다. 가장 위협적인 순간에 패를 까야 겁에 질린 조성호가 공포와 분노에 흥분해 가진 모든 걸 다 걸어 버리려 할 테니까.
“이상입니다.”
본인 파트의 브리핑을 마친 현서가 또각또각,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회의실 불이 켜지고, 긴장 속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휙 고개를 돌려 정혁의 눈치를 봤다. 오늘은 과연 제시간에 회의가 끝날 수 있을지, 또 무슨 비수 같은 질책이 쏟아질지 걱정을 하는 거였다.
“오늘은 이쯤 하고 마무리하죠.”
정혁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기대하고 있던 이들에게 변명의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 그가 말을 이었다.
“저녁에 은성에서 주최하는 자선 행사가 있어서. 거기 가야 합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탄식을 쏟아 내면서도 다들 오랜만에 얻은 해방감에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책상 위 태블릿 피시와 서류를 정리해 일어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현서도 제 물건을 챙겨 몸을 일으키는데 여지없이 상석에서부터 낮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행사 참석할 준비는 다 했어요?”
회의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줄곧 저를 훑고 있는 정혁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을 하느라 식은땀이 다 났던 그녀였다. 제게 자꾸 뚫어져라 보는 게 습관이냐 묻더니만 왜 본인도 그렇게 사람을 따갑게 보는 건지. 도통 속 모를 남자의 의중을 이해할 수가 없다.
현서는 서류철을 가슴께에 움켜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답했다.
“네. 오늘 참석하는 채권자들 기본 인적 사항과 성향, 그리고 조 회장과의 관계까지 본부장님 메일로 보내 놨고, 이따 가는 차에서 제가 간단히 정리해서 브리핑하도록….”
“말고.”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현서가 눈을 댕글댕글 깜빡였다.
이럴 때 보면 앙칼진 고양이가 아니라 순한 토끼 같은 얼굴이었다. 이 여잔 대체 쓰고 있는 가면이 몇 개인 건지.
“혹시, 더 준비해야 할 자료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느긋이 몸을 일으킨 정혁이 긴 다리를 뻗어 현서 앞으로 다가섰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제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무구한 얼굴.
“당신이랑 파혼한 남자 약혼하는 거 보러 가는 건데.”
“…….”
“마음의 준비 다 하셨냐고.”
그제야 핑크빛 입술이 슬몃 벌어졌다.
“준비….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일에만 신경 쓸 생각입니다. 아마 조인호 이사도 저랑 같은 생각일 거고요.”
“되게 자신 있으시네.”
그녀의 눈망울을 빤히 응시하며 한쪽 입매를 올렸다. 제 결백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결의가 그득했다. 앙큼스러웠다.
“당사자들은 괜찮을 수 있어도 주변에서 들쑤시고 괴롭힐 텐데? 대한민국에서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들 다 모이는 자리잖아, 거기가.”
“상관없습니다. 신경 안 씁니다.”
또 센 척은.
불편하면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려 했다. 어차피 예상보다 일의 진행이 나쁘지 않은 추세였고, 주요 채권자들의 지분은 이미 확보한 상태이니 구태여 껄끄러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 어쩌랴. 본인이 아무 상관 없다는데, 신경 안 쓴다는데. 혹여 괜히 마음 상할 일 있을까 싶어 걱정을 했던 게 다 무색해졌다.
“그래요, 그럼. 시간 맞춰서 로비로 나와요.”
“네. 이따 뵙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스쳐지나 회의실을 나섰다. 몇 걸음이나 뗐을까. 문득, 설마 하는 노파심이 뇌리를 스쳐 다시 몸을 돌렸다. 뒤따라 나오던 그녀가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근데, 설마.”
그녀는 또 뭔 일인가 하는, 토끼 같은 눈이었다.
“그러고 가려고?”
“네?”
정혁의 기다란 손가락이 정확히 그녀의 위아래를 훑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그대로 갈 생각이냐고.”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당황해 눈만 끔뻑이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아서. 되레 뭐가 문제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둔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낮은 음성에 헛웃음이 섞여 나왔다.
“지금 제 옷차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겠어요?”
“제가 행사 즐기러 가는 초대 손님도 아니고, 일하러 가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본부장님 수행하기에 꽤 단정은 하다고 생각….”
“왜. 그냥 단정하게 수녀복을 입지.”
현서는 그제야 입술을 감쳐물며 제 차림새를 다시 살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단 눈동자로.
“차현서 씨 이런 기업 행사 처음 참석하는 거 아니잖아. 다니면서 느끼는 바가 없었습니까? 그러고 ‘단정히’ 입고 가면 무슨 취급 당하는지? 하물며 전남친 약혼식 자리인데요.”
“…….”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들 눈엔 ‘단정’한 변호사가 아니라 ‘초라’하게 실연이나 당한, 미련 철철 남아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처량맞은 여자로밖에 안 보입니다. 알아요?”
하여튼 같은 말을 해도 좋게 포장하고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인간.
“그럼 뭐 어쩔까요.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요?”
발끈해 있는 대로 눈에 힘을 주고 저를 바라보는 여자의 반응이 퍽 재밌다.
“따라와요.”
돌아서는 그의 입매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