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15화 (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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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할 만큼 널따란 방 안. 커다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쪼르르르, 술잔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현서는 제 옆의 정혁을 흘긋 살폈다.

이곳까지 오는 차 안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한 건지, 피곤한 건지, 아님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던 건지. 어제 제 손에 기어코 약봉지를 쥐어 집 앞까지 바래다주던 모습과는 자못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확실히 어제는 감정이 널을 뛰어 제정신도 아니긴 했다만.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서 실례가 아닐지, 내심 걱정 많이 했어요 내가.”

서정혁의 잔을 채운 안성태가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를 하며 껄껄 웃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선자였다. 채권 매입의 가장 강적으로 점찍었던 김경욱을 여기까지 물고 온 게 바로 그였다. 이제 곧 사위가 될 조인호에게, 어떻게든 은성제약의 실권을 넘겨야 본인에게도 남는 장사인 혼사가 될 거였다. 그러니 채권단 매수에 이토록 적극적일 수밖에.

“실례는요. 의원님 덕에 이렇게 좋은 자리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조금 전까지 냉랭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서정혁은 뻔뻔스레 능청을 떨며 말했다. 안성태 옆에 앉은 김경욱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오긴 했어도 아직 완전히 다 넘어간 건 아니라는 뭐 그런. 나온 김에 자존심이라도 내세우려는 모양이었다.

정혁이 입매를 올리며 그런 김경욱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제 잔 한 잔 받으시죠.”

마지못해 잡은 김경욱의 술잔에, 그가 술을 따라 부었다. 기울어진 손목에서 메탈 시계가 우아하게 번쩍였다.

줄곧 미국에 있었으면서 이런 지극히 한국식 접대는 또 왜 이렇게 익숙한 건지. 봐도 봐도 매일 새로운 남자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극히 부조화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자연스러운 표정과 제스처였다.

“혹시나, 서 본부장님께서 오해를 할까 봐 내 미리 말씀드리지만, 내가 무슨 결정을 하고 이 자리엘 나온 게 아니에요. 그냥 안 의원이 하도 부탁을 하기에 식사나 한번 할까 해서 나온 것뿐이지.”

김경욱이 헛기침을 하며 애써 선을 그었다.

“네. 잘 압니다. 저도 인사나 드리러 나온 겁니다. 거래를 하든 안 하든, 어쨌든 한국에서 짐 풀기로 작정한 이상 두 분 같은 인맥이 있어야 저도 계속 장사해 먹고살 것 같아서요.”

눈 하나 깜짝 않고 입에 발린 소리까지. 누구 앞에 고개 한 번 안 숙이고 빳빳이만 굴 것 같은 인간이 이런 능글맞은 소리를 해 대니 되레 효과가 더 좋아 보이긴 했다. 속 뻔한 능청과 아부가 어이없게도, 매우 진정성 있게 들릴 만큼.

“알다시피 조 회장님이랑 나랑 보통 사이도 아니고, 그 오래전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인데 지금 사정이 좀 어렵다고 내가 바로 뒤통수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겠어요?”

술을 들이켜며 김경욱은 어렵다는 듯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시겠죠. 이해합니다.”

정혁은 느긋이 고개를 까딱였다.

“신의. 의리. 도의. 정. 뭐 그런 것들, 김 사장님께서 중요한 철학으로 삼고 계시단 거,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근데.”

술잔을 매만지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런 것들도 다 본인에게 여유가 남아 있을 때나 가능한 거니까요.”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냐, 상대가 눈으로 물어왔다.

“사장님께서 솔직히 말씀해 주시니 저도 기왕 이렇게까지 된 거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앞으로 석 달 안에 은성제약 주가 바닥 볼 겁니다. 그럼, 사장님께선 그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갖고 계신 지분 모두 넘겨주시죠. 휴지 조각된 가격 말고, 매각 결정하신 시점의 거래가로 저희가 매입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그러면 조 회장님과의 신의, 의리, 도의, 정, 이런 것들 다 지키면서 손해 안 보는 장사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돈에 눈 뒤집혀 평생지기 뒤통수쳤단 비난 같은 것도 감수하실 이유 없고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굳이 이렇게까지 모험을 하는 이유가….”

“돈이죠.”

그가 뱀처럼 웃었다.

“기밀이라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희도 나름대로 입수한 정보도 있고 판단한 바가 있어서요. 한마디로 돈 냄새를 맡았단 말씀이죠.”

“내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땐 어쩌려고.”

“다른 방법을 찾겠죠. 뭐, 근데 아시겠지만 사장님께서 끝내 거절하셔도 전 결국 어떻게든 먹습니다, 은성.”

실컷 입에 발린 말로 너스레를 떨어 놓곤 이제 와 굳이 너 따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며 여유를 부렸다. 정중한데, 교만하고 건방졌다. 깍듯한 한편 불손하고 무도했다.

그럼에도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그의 말에 상대는 헛숨만 삼킬 따름이었다. 지금껏 그가 보여 줬던 그 잔혹 행위들을 일일이 열거해 귀에 박아 줄 필요조차 없었다. 모르던 사람조차 단번에 알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서정혁이 얼마나 악랄한 인간인지.

“다만 저희도 이왕이면 가성비 좋은 방법을 택하는 게 나은 거고, 사장님께서도 손해 없이 깔끔히 이 상황 마무리 지으실 수 있으니 서로 윈윈하는 쪽으로 쉽게 가잔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언젠가 자신에게도 이런 얼굴로 코웃음을 쳤던 남자를 기억해 냈다.

“그래도 거절하시면 저로서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설핏 휘어지는 입꼬리와 우아한 제스처. 어떻게 이 불량스럽고 오만한 남자가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눈빛, 숨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 그는 어떻게 해야 사람을 들쑤실 수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원하는 걸 빼앗을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동물적 감각은 타고난 것이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가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서정혁은 타고난 사냥개였다.

깊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정적에 휩싸인 분위기 속에서 서정혁 홀로만 여유가 넘쳤다. 두툼한 입술이 술잔을 입에 문 채 느른히 움직였다.

“혼자 결정하기 힘드시면 다음 주 채권단 회동 때 충분히 논의하시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그 정도 시간은 드려야죠, 어려운 결정 하시는데.”

기다리지 않아도 결과는 뻔해 보였다. 결국 김경욱은 서정혁이 원하는 걸 내줄 수밖에 없을 거였다. 조 회장도, 조인호도, 안성태도, 김경욱도. 이미 모두가 서정혁이 짜 놓은 판 위에 놀아나고 있었으니까.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었을 뿐.

“다만 결정이 늦어지시면 손해가 더 커지십니다. 안타깝게도 주가가 연일 하향 곡선이네요.”

느긋한 그와 달리 김경욱의 표정은 자못 초조해진 듯 보였다. 이미 이 상황은 종료됐다고 봐도 좋을 만큼이었다.

“하여튼 서 본 이 사람, 이거 이거. 사람 마음 들었다 놨다 하는 것 하나는 아주 재주야, 재주.”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안성태가 괜스레 껄껄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창백해진 얼굴의 김경욱은 결국, 급한 일이 생겼단 핑계를 대며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나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급하게 마련된 만찬 자리도 깔끔히 파하기로 했다.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을 나서며, 안성태는 줄곧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현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전까지 청송에서 근무했다고?”

“네. 5년쯤 있었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JK 갤러리에서 몇 번 봤던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뵌 적 있습니다.”

긍정의 대답에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현서를 훑었다.

“그래. 우리 조 이사한테도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었다고.”

조인호와 결혼한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사실이었으니 눈앞의 차현서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을 터였고, 그 차현서가 JK에서 개 노릇이나 하고 있었단 사실에 내심 조롱이 하고 싶어진 거였다.

어찌 됐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딸과 결혼할 놈이 이런 천박한 여자와 과거사가 있었다는 게 퍽 불쾌한 듯보였다. 아마도 제 이름에까지 스크래치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겠지. 할 수만 있다면 없애고 밟아 존재감조차 희미하게 만들고 싶을 텐데 도리어 눈앞에서 알짱대니 얼마나 성가시겠는가. 모르지 않았고, 익숙했다. 평생 특권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인간들 특유의 심술이라는 걸.

“특별히 제가 도와드린 건 없습니다. 그냥 하는 말씀이셨을 겁니다.”

더는 현재형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만하라고. 그러나 안성태는 별로 그만둘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음, 아냐 아냐. 젊은 아가씨가 아주 능력이 뛰어난가 본데. 아주 유명해요, 이 바닥에 차 변 소문이 자자해. 능력도 서비스도 끝내 준다고. 그래서 내가 아주 기대가 커. 음?”

질 낮은 희롱이었다. 지난 몇 년간 높으신 양반들 뒤 닦아 주는 뒤처리 반을 자처하며 파다해진 제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차현서란 여자는 돈만 주면 법률 서비스는 물론이고 원하면 밤 서비스까지 해 준다는 꽤 악랄하고 천박한 소문.

그래서 겪은 수모도 상당했다. 덕분에 익숙했고. 늘 그랬듯 평소처럼, 그저 농담처럼 웃고 넘어가며 혼자만 삭이면 간단히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참기 싫었다. 이유는 자명했다. 제 등 뒤에 번듯이 버티고 서 있는 서정혁 때문에.

“네. 들으신 소문대로 제가 좀 하는 편이긴 합니다.”

이를 악물고 평온한 목소리를 냈다. 너 따위, 별것도 아닌 인간에게 결코 동요하지 않겠단 듯이. 참지 않고 속에 있던 말을 모조리 퍼부었다.

“젊은 아가씨라고 만만히 봤다가 큰코다치시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죠. 계속 기대 많이 해 주세요. 모쪼록 의원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결과 만들겠습니다.”

제 나름의 경고였다. 등 뒤에서 피식,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듣고 있던 서정혁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린 거였다.

반면 눈앞의 안성태 표정은 영 좋지 못하게 굳었다.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현서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가볍게 묵례를 하고 먼저 돌아섰다.

정혁은 또각또각, 다갈색 머리를 찰랑대며 사라지는 그녀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건드리면 갸르릉대는 고양이 같단 생각을 했다. 누가 차현서 아니랄까 봐.

“능력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좀 까칠한 구석이 있구먼, 차 변이.”

제 말에 동조해 주기라도 바란 건지, 안성태는 대 놓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가소로워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고 타박타박, 안성태 앞에 다가섰다.

“차현서 씨한테 기대가 크다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돌연 찬 공기를 갈랐다.

“앞으로의 의원님 정치 인생이 저 친구 손에 달렸습니다, 의원님. 아시죠?”

정중한 말씨와 달리 싸늘히 굳은 표정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 피식대던 얼굴이 맞나 싶게 다른 얼굴이었다.

“의원님 사위 되실 분께서 은성을 접수하냐 못 하냐는 차현서 변호사 손에 달려 있단 말씀입니다. 기껏 베팅하듯 한 딸 장사에, 일말의 보람이라도 찾으시려면 말씀을 좀 신중히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협박의 의도가 다분했다. 정치판에서 30년 넘게 구른 능구렁이 같은 안성태가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안성태는 덥석 뒷걸음질을 쳤다.

“어허. 서 본 이 사람, 내 말에 오해를 한 모양인 것 같은데. 나는 차 변이 워낙 낯이 익고 딸 같아서 친근하게 한마디 한 건데, 그걸….”

“따님껜 평소 무슨 서비스를 받으십니까?”

“…뭐, 뭐?”

일순 당황한 얼굴이 흥분으로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농담입니다. 저도 의원님이 워낙 가족 같고 친근해서요. 오해는 마시고요.”

“헛, 참! 이, 사람이…!”

고저도 없이 평온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안성태는 그저 하릴없이 손부채질만 해 댈 뿐이다. 어찌 됐든 남들 보는 눈을 가장 무서워하는 정치인이었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도 뒷말을 삼키는 건,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단 뜻이었다. 수행원이 차를 몰고 오자, 안성태는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정혁은 담배를 하나 빼 물며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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