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장기용 사건은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최종 불기소 처분이 이뤄졌다. 폭행 사실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증인도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특히나 피해자 이유진이 꽤 오랜 기간 장기용과 은밀한 만남을 가져왔단 지인 증언들까지 한몫을 했고.
없는 증거도, 증인도 만들어 내는 판에 이 정도 상황은 유리하다 못해 식은 죽 먹기인 케이스였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조용히. 그 앞에서 피해자의 억울함과 오열은 한 줌 먼지만큼의 타격조차 없는 게 당연했다. 그들의 세상에선 이게 순리고 정의였으니까.
그리고 그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 제 위치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싸지른 더러운 오물을 대신 뒤집어쓴 개. 엿같은 세상에 동조하며 불의를 방관하는 그런, 개일 뿐이었다. 늘 그랬듯.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현서는 심란한 표정을 애써 지워 내며 물었다. 술에 취했는지, 약에 절었는지 장기용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흐릿했다.
애초에 얼굴이나 보자고, 고맙단 인사나 하려고 절 부른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이니, 그러라고 받은 돈이니, 응당 제게 의무로 주어진 돈값을 하러 온 거뿐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철부지 도련님 망나니짓에 힘껏 놀아나 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지만.
“와서 앉으라니까?”
주변에 있던 반쯤 헐벗은 여자들을 굳이 다 내보내곤 옆에 와 앉으라 윽박지르는 놈의 의도는 뻔히 불온했다. 이젠 하다 하다 부리는 개한테까지 손장난이 하고 싶단 거겠지.
겨우 발을 내디뎌 장기용 앞에 마주 앉았다. 룸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비트 소리가 사정없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유리 글라스에 술을 넘치게 따라 부은 그가 마시란 듯 손을 흔들거렸다. 못지않게 한심한 그 인생이 불쌍해 벌컥 술을 들이켰다.
“이야. 변호사님, 술 잘 드시나 보네?”
장기용은 키득대는 면상으로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웠다. 오기처럼 다시 한입에 털어 넣고 매스꺼운 속내를 숨겼다.
“미인이란 소릴 듣긴 했는데. 기대 이상이시고.”
위아래로 훑는 뱀 같은 눈동자가 역겨웠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놈과 말이 제대로 섞일 리 없다는 확신이 섰다. 주머니 속 핸드폰 옆 버튼을 꾹 눌렀다. 손끝이 짧게 진동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을 솔이 전화를 받았단 신호였다.
“나 본 적 있다면서. 언제 봤던 거?”
“일전에 JK 창립 기념식에서 잠깐 뵌 적이 있습니다.”
장기용이 미국 유학 중 잠시 귀국을 했을 때였다. 스치듯 인사까지 했으나 장기용이 그때의 저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그랬어? 근데 왜 기억이 안 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여자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데.”
장기용은 코를 훌쩍이며 술을 들이켰다. 글라스를 쥔 손이 자꾸 미끄러져, 담긴 술의 반 이상이 입 밖으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누가 JK의 장기용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전혀 알아보지도 못할 추한 몰골이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장 회장은 슬하에 삼 남매를 뒀다. 사고로 일찍 죽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째 딸 장민영 위네어패럴 대표이사. 그리고 현재의 와이프인 양재숙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장기준, 장기용 이사. 세 사람이 그의 핏줄이었다. 문제는 양재숙의 두 아들이 첫째 딸 장민영에 비해 능력도, 성품도 한참 모자란다는 데 있었다.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타고난 장기준은 제게 주어진 몫의 짐을 늘 부담스럽게 느꼈고, 버거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나타난 어떤 여자에게서 유일한 안식을 느낀 그는 별안간 이혼을 선언하며 늦반항을 했다.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 정신을 못 차렸던 거다.
막내 장기용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일찍이 사고를 쳐 도피 유학을 간 미국에서도 내내 문제만 일으켜 양재숙의 속을 썩였다. 마약, 음주, 여자, 폭행, 등등 그 종류도 스케일도 아주 다양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민영 때문에 승계 문제가 초조한 마당에, 두 아들까지 이 모양이니 양재숙으로선 복장이 터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장기준의 여자를 눈앞에서 말끔히 치워 준 것도, 장기용의 시시콜콜한 사고 뒤처리를 한 것도 모두 다 현서였다. 그건 다시 말해서, 양재숙이 제 치부를 다 알고 있는 현서를 쉽게 놔줄 리 없단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더이상 JK가의 일을 보지 않겠다 말한다면 이 인간들이 과연 순순히 수긍하고 놔줄 것인가.
현서는 눈앞의 개가 된 장기용을 바라보며 불안에 잠겼다.
“골드스톤? 거기 소속이라며.”
“네. 맞습니다.”
“돈놀이나 하는 양아치 새끼들 아냐, 그것들.”
취해 주절거리는 목소리가 저속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양아치 짓 일삼는 게 누군데.
“우리 여사님 말론 JK 법무팀에 자리 봐준다고 그래도 싫다 그랬다며? 그런 양아치들 밑에서 개고생하고 푼돈이나 받느니 JK가 낫지 않아? 난 변호사님 마음에 드는데.”
“죄송하지만 푼돈이 아니라서요. 많이 받습니다. 골드스톤에서.”
소심한 반박에 장기용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는다. 소름 끼치게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무슨 일로 절 부르셨는지, 다시 여쭤봐도 될까요.”
더는 마주 보고 있기 거북해서였다. 이제 그만 자리를 뜨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했잖아. 얼굴이나 볼까 해서 불렀다고.”
술잔이 한 번 더 채워졌다. 세 번째였다. 가득 차 일렁이는 술잔에 시선을 고정하곤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그럼 용건은 다 끝나신 거네요.”
“뭐?”
장기용이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부라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얼굴 뵙고 인사드리는 건 석 잔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용건 없이 오래 앉아 있는 걸 잘 못 해서요.”
그가 채운 마지막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켜곤,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술 감사히 잘 마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 간다고? 누구 마음대로?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많이 건방지시네?”
부정확하고 꼬인 발음의 말들이 두서도 없이 흘러나왔다. 아마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지도 못할 상태였다.
문득 이런 질 낮은 인간을 위해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이 떠올랐다. 울분을 토하며 제 뺨을 때리던 이유진과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오열하던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느냐며 악을 쓰던 또 다른 피해자까지. 이 쓰레기 하나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사람들 가슴에 못 박으며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게.
기가 막혔다. 형언 못 할 감정이 치밀고, 속이 알알이 쓰려 왔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다.
“아. 그래. 용건. 용건! 그게 필요하셨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장기용이 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비틀비틀, 저를 노려보고 선 현서에게로 다가왔다.
“자. 돈 주면 뭐든 다 한다면서, 너.”
한 움큼 꺼낸 고액 수표가 다발로 눈앞에서 흔들댔다.
미친 새끼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약에 취해 여자나 때리고 고소당해 빨간 줄 그어질 뻔했던 게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근데 그걸 수습하고 뒤처리해 준 변호사한테 또 이 짓을 한다고. 분리수거도 안 될 답 없는 쓰레기 새끼.
“이걸론 어림도 없겠는데요.”
눈앞에서 어른대는 돈다발을 흘긋 내려다보며 말했다.
“돈 주면 뭐든 다 하는 거 맞는데요, 이사님. 제가 몸값이 꽤 비쌉니다.”
“와. 뭐라는 거냐, 이게?”
“사모님께서 이사님 걱정이 많으십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후회할 일은 안 만드시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 합의서에 도장도 마르기 전에 또 고발 건 들어가 봤자 부담만 가중되세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협박이었다. 그냥 참고만 있진 않겠다는.
취한 와중에도 그 결의 넘치는 의도를 눈치챈 장기용의 미간이 훅 우그러졌다.
“뭐?”
“그러니까 좀 적당히 하시란 말씀입니다. 이제 정신 차리실 때도 되셨잖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쓰레기처럼 굴어 여러 사람에게 민폐 끼치고 살 거냐는 뒷말까진 차마 하지 못했다. 어차피 쓰레기 하나 개과천선시켜 득 볼 일도 없었고,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었던 JK에도 눈곱만큼의 관심도 애정도 없었다. 쓴소리하고 훈계한다고 알아들을 위인도 결코 아니었고. 더 해 봤자 제 입만 아픈 일일 테니. 그저 이 정도 의사 표현, 화풀이면 충분하다 싶어 그만 시선을 돌렸다.
“나가 보겠습니다.”
다소 벙찐 표정의 장기용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현서를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기가 막히단 듯이.
기분 나쁜 그 면상에 확 따귀라도 갈기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러 참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닫힌 문 너머로 킬킬대고 웃는 소리와 욕지거리 섞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또각또각, 힘주어 발을 디뎌 복도를 빠져나왔다. 있는 대로 태연한 척을 했지만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쥐는 손가락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야. 상황 끝났어.”
- 와…. 변호사님.
수화기 너머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다 듣고 녹음하던 솔이 혀를 내둘렀다.
“왜. 좀 셌나?”
-네. 많이요.
후,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제야 자신이 제대로 감정 컨트롤 못 하고 오버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 어떡해요? 이거 뒷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장기용 그놈 완전 미친놈인데. 괜히 건드려 놔서 앙심 품고 해코지라도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꼴 하루 이틀 봐 온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왜 그랬나 후회스러웠다.
“열심히 맞아 줘도 그 여자 분 다 안 풀리고, 당신 용서 못 받습니다. 모르는 거 아니잖아. 다 알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어쩌면 그 말에 반박을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쓸데없고 부질없단 걸 알면서도 그게 제 나름의 속죄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괜한 오기였다.
- 진짜 거래 끊을 생각이세요? 그 인간들이 그러라고 순순히 오케이 할까요?
“몰라. 누가 책임지겠지.”
- 누가요?
“있어. 다른 사람이 자기 거 건드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
현서는 건조하게 답하며 시동을 걸었다.
“나 이제 운전. 끊을게.”
짧은 한숨을 내쉬며 액셀러레이터를 꾹 눌러 밟았다. 하얀색 SUV가 도로 한가운데로 주욱, 미끄러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