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16화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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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침묵이었다. 현서는 뒤통수를 푹 묻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정혁의 옆얼굴을 흘긋 바라봤다. 어디가 아픈 건지, 화가 난 건지. 평소와 달리 많이 가라앉은 분위기에 조바심이 났다.

“할 말 해요. 흘깃대지 말고.”

옆에도 눈이 달린 건지, 시선을 알아차린 남자의 음성이 나른히 들려왔다.

“혹시, 화나셨어요?”

결국, 머뭇대며 입을 뗐다. 실상 제 발이 저려서인 까닭도 있었다. 그 정도 발끈한 걸로 이 큰일이 덜커덕 엎어지기에 하겠냐마는, 공사 구분 확실하다고, 조인호와 관련한 사적 감정 접은 지 오래라고 그렇게 큰소리를 쳐 놓고 욱했던 게 좀 민망하기는 했다.

“아까 제가 안 의원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것 때문에….”

스륵,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왔다. 위압감에 절로 말꼬리가 흐려졌다.

“나한테 하는 거에 비하면야, 딱히 무례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새카맣고 짙었다.

“근데 왜….”

“화난 거 아니고, 그냥 좀 피곤해서.”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해쓱한 낯이긴 했다. 다소 마른 뺨이 오늘따라 더 팬 것도 같았고.

“어디가 안 좋으세요?”

몸도 안 좋은데 술까지 마신 건가 싶었다. 분위기 만드느라 비운 잔만 족히 일고여덟 잔은 되었던 것 같은데. 꽤 도수 높은 청주였다. 그 정도로 취할 주량이 아닌 것 같긴 했어도 몸 안 좋을 땐 뭐든 무리일 테니.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또르르 구르며 그를 살폈다.

“버릇인가?”

“…네?”

“사람 이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

느긋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꼭 낮은 음의 노래처럼 들렸다. 착각인지, 제 입술을 향해 있는 그의 시선에 괜스레 두 뺨이 홧홧했다.

“제가 언제, 뚫어져라….”

“한국 사람들 나랑 눈 맞추는 거 되게 싫어하던데. 차현서 씨는 아닌 척하면서 볼 거 다 본단 말이죠.”

또 반쯤 놀리는 것 같기도, 저를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매번 사람 샅샅이 훑어 벗기는 것처럼 보는 게 누군데 도리어.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닐 텐데요.”

툭 쏘아붙이듯 말하자, 그가 픽 웃었다.

“왜 웃으세요?”

잠시 잠깐이나마 그에게 걱정 비슷한 마음을 품었다는 게 괜스레 억울해져 또 발끈했다. 왜 매번 이렇게 이 남자 앞에선 감정 컨트롤이 제 멋대로인 건지.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냉소인 건지, 동정인 건지.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 쓰고 버티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까, 오늘 보니 문득 그런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데.”

진심 모를 남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또 그 눈빛에 현혹될까 싶어서.

“별로요.”

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본부장님 생각하시는 만큼 애쓰고 힘들었던 거 없습니다. 원하는 만큼의 대가 받으려면 이 정도 노력이야 뭘 하든 감당해야 하는 거니까요. 세상에 손해 보는 거래는 없다는 말. 좋아하시잖아요, 본부장님도.”

“와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그 얼굴에 일순, 아차 싶었다.

“언제 또 내 인터뷰까지 다 찾아 읽으시고.”

세상에 손해 보는 거래는 없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거나 혹은 이득을 남긴 것 같은 거래도 결국엔 다 그 가치만큼의 거래가 이루어진 것뿐이다. 그러므로 거래를 통해 이득을 남긴다는 건, 그 재화와 서비스에 매겨진 가치를 정확히 인지한 사람이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다른 아둔한 이를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사기극인 셈이다.

어느 경제지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을, 저도 모르게 무심코 내뱉은 거였다. 민망함에 두 뺨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많으셨네, 우리 차 팀장님께서.”

“이 정도야 부하 직원으로서 기본이죠. 본부장님도 저에 대해 모르는 거 없으시잖아요.”

당황을 감추려 있는 대로 태연을 떨었으나 실은 그 능글대는 눈동자에 바짝 긴장을 했다. 핸드백 위에 올려놨던 손가락이 꾹 움츠러들었다. 작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뱄다.

“잘됐네. 그럼 맞혀 봐요. 내가 조인호, 안성태를 앞으로 어떻게 할 것 같은지.”

테스트라도 하듯 고개를 슬쩍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에 불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은성제약의 최종 부도 처리 그리고 그 이후 골드스톤은 최대 채권자로서 법정 관리인을 조인호로 지정할 계획이었다. 그런 이후엔 신약의 존재를 터뜨려 다시 몸집을 불리고, 주가를 최대치로 끌어 올려 그 시세 차익을 얻는 것. 그게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라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중간에 계열사 매각과 대규모 구조 조정으로 먼지까지 탈탈 털어먹겠단 세부 계획도 화려했지만.

굳이 법정 관리인을 조인호로 지정하려 하는 건, 기존 임원들과 채권단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법원 파산부 결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조인호와 안성태는 당연히 그 계획에서 이용당할 말일 뿐이고.

그런데 이것 말고 또 다른 생각이 있단 소리인가.

“힌트 줘요?”

생각에 잠긴 제게, 그가 느긋이 자비를 베풀었다.

“아까 조성호 사장 비서한테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럼 설마.

“조인호, 일찍 손절하시려고요?”

“그새 날 다 파악했네.”

그가 빙고를 외치며 웃었다.

기찬 숨이 비어져 나왔다. 돈 앞에 의리고 상도덕이고 양심이고 뭐고 다 없는 인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질인 데가 있었다. 이 와중에, 양손에 두 사람을 올려놓고 저울질을 해 악착같이 값을 더 매겨 보겠단 심산이었단 소리다.

불현듯 그를 ‘돈 귀신’이라 칭하던 양재숙의 말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녀의 표현이 정확했다. 돈에 미친 돈 귀신.

“되게 경멸스러운 눈빛인데요, 지금.”

“…아닙니다.”

아니라 답은 했으나 이 남자에게 진심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의심스러웠다. 아니, 애당초 감정이라는 걸 느끼기는 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또 속을 꿰뚫듯 저를 응시해 오는 그 눈동자를 부러 피하지 않았다. 이 돈 귀신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깊이 모를 새카만 눈동자를 깜빡이던 그가 느긋이 입술을 열었다.

“김준한 씨랑은 무슨 사이입니까?”

“…네?”

돌연 화제가 훌쩍 튀었다.

“학교 선후배 사이, 뭐 그런 시시콜콜한 답 말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팩트가 시시콜콜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여전히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현서의 미간이 슬쩍 팼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똑같은데, 어째 눈빛은 영 달라서요. 차현서 씬 원래 사람 따라 온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건가, 갑자기 뭐. 그런 게 좀 궁금해져서.”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하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돈 안 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고. 설명한다고 알아듣긴 할까 싶었다. 누구에게나 늘 냉한 온도로 공평한 서정혁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분야가 아닐 건데.

“선배랑은 워낙 오래 알고 지냈고, 편하고 친한 사이니까요. 당연히 직장 상사 대할 때랑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는 불편하단 거고.”

현서는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게 답니까?”

“네. 단데,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오래 알았고, 편하고 친하게 지내는 남녀가 그냥 학교 선후배 관계일 뿐이다?”

“…….”

“한국 사람들 생각보다 쿨하네.”

비아냥대며 말하는 매끈한 얼굴이 밉살스러웠다.

“남녀 사이이기 이전에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인데요. 이성이라고 해서 선후배든 친구든 못 하리란 법도 없죠. 어릴 때부터 미국에 쭉 계셨다면서, 본부장님이야말로 생각보다 좀 고리타분한 데가 있으시네요.”

“그래요. 차현서 씨야 뭐, 그럴 수 있다 치고. 근데, 김준한 씨도 당신 생각에 동의할까요.”

이건 또, 무슨.

현서는 답 대신 헛웃음으로 제 심정을 대변했다. 도무지 서정혁과 왜 이런 사적인 소리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업무 관련된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그만하겠습니다. [저는 저기, 다음 신호등 큰 사거리에서 차 세워 주세요.]”

운전대를 잡은 레오에게 하는 말이었다. 정혁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저, 먼저 시선을 피해 버린 그녀를 느른히 관찰할 뿐.

차가 스륵, 멈췄다. 현서는 살짝 묵례를 한 후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딴에는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고 세웠을 터였으나 정혁의 눈엔 그저 깜찍하게 앙알대는 걸로 밖엔 안 보였다.

“갈수록 알 만하네. 뭐 어쩌고 살았는지.”

또각또각, 저 멀리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혁은 혼잣말을 읊조렸다.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흘긋, 백미러 속 정혁의 표정을 확인한 레오가 불현 입을 열었다. 제 말이 들리긴 하는 건지, 차창 너머로 고정된 시선엔 미동조차 없다.

[차선엽 딸에 대한 단순 정보 수집인 겁니까, 아님 그냥 차현서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인 겁니까?]

무슨 소리냐 되묻듯, 그제야 정혁이 거울 속에서 눈을 맞춰 왔다.

[전자라면 좀 과한 느낌이고, 후자라면….]

레오가 뒷말을 흐렸다.

그로선 백미러에 비쳤던 풍경이 퍽 낯설어서였다. 그가 아는 한 ‘라이언 서’의 눈빛이 번뜩일 때는 딱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눈앞의 목표가 명확할 때. 자신이 먹어 치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곤 곧 시작될 사냥에 대한 잔인한 기대감에 한껏 흥분했을 때뿐.

그러나 조금 전, 제가 목격했던 서정혁의 눈빛은 어쩐지 좀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껏 그가 알아 왔던 것과는 달라도 좀 많이 다른, 어떤….

[어느 쪽 같은데, 넌.]

답 대신 반문이 돌아왔다. 차마 느낀 그대로 말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낮게 뇌까렸다.

“자꾸.”

자신은 알아들을 수도 없을 한국어로.

“과해지게 만드니까, 저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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