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18화 (18/115)

♬(18)

휑할 만큼 커다란 사무실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정혁은 현서가 내민 자료를 읽으며 벌써 10분 넘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쩐지 평소보다도 더 싸늘한 분위기에, 현서는 저도 모르게 맞잡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단순히 제 느낌인지는 몰라도 요 며칠 서정혁의 태도가 퍽 냉랭했다. 피곤해서인가,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아서인가. 그의 길쭉한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거였다. 이유도 모른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던 그의 손이 드디어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두툼한 입술이 열리고, 동굴 같은 목소리가 긴 침묵을 깼다.

“1,000억.”

뜻밖의 말에 고개를 번뜩 들었다.

“공개 매각으로 돌리기 전에 우리가 선수 치죠.”

“…네?”

본입찰 상각 전 영업 이익 배수가 3배로 매겨졌던 기업이었다. 그가 부른 1,000억은 무려 5배가 넘는 밸류에이션♬(valuation, 기업 가치 평가)이었다.

“지난달 HRR과 단독 협상 때 GNA가 부른 금액이 700억입니다. 그래서 일전에 우리 쪽 담당 파트너가 이미 700억 수준으로 언질을 줬던 것 같고요. 단기 엑시트도 고려하자면, 말씀하신 1,000억은 너무 과한 금액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반발에 인상을 쓴 그가 비뚜름, 턱을 치켜들었다. 반듯한 이마와 우뚝 솟은 콧날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각도였다. 그래서 이어진 질문이 더 고압적으로 느껴진 건지 몰랐다.

“과하다는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겁니까?”

“그건, 본입찰 시 GNA 밸류에이션이….”

“그 밸류에이션은 누가 정한 거고.”

말허리가 서걱 잘렸다. 사납고 시건방진 눈동자가 추궁하듯 맞물렸다.

“인수 시 차현서 씬 무슨 근거를 가지고 밸류에이션을 판단합니까?”

질문이 연달아 던져졌다. 주변 공기의 흐름마저 냉랭히 얼어붙은 듯한 위압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본능적으로 우위에 서는 법을 아는 인간. 상대를 억누르고 제압하는 데 이골이 난 남자라는 걸, 저도 모르게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변명이 필요했다. 뭐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변호사인 저로선 객관적 지표를 가지고 판단하는 방법밖엔….”

“객관적 지표.”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툭, 내려놓은 그가 코웃음을 쳤다.

“뭐가 객관적인데. 책상머리에 앉아서 계산기 두드려 산출한 값이면 다 객관적인 건가?”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판단하는 사람마다, 그리고 기업마다 주관적 기준이 다르다는 것쯤은.”

“그러니까. 객관, 주관 다 통틀어서 정한 차현서 씨의 기준이 뭐냐고 묻잖습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껏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사안이었다. 객관적 지표를 통틀어 파트너가 취합한 결과를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으로 상황 대처만 해 왔을 뿐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답이 있던가.

“대답해요.”

그가 답을 재촉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강포한 눈빛에 알고 있던 지식과 판단 근거, 논리 따위는 싹 다 잊힌 지 오래였다.

정혁이 직접 손을 대기로 한 GNA 건과 은성제약 건은 파트너보다 현서의 판단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소속 파트너 탓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700억 밸류에이션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있단 뜻이었다.

멋대로 정한 밸류에이션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파트너가 쓸데없이 거래 상대에 금액을 흘리게 놔뒀던 건 명백한 제 불찰이었고 실수였다. 서정혁은 분명 그걸 추궁하는 거였다.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다른 어떤 말도 나오질 않았다. 겨우 들이켠 숨만 아슬아슬 참고 있었을 뿐.

“내가 대신 말해 볼까.”

“…….”

“직전 거래에서 상대가 부른 금액이 700억이라. 혹은 실제 거래 현장, 비정량적 상황은 좆도 고려 안 하고 입만 나불대는 애널리스트를 신뢰해서. 아님,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후려치기만 할 줄 아는 저급한 PEF들 말을 믿어서. 그것도 아님, 전문가랍시고 여기저기서 찧고 까부는 새끼들이 쳐 놓은 박스 그대로 들고 올 만큼 순진해서. 자. 이 중에 답 있는 거 맞아요?”

고저 없이 울리는 사나운 목소리에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제대로 답도 못 할 근거로 매긴 밸류에이션을 누구 마음대로 지껄입니까, 감히.”

그 고압적 시선이 자신의 허락 없인, 숨 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허락하지 않은 정적에 숨이 옥좼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가 초라하게 갈라져 나왔다. 마른 입술을 앙다물었다. 결국 불찰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정수리 위로 그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따갑고 뾰족했다. 오롯이 버티고 견디기 힘들 만큼.

“어지간한 금액으론 그 인간들 그냥 거래를 깨고 싶을 겁니다. 하는 꼴 보니 처음부터 비딩♬(bidding, 호가 입찰) 붙일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다섯 배가 아니라 열 배, 스무 배 이상 가격 치솟을 거고요.”

상상해 보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코 수습하지 못할 그런 상황, 말이다.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바라봤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무감하고 서늘한 얼굴, 사나운 눈동자에 맹수 같은 이채가 서렸다.

“확실히 해두죠. 앞으로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순간 깨달았다. 그간 자신이 실컷 만지작댔던 객관적 지표, 주관적 임기응변과 처세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다 부질없단 걸.

“모든 거래엔 내 판단, 내 직감만 유일하고 유효한 기준입니다. 알겠어요?”

이 남자는 동물적 본능 앞에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말하며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저를 보는 새카만 눈동자가 반성문의 다음 구절을 재촉이라도 하는 듯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겁니다. 내가 차현서 씨한테 비싸게 치른 돈값 제대로 해야지 않겠습니까. 아직 본전도 못 뽑았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눈 하나 깜짝 않고 잔인한 단어만 골라 가며 내뱉는다.

“난 누가 내 거 건드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다른 인간이랑 내 거 공유하는 것도 용납 못 하고. 내 거에 흠집 나는 것도 못 참아서. 내가.”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남자의 말버릇을 망각하고, 잠시 잠깐 착각에 사로잡혀 말도 안 될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게 우스워졌다. 도대체, 이런 남자에게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입술을 아프도록 짓깨물고 본부장실을 걸어 나왔다. 덕분에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제 얼굴이 볼썽사납게 엉망이라.

***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던져 놓은 서류를 노려봤다. 여자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쥐어 내밀었던 종이 뭉치를.

유능하다곤 하지만 아직 경력이 많지 않은 파릇한 변호사였다. 이전 청송에서도 기업 인수 합병 건만 전문적으로 진행했던 것이 아니었고, 관련 학위나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 정도 지식과 상식으로 판단하는 게 당연했다. 평생 남의 물건 빼앗아 되파는 일에 골몰해 온 사람의 판단과 비교해 질책할 수는 없는 거였다. 게다가, 상대측에 경솔히 말실수를 한 건 확실히 그녀가 아니었다.

모르지 않는다. 알았다. 다 알고도 또 감정이 과해져 버렸다. 요 며칠 잦아진 악몽과 통증에 날카로워진 심기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전에 없이 혼란스럽단 게 근인이었다.

도대체 차현서에게 하고 싶은 게 뭔지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의미도, 부질도 없을 알량한 복수심. 내 아등거리는 상대를 망가뜨려 보고 싶다는 악랄한 호기심. 아니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도도하고 비싸게 구는 여자를 기어이 제 밑에 깔아 누르고 싶단 승부욕. 제 손에 쥐고 마음껏 흔들어 보고 싶단 소유욕?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그 요요하고 색스러운 얼굴에 아랫도리가 동하기라도 했단 건가 뭔가.

맥락 없는 가정에 절로 실소가 터졌다.

급작스러운 두통이 밀려들었다. 정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일어났다. 책상 위 서류를 채어 휴지통에 처박아 던지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차선엽한테 선물 보내. 지금.]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굴고 싶진 않았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게 다 차선엽과의 질긴 악연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므로, 근원을 건드려 봐야만 모호한 게 선명해질 것 같았다.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

엿같았다. 내면 깊숙이 숨기고 있던 치졸함을 들켜 버린 것만 같아서. 못나고 초라한 제 가면 속 얼굴과 맞닥뜨린 것만 같아서. 기어코 차현서 그 여자가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고 있는 거였다.

대체 지금 누가 누굴 쥐고 흔드는 건가.

냉랭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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